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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역대 정부에 대한 촌평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아보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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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님은 직접 6·10항쟁을 목격하고 6·29선언을 통해 대권을 거머쥔 전직 군인이었다. 그가 근무하는 곳에는 늘 버젓이 군복이 걸려 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YS와 DJ로 대표되는 민주진영의 분열을 틈타 어부지리를 얻은 선거 결과는 이후 여촌야도라는 의회 구도를 깨뜨려버렸다. 3당 야합을 통해 대구 경북은 물론 부산과 경남이 뭉쳐 전라도와 척지는 기점이었는데, 필자는 이를 한국 정치사를 병들게 한 대사건으로 규정한다. 만약 ‘우리가 남이가’라는 이상기류만 아니었던들 영호남이 이처럼 극심하게 대립하는 일은 없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의 통합을 주도하며 지역인재를 채용하고,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에 이어 이산가족 고향 방문을 실현했다. 질서 있게 범죄와의 전쟁을 통한 치안 확립, 민주 노조 대거 설립, 중산층 형성, 1기 신도시 사업, 인천국제공항 건설 계획을 세우는 한편 중국, 러시아 등과 수교하는 등 북방외교 업적도 있었다. 다만 대선이 있기 얼마 전 일어난 칼기폭파사건은 아직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장면이다.
김영삼 님은 오랜 야당 경험을 바탕으로 뚝심 있게 개혁정책을 펼쳐나갔다. 전격 금융실명제를 도입하고 공직자 재산공개를 통해 지하경제를 대폭 축소하였고, 다시는 군사반란이 불가능하도록 하나회를 숙청해버리는 결단을 보여주었다. 상징성 있는 문민정부답게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고 광주의 뼈아픔을 치유하는 등 민주화의 초석을 다지며 전교조 해직교사를 복직시켰다. 대학설립준칙주의를 채택하여 선제적으로 고급인력을 양성한 시책은(인구감소에 따른 20년 후를 내다보지 못했다고 이제 와 나무라는 건 좀 가혹한 일일 터이고) 국민 1인당 소득 1만 달러 시대를 열며 OECD에 가입하는 등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추동했다. 다만 너무 급속 페달을 밟는 과정에서 국제경제에 대한 안목이 태부족하여 IMF 사태를 초래한 실책을 범했으나 전체 업적까지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재임 기간 육해공에서 벌어진 대형 사고에도 불구하고 YS에게 느끼는 정서는,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신념과 용기였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던 시절 국내에 남아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잊지 못하는 이유다.
▲ 재개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주거지
김대중 님은 무려 반세기 만에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냄으로써 마침내 한국의 민주화를 완성한 장본인이 되었다. 그의 업적 가운데 으뜸은 IMF 최단기간 극복이다. 지구촌을 놀라게 한 금 모으기 운동은 현대판 국채보상운동으로, 차이가 있다면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으로 바뀐 상황에서 일제가 강요한 한일의정서가 그들이 주도한 시장 교란에 걸려들어 외환위기를 자초한 모양새였다. 버금은 인터넷망 구축을 들 수 있다. 이 기술에 힘입어 우리는 세계적 IT 강국이 됨으로써 오늘날 선진국 진입을 위한 초석을 깔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나아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져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데까지 이른다. 국민의 정부에서 두드러진 부분은 폭넓은 인재 등용이었다. 야권 정객을 민감한 안기부장에 앉히는가 하면 보수 인물을 통일부 장관에 보임하여 반대를 일삼던 햇볕정책을 강성언론에 홍보하는 연속극이 생중계되었다. 심지어 행동하는 양심을 향하여 위해를 가한 모리배들을 용서한 결과는 한민족 최초의 노벨상 수상이었다. 세계적 인권운동가다운 품격을 갖춘 처신이었다.
노무현 님의 극적인 당선은 한국 민주주의를 만천하에 한 단계 끌어올린 일대 쾌거였다. 그의 정치적 발걸음은 초장부터 지극히 서민적이었다. 상고 졸업생이 토굴을 파고 고난도의 사법시험에 합격한 일 자체가 뉴스거리였는데, 잠시 판사를 거쳐 세무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노동인권의 사각지대를 접한 뒤 무료변론을 마다치 않았고,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5공 청문회를 통해 일약 전국적 스타로 발돋움하더니 낙선이 빤한 곳에 들어가 바보를 자처한 끝에 그의 가치를 알아본 팬들이 ‘노사모’를 결성해 기어코 제16대 대통령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는 진영논리에 매몰된 정치 지형을 바꾸고자 했다. 사회 구조 혁신을 위한 거대담론을 놓고 여야가 대타협을 이룬다면 권력의 절반이라도 양도하겠다는 뜻을 피력한 터였다. 대북 포용과 시민의 자유 신장은 참여정부의 화두였으며, 기초연금제를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지속 가능한 환경 보전책, 검찰·교육·의료 개혁은 양성평등과도 직결된 문제였다. 그의 파격적 행보는 거지반은 신선했으나 정작 퇴임한 그를 나락으로 내몬 건 뜻밖에 검은돈과 결부된 음모였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66호)에는 ‘역대 정부에 대한 촌평 - 민주주의의 위험도를 높이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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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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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역대 정부에 대한 촌평 ‘임정에서 독재 군사정권까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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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지 않고서 과연 대한민국의 태동을 견인할 수 있었을까? 얼마 전 무자격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둘러싸고 벌어진 온갖 잡음을 접하며 들었던 생각이다. 이는 헌법 전문을 보면 더욱 명확하다. 즉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뉴라이트는 건국절 운운하며 떼를 지어 무리수를 두는 걸까? 그 이면에는 친일파 후손이라는 주홍글씨가 숨겨져 있다. 잘난 집안의 부끄러운 이력을 단지 국적 잃은 난민의 생계 활동쯤으로 둔갑하려는 술수임이 틀림없다. 만약 이 사람들 의도대로라면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가? 끔찍하게도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독립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들이 당대 반국가세력으로 전락하는 꼴이 된다. 필시 토착 왜구가 아니라면 어찌 감히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더구나 오늘날 독립지사의 자손들이 겪는 어려운 처지를 헤아리면 가슴이 미어진다. 조선총독부에 빌붙어 고자질을 일삼은 무리는 대를 이어 사회 기득권층이 돼 있으니 말이다.
이승만 님은 왜 임정에서 탄핵당했을까? 그의 미국 내 사생활을 들추면 그 사유가 차고 넘치지만, 핵심은 자리보전을 위해 내각책임제 개헌은 안 된다는 옹고집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조직의 분열을 획책하고 임정에서 발행한 국공채를 팔아 횡령하는 등 부패한 인물이었다. 이는 그가 집권한 12년의 행적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여운형과 김구 등의 암살 배후는 차치하고라도 초대정부 출범 직후부터 민족정기를 말살한 반민특위 해체를 비롯하여 친일파 중용, 사병화했던 서북청년회, 제주 4·3 및 여순 유혈진압에 이어 6·25가 발발하자 피신한 뒤 한강다리 폭파, 국민방위군 사건, 여러 지역의 양민학살 및 보도연맹과 같은 국가보안법 남용, 견통령(犬統領) 오탈자 폐간,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농간으로 국회를 무력화하는 등 무자비한 정적 제거를 통해 정권을 연장하다가 급기야 3·15부정선거로 인한 4·19혁명을 불러 스스로 말로를 재촉했다. 공적을 들어 균형추를 맞추면 시장경제체제 도입, 교육입국 토대, 농지개혁(이때 대지를 포함했다면 투기 봉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평화선 선포 정도를 들 수 있겠다.
▲ 주거환경이 열악한 골목길 계단 모습
박정희 님은 장면과 윤보선을 내세운 민주당을 뒤엎고 어찌 됐건 산업화를 이끈 주역이었다. 다만 그 이름을 들으면 맨 먼저 ‘세계사법사상 암흑의 날’(인혁당 사형자 8명 재심 끝에 최종 무죄 판결)을 사주한 반 인권적 철면피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 자신의 남로당 전력을 감추기 위해 좌익은 곧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민주인사들을 무차별 탄압한 것도 모자라 기형적인 유신헌법을 공포함으로써 그로 인해 망가진 인생은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어렵다. 게다가 서슬 퍼런 중앙정보부(안기부-국정원)를 사주해 수많은 사람의 간첩혐의를 조작하고, 사회 전반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그 여파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 반면에 철권통치 18년 동안에 괄목할 만한 업적도 있었다. 예컨대 경부고속도로와 지하철 개통, 공공의료보험 실시, 새마을운동, 산림녹화, 국립공원 및 그린벨트 지정, 과학기술인 우대책으로 중화학공업 육성, 부가가치세 도입, 공무원 채용 학력 제한 철폐, 직업훈련 제도 마련 등은 공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기억할 대목은 한강의 기적을 만든 이들은 무명의 기층 민중이었다는 사실이다.
전두환 님은 이른바 ‘서울의 봄’에 등장한 3김을 따돌리고 정권을 꿰찬 사나이였다. 20년 전 무능했던 민주당이 5·16 군사쿠데타 세력에게 정권을 빼앗긴 것처럼 엇비슷한 전철을 되밟은 터인데, 어떻게 어설픈 12·12 반란극이 가능했을까? 대다수는 벌써 망각했을지라도 그 뒤에는 정치적 감각이 뒤떨어진 김종필의 치명적 오판이 한몫했다. 혼란한 정국에서 호시탐탐 틈새를 엿보는 신군부의 생리상 모든 정보를 틀어쥔 마당에 무슨 선의를 기대했기에, 즉각적인 대통령 취임을 한사코 마다했는지 모를 일이다. 정권 탈취 과정에서 비극적 광주민주화운동을 촉발한 책임 선상에 미 정보기관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만 8년을 재임하는 동안 비록 민주주의 체제를 짓밟고 천문학적 비자금을 챙겼으나 몇 가지 정책은 주목할 만했다. 가령 도시와 농촌개발을 통한 교통인프라 구축으로 국민 생활의 질을 개선하고, 외국인 투자 유치 및 수출촉진, 집값 안정 등으로 꾸준히 경제발전을 이어왔다는 긍정적 시각이 있다. 다소 명암이 엇갈리긴 하되, 그래도 그는 전문가를 등용할 줄 아는 지도자였던 셈이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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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65호)에는 ‘역대 정부에 대한 촌평 -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아보니’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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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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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역사의 현장이 지닌 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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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이는 나의 평소 지대한 관심사여서 털어놓을 만한 생각이나 이야깃거리가 많을 줄 알았는데 막상 지상에 알리려니 그리 간단한 주제는 아니다. <역사>를 가리켜 개념적으로 “인류 사회의 발전과 관련된 의미 있는 과거 사실들에 대한 인식”이라고 정의한 다음, <현장> 곧 “어떤 일이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난 곳”이라는 뜻으로 접목해보아도 일부는 여전히 관념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시공의 중심에는 늘 사람이라는 사고(思考)뭉치가 도사리고 있어서다. 그만큼 수많은 사건의 주인공이며 허다한 조역을 눈여겨보는 일은 요긴하거니와 그래서 더욱 인간사를 예의주시할 수밖에는 없다. 나는 이에 관한 문제를 아래와 같이 대략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해보았다.
첫째, 역사의 현장에는 ‘사실’이 녹아있다. 이는 오랜 기간 첨예하게 대립하던 이해관계를 일거에 잠재우고 진위 여부를 판별하는 주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제아무리 권위자의 고증을 거치고 실무자들의 실사를 마친다고 해도 옛 현장에 침잠한 전후좌우의 사실관계만큼 사실 그 자체를 증명해주지는 못하기에 그렇다. 겉으로 보면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 모든 물증이 사라지는 듯이 보일지라도 역사의 현장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 집단이 다양한 측면에서 깊이 파헤칠 수 있는 사실들이 마치 파편처럼 흐트러져있을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들의 언행에는 도저히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이 어디엔가 묻어있기 마련이다.
둘째, 역사의 현장에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때때로 파묻힌 진실을 밝혀주는 결정적 증거가 되기도 한다. 온갖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사에서도 오묘하리만치 때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예기치 않은 물건이나 기록물이 나오는 경우를 지상을 통해 이따금 보았던 기억이 있다. 예컨대 대대로 물려받은 가보나 여러 유(류)품을 보관하고 있다가 어느 기회에 뜻하지 않게 빛을 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아끼던 소장품을 새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하나하나 점검하는 과정에서 희귀한 단서를 발견하는 사례들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그곳이 공적 기관이라면 기록이란 더더욱 감추기 어려운 법이다.
▲ 올림픽공원 내 몽촌토성에 있는 목책
셋째, 역사의 현장에는 ‘교훈’이 살아있다. 이는 굳이 눈높이의 범주를 개개인이 아닌 국가적 차원으로 격상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역사 현장을 직접 찾는 가족 구성원의 역사의식이 어느 모로 보나 투철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어서다. 틈틈이 아이들과 함께 박물관이나 사적지로 발걸음을 옮겨 실질적인 교육행위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이유다. 모름지기 역사교육의 현장학습이야말로 지나간 시간으로 되돌아가 공간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정신적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비록 상투적인 일상사일지라도 현상이나 사물이 진행되고 존재해 온 일련의 과정상에는 얼마든지 교훈적인 요소를 캐낼 수 있다.
넷째, 역사의 현장에는 ‘상징’이 숨어있다. 이는 앞의 세 가지 요소를 포괄하는 문화적 함의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다름 아닌 시대적 질곡에는 그때마다 민중의 요동치는 맥박 속에 한숨과 신음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있어서다. 그래서 어쩌면 상징은 역사를 가르치는 이들이 최종적으로 부각할 수 있는 마무리 결정판일지도 모른다. 좁게는 나의 실례를 들추어보아도 내게 일어난 일들 가운데 일정한 상징성을 확보하게 된 경험칙은 드물게나마 있었다. 설령 특정 사건이 사회적 트라우마일망정 그것이 확연히 형성된 심상(이미지)이라면 각자의 심연에 각인할 만한 개인사적 상징이 될 수도 있다는 시각이다.
그렇다면 지난한 과거를 딛고 힘겨운 현재를 살아내면서 다가올 미래를 효능감 있게 대비하기 위해서는, 저마다 치열한 삶의 터전에서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되 가능한 한 사고의 지평을 넓혀가는 작업에도 초점을 모아야 한다. 실시간 벌어지는 궤적들이 사안에 따라서는 충분히 역사서 또는 개인사의 한 페이지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응당 거기에는 개별 여건에 따른 고충이나 제한점도 있을 것이다. 다만 바람직한 삶의 방향성을 추구하는 시민이라면 공동체적 지향점에서 점점 멀어지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그것이 어언 고희를 바라보는 이 나잇살에 새삼스럽게 터득한 세상의 이치요 깨달음의 시야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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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64호)에는 ‘역대 정부에 대한 촌평 - 임정에서 독재 군사정권까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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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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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사라진 산성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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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산성을 찾아 떠나는 일이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을까? 이는 평소 나의 인문학적 관심사 가운데 하나여서 지면상에 선보일 만한 화젯거리를 털어놓으련다. ‘역사’라는 낱말의 사전적 개념을 들여다보더라도, “인류 사회의 발전과 관련된 유의미한 과거 사실들에 대한 인식”이 남아있는 ‘현장’, 즉 “어떤 일이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곳”을 보전하는 일은 당위에 속할 터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각에서는 몰상식한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왜일까? 이는 그 시공의 중심에 늘 사람이라는 사고(思考) 뭉치(?)가 도사리고 있어서다. 그만큼 수많은 사건의 주인공이며 허다한 조역을 눈여겨보는 일은 요긴하거니와, 그래서 더욱 생로병사로 점철된 인간사의 이면을 예의주시할 수밖에는 없다. 그곳에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녹아있고,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 남아있으며, 기록 자체에 대한 교훈이 살아있고, 교훈이 될 만한 상징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중에 내가 주시한 곳은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평택의 ‘비파산성(琵琶山城)과 ‘자미산성(玆美山城)’이었다. 인적이 뜸한 시골길은 짐작한 대로 성곽을 품을 만한 산자락을 찾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한 시간 전쯤 좀 헤매기는 했으나 인근 주민인 듯한 행인에게 길목을 물을 때만 해도 이토록 한 치 앞조차 안 보일 줄을 어찌 알았으랴. 실컷 자란 햇마늘 꽃 무리를 신기한 듯 쳐다보던 눈길도 잠시, 이리저리 오가며 ‘평택섶길’을 캐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몸도 맘도 지쳐갈 무렵, 한 분의 귀띔에 따라 가까스로 성글게 모여 사는 외딴 촌락으로 접어들었다. 반갑게도 동네 한가운데서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는 회화나무 세 그루, 그 밑 평상에 걸터앉아 하늘을 보니 어느새 해는 중천이다. 답답한 노릇은 휴식을 취하고 일어난 뒤에도 두 산성에 대한 아무런 꼬투리조차 찾아내지 못한 상태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거기서 다시 반경을 넓히고 좁히기를 되풀이하다가 겨우 찾아낸 비파산(琵琶山) 초입. 자그마한 절터를 뒤로하고 바삐 오르다 보니 비파산은 자미산(玆美山)으로 이어지는 무성산(武城山)의 한 줄기였다. 간간이 박힌 자갈길에 따가운 볕을 가려주는 솔숲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함께한 아내도 오르락내리락 산길을 걸으며 평택에 이만한 덩치의 산맥이 있다는 데 새삼 놀라는 눈치. 흔적을 감춘 비파산성에서 여우고개로 넘어가는 자미산(玆美山)에는 임경업 장군의 설화만 남아있는데, 그의 오줌 줄기에 갈라졌다는 산등성이 바위를 흘끔 훔쳐봤을 뿐 아무리 둘러봐도 둘레가 십여 리나 된다는 자미산성은 희미한 형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 원인인즉 이미 알려진 대로 아산만 방조제 공사 때 석재로 사용했다니, 아뿔싸 이거야말로 집단 몰지각에 기인한 게 아니면 무엇이랴. 우리나라에 가시지 않은 야만의 그늘이 한두 군데는 아니로되 문화재 보존에 대한 인식은 자못 심각하다.
▲ 산성길에서 사라진 자미산성을 찾아
단지 퍽 흥미로운 건 자미는 ‘북두칠성’을 가리키고, 지역민들은 아직도 이 산을 ‘재미산’으로 부른다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한자어의 뜻으로 풀어본들 ‘이렇게 검고 흐린 산[玆]’을 두고 ‘아름답다[美]’고 했을 리는 만무하거늘, 혹여 국자 모양의 별자리 아래 드러난 능선을 보고서 ‘재미 삼아’ 소원을 빈 데서 유래하지는 않았을지 내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경기도 도보(제3257호, 2005.10.17.)에 따르면 산세를 따라 둥글게 둘러친 성지(城址)에 흙으로 만든 내성과 돌로 만든 외성에, 동쪽 110m 부근의 흙으로 만든 부성으로 이뤄진 복합식 삼중 구조였으며, 석축은 평균 10~20m 정도 높이여서 해양으로 침투하는 적군이 쉽사리 접근하기 힘든 요새였다고 전해진다. 추후 학술조사를 실시한 결과 성내에서 문지(門地) 등 각종 시설물이 확인되었고,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는데 어느 부서에서 관리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로부터 남쪽에다 평지와 산지를 이어서 만든 비파산성 역시 여느 때 없이 배고픈 시절인지라 당장 농경지를 늘리는 일도 중요하였겠으나, 최소한의 보존 절차는커녕 전문가의 자문도 구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돌들을 유출하는 바람에 성벽 하부마저 일반인들의 육안으로는 도무지 식별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를테면 선인들이 이룩해 놓은 삼국시대의 테뫼식 석성을 후대인들이 새까맣게 지워버린 참이다. 다행히도 비파산과 자미산성을 이어주는 서낭고개는 여전히 자연생태계가 살아있었다. 이는 당대 힘겹게 고갯마루를 넘나드는 나그네들을 상호연결하는 통로였는데, 애석하게도 정부에서 주도한 대공사를 서두르면서 토루(土壘)를 떠받친 돌들까지 죄다 파다가 써버려 원형을 잃고 말았다니 떠올릴수록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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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63호)에는 ‘역사의 현장이 지닌 함의’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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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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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왜들 아이를 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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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대한민국의 출생률이 0.72명(2023년 기준)까지 내려앉았다.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 와! 그 정도로 낮은 수치의 출산율은 들어본 적도 없어요.”(Korea is so screwed. Wow!. That is, I've never heard of that low a fertility rate.). 이는 줄곧 여성과 노동, 계급 문제를 연구한 조앤 윌리엄스(72, 캘리포니아주립대 명예교수)가 충격을 받은 나머지 무례를 무릅쓰고 내뱉은 말이다. EBS ‘다큐멘터리 K-인구대기획 초저출생’ 제작진으로부터 2022년 한국의 합계출산율(가임기 여성이 평생 낳는 자녀 수)이 0.78명이란 사실을 전해 듣고 머리를 움켜쥔 참이다. 게다가 2024년 1/4분기 통계지표를 보면 이미 0.68명으로 떨어져 이제는 ‘극초저출생률’이란 신조어를 써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고로 그 숫자를 두고 국가비상사태나 다름없다며 큰 전염병이나 전란도 없이 이만큼 낮은 출산율은 처음 본다는 말이 절대 빈말이 아닌 건 홍콩이나 싱가포르와도 경우가 다르다. 왜 유독 한국만 그럴까? 매사 돈의 가치를 앞세우는 한국의 물신주의 문화에 초점을 맞춘 석학 윌리엄스의 지적이 더욱 뼈아픈 이유다.
이러한 국가적 재앙을 불러오기 전의 근대화과정을 소환하면 굳이 그녀의 원인분석이 아니더라도 최단기간에 한강의 기적을 이룬 부작용일 수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단적인 예로 특히 여성들은 사랑하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 부득불 경력 단절을 겪게 되고, 설령 이를 악물고 버틴다 한들 근무 평점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사회 구조적 문제를 떠안고 있으니 말이다. 역지사지해보시라, 어느 누가 전방위적 불이익을 감수한 채 자녀를 낳아 양육하고 싶겠냐는 반문이다. 윌리엄스의 일침 그대로 한국 청년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요컨대 한국 정부에서는 가정과 일을 병행하면서 이세를 책임질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요구다. 눈앞의 현안을 푸는 열쇠는 그대로 놔둔 채 OECD 가입국의 평균 합계출산율(1.59명, 2020년 기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사안을 해결하겠다는 시도 자체가 무모하다는 지적이다. 그녀는 여태껏 저출생 유발의 주요인을 방치하는 한국의 정책 입안자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며 어긋난 가족 시스템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만난 초등생들
무엇보다 경영자나 운영자의 현실 인식에 일대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기껏 젊은 여성들을 공들여 훈련한 뒤 막상 엄마가 되면 노동 시장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버려지는 국내총생산(GDP)을 역산해보면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손실이 발생한다. 당장 필요한 조치는 일하는 방식의 혁명적 혁신으로써 해마다 간헐적으로 발표하는 금전적 지원책만으로는 해묵은 실타래를 풀기 어렵다고 조언한다. 연례행사처럼 천문학적 예산 가운데 극히 일부를 선심 쓰듯 쥐여주며 출산을 강요하는 듯한 정부 시책은 이미 한계에 부딪힌 지 오래지 않은가? 실제 2021년 미국에서 17개 선진국 성인을 대상으로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부분은 ‘가족’이라고 답했으나, 한국인들만은 ‘물질적 풍요’를 골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가정복지 차원에서 ‘보육’에 재정을 투입하는 방안도 필요하지만, 자녀의 취학 전 6년 만이라도 생애주기에 맞게 경직된 직장문화부터 쇄신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필자의 견해는 출산 여성들을 근무 평점에서부터 우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끝으로 윌리엄스 교수는 언제든지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요구하는 한국의 ‘이상적인 근로자상’에 대해서는 “남성이 가장이고 여성은 주부인 1950년대에 맞게 설계된 모델”이라며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나쁜 시스템”이라고 일갈한다. 심지어 “한국은 여성이 남성보다 집안일은 8배, 자녀 돌봄은 6배 더 많이 하고 있으며, 남성은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는 대가로 자녀를 돌보며 느낄 수 있는 기쁨을 포기한 사회가 됐다”라고 잘라 말한다. 본의는 아니겠지만 역설적으로 “That is amazing(엄청나네요)”라는 말에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적기라는 의도적 인식을 벗어나 골든 타임이라는 긍정적 의식마저 쉬이 사그라지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라는 다소 냉소적일 수 있는 언사마저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나서서 인구소멸이라는 중차대한 국면을 국민 앞에 소상히 밝히고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다음, 그간 변죽만 울리던 ‘인구전략기획부’를 신설하여 국무총리에게 강력한 컨트롤 타워 역을 맡김으로써 주택 우선 분양 정도의 미시적 처방이 아닌 거시적 대책을 내놓아야 마땅하다고 본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62호)에는 ‘사라진 산성을 찾아서’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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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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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미서부 탐방기 ‘다양한 도시환경 보고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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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나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만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뜻밖의 경관에 걸음을 멈춘 채 탄성을 지를 수밖에! 세상에 이런 데가 있었다니 나는 선뜻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 봤던 치유의 빛깔을 떠올렸다. 주위를 둘러싼 자색과 홍색 조합은 맘껏 심신을 씻어내라는 눈짓이자 손짓. 게다가 여태껏 경사진 주거지 가운데 이만치 발걸음이 편안한 곳은 없었다. 일본 원도심이나 두바이조차 추종을 불허하리란 작심이 아니고서는 이토록 정교한 시공이 가능한 자체가 대단한 밑바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상주인구는 만 명 선을 넘지 않고 살고 싶어도 더는 집을 지을 수 없어 고가의 주택을 빌리거나 사들이지 않으면 쉽사리 한달살이마저 여의치 않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다. 단지 흠이라면 연중 한겨울을 빼고는 더운 편이라는데 그마저 습도는 높지 않아 지낼 만하다니 구미가 당긴다. 거기서 만난 교포의 얼굴을 보니 고국의 정세는 걱정스러운 반면 그 여유로움에서 우러나오는 행복감은 감추기 어려워 보인다. 눈을 감아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곳은 맑은 기운을 뿜어내는 최고 거주지였다.
라스베이거스야말로 모하비 사막 한가운데 세운 대작, 과연 한눈에 미합중국의 힘을 한껏 과시한 도시였다. 대뜸 회색빛 시멘트로 버무린 조각품이라고 하면 너무 내지른 수사일까? 하긴 트럼프 호텔을 보면 그 정체가 뭔지는 이미 밝혀진 셈이다. 호텔이라고 생긴 데는 어김없이 카지노. 정신을 혼미하도록 세팅해놓고 주머니를 털어가는 수법이다. 루시퍼가 달았음 직한 분홍빛 날개를 흔들며 엉덩이를 까발린 채 과객을 유혹하는 건 일상이다. 돈이 아깝고 시간이 모자라 그 대신 트램에 올라탄 지혜는 탁월한 선택. 느닷없이 이집트 크레오파트라가 중얼거리듯 아라비안나이트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다. 혹자는 이렇게 비아냥대고도 싶을 것이다. 300여 만이 모인 화려한 밤의 도시에 왔거든 해묵은 숙제를 풀라는 등의 넋두리 따위 말이다. 뉴욕 스퀘어가든을 방불하는 불빛 아래 골 빈 여인도 만나고 디즈니랜드를 흉내 낸 동화 속의 고깔 탑을 구경했으면 됐지, 그 이상 혼을 빼는 듯한 실내 정원이나 허접한 베네치아는 그저 최후의 만찬일 뿐이다. 라스베이거스 그 미혹의 극치는 우리 부부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 로스엔젤레스에 조성한 ‘스타의 거리’ 모습
로스앤젤레스의 한인타운은 이미 사양길이었다. 흡사 한국의 어느 도심 상가를 보는 느낌이랄까. 쓸쓸할 만큼 한산한 거리도 쏙 빼닮았다. 간간이 섞여 있는 영어 간판이 이곳이 U.S.A.임을 알려줄 뿐이다.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미국 내 두 번째 대도시에서 물가고를 견디다 못해 라스베이거스로 역류한다는 소리는 과장이 아닌 기정사실이라는데, 이러다간 곧 400만이 무너지는 날도 머잖았다는 걸 확인한 근거는 외곽지. 잡화점이나 한인 상점을 들를 때마다 지구촌에 울려 퍼지는 조종 소리를 실감한 참이다. 만연한 동성애로 인해 제3의 성을 설정한다며 남녀가 함께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일은 우리 부부도 해본 기상천외한 경험. 식탁에서 가십 삼아 그걸 말하니 동공들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이제 LA에 왔으니 할리우드 거리를 걸어보는 건 필수. 유명세를 치르는 만큼 거리는 북적였다. 명화에 등장한 스타들이 있다는 차이니즈 극장에서 안성기와 이병헌을 만난들 천사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유니버설 스튜디오보다 나은 건 거금을 투척한 대가로 보여준다는 유치찬란한 촌극이니 농락당한 기분이랄까.
예전 미서부를 재현해놓은 캘리코 은광촌에 들러 시계를 거꾸로 돌려본 건 나름 유의미했다. 사전에 공지만 했더라면 탄광촌 거미 열차도 타봤을 것이다. 거기서 곧장 남으로 내달린 곳은 샌디에이고 바닷가. 가이드가 권하는 언덕배기를 보아하니 30분 만에 오르내리려면 땀깨나 빼야겠기에 가벼이 해변을 걷기로 했다. 은근히 불어오는 갯바람이 소금기를 실어날라도 둘이서 나란히 잔모래를 밟은 지는 꽤 오래되었다. 범상한 다운타운을 지나 퇴역한 군함을 등에 업은 채 수병과 간호사의 사랑을 소환한 시공도 감미로웠다.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을 음미하려고 흔들의자에 앉아본 건 잘한 일. 씨포트빌리지 한쪽에 가로놓인 소품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중남미 상인들이 점거를 완료한 올드타운을 거쳐 기차에 오를 때만 해도 기대감이 컸으나, 여느 관광열차를 연상한 건 큰 오산. 창밖에 스치는 풍경화는 그런대로 봐줄지언정 낭만을 껴안고 태평양 연안을 따라 일렁이는 파도를 가슴에 담아갈 거라는 착각은 자유였다. 귀국을 위한 절차는 순조로웠다. 이로써 4,500Km 대장정의 여정은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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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61호)에는 ‘왜들 아이를 낳지 않을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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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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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미서부 탐방기 ‘국립공원 최우선 보전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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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로 가는 길은 멀었다. 고 박정희 장군이 실권을 잡았을 때 이곳을 다녀갔다는 말은 현지 가이드에게 처음 듣는데, 이후 우리나라에 국립공원을 지정했다니 그건 고무적인 일이로되, 널리 퍼뜨린 소문처럼 거대한 암석군이 앞을 가린 채 금세 전설 속의 요정이라도 튀어나올 듯 울창한 숲속은 아니다. 설악산을 능가하는 산세라더니 자랑 일색이던 폭포수는커녕 가느다란 물줄기마저 모조리 말라붙었다. 그렇다면 기대하던 눈요깃거리가 사라졌으니 인스피레이션포인트에서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일밖에 돌아다니기도 마뜩잖았다. 그에 비해 유타주의 모뉴먼트밸리는 초장부터 우뚝 솟은 기둥이 특이한 데다가 콜로라도 고원의 암갈색 색상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밑에서 꼭대기까지 사암 덩어리라는데 속칭 벙어리 장갑(mitten)이라 불리는 연유를 알겠고, 소싯적 이웃집 TV에서 엿본 황야의 무법자들이 날뛰던 장면이어서 길손을 모으고는 있으나 깊숙이 들어간 엔텔로프캐니언을 빼고는 어딘가 덜 차린 듯한 밥상이었다. 우리 부부는 오래전 요르단의 페트라를 떠올리며 흩날리는 먼지를 피해 주변을 산책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랜드캐니언은 미대륙을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관. 크나큰 아쉬움은 있었다. 말로만 듣던 사우스림에서의 햇빛 반사 각도가 때를 따라 받쳐주지 않았던 참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지점에 궁금증이 일었다. 서간의 행간을 읽어내듯 그대 또한 늙어간다는 애처로움이랄까. 깎아지른 협곡을 구성하는 무지갯빛 지층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서는 경비행기나 헬리콥터에 올라야 한다지만, 심연처럼 강물이 여울져 흐르는 골짜기에서 대자연과 하나가 되지 않으면 그 안에 감추어진 창조세계의 신비를 도저히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게 탐사전문가의 견해이기에 그랬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해야 40분 남짓, 우리 부부는 일행과는 정 반대쪽을 겨냥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아내를 배려한 동선이었으나 서둘러 눈동자에 새기다 보니 어느새 반환점이 코앞이다. 그러고서야 나머지 현란한 색조가 망막에 들어온다. 다름 아닌 푸르른 파월호에서 불그레한 미드호까지 요동치며 굽이치는 강물의 몸부림. 이는 정작 장엄한 우아미의 총합이다. 여기에 어떤 수식을 덧칠하리, 발견자의 흉상은 뒷전이었다.
▲ 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브라이스캐니언
브라이스캐니언이야말로 상상을 잔뜩 자극할 만한 풍광. 신묘막측한 신의 손길이 아니면 이처럼 온갖 생김새를 빚어낼 리 만무하다. 안타까운 건 기기묘묘한 형상들이 눈에 띄게 마모를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 설령 가이드 해설이 아니었더라도 필자는 단박에 그 진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지구촌을 휩쓸어버린 산성비 탓이로다. 아니 기후위기를 자초한 인간들의 잘못이 천하절경의 신비경마저 무참히 망가뜨리고 있는 현장이로다. 그중에 초로의 부부를 가장 매료시킨 장면은 병마용을 빼닮은 화폭에 아무런 명칭을 달지 않았다는 점. 어딜 가나 구실을 붙여 억지 춘향 격으로 덕지덕지 나붙은 명명이 맘에 안 들던 터였는데, 기실 갖가지 형상도 형상이려니와 그보단 단색인 듯 단색 아닌 홍조 띤 빛깔이 더 매혹적이다. 이는 내가 유독 최애하는 색상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왠지 태초의 대지가 이렇지 않았을까 어림짐작하는 그 채도에 가까워서다. 하여튼 우리 둘이는 부랴부랴 선라이즈포인트부터 선셋포인트까지 접수한 부부팀이 되었다. 귀여운 손주들과 다시금 올 날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리려니 걸음이 무거웠다.
자이언케니언은 천하를 압도하는 듯한 장군상. 시온이라는 원발음이 자이언트로 둔갑한 게 되레 자연스럽다. 가이드가 그도 맞다는 추임새를 넣을 만치 거대한 산줄기. 하긴 이건 산맥이라기보다는 어마무시한 원형의 거산(巨山)이라는 편이 어울릴 법하다. 좌우로 고개운동을 한 건 회색과 암갈색 산빛을 번갈아 선보였기 때문이다. 소나무를 닮은 수목들이 바위틈을 비집고 자생하는 매무새도 대견스럽다. 슬며시 산마루에 걸쳐있는 옷자락은 실은 새털구름. 그런가 하면 노란색 산기슭도 필자의 눈길을 끈다. 하지만 괜한 짓을 보탠 맹점이 있었으니 터널 공사 중 문득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뜬금없이 옆구리를 맞창 낸 선을 넘은 발상이었다. 그래서 잠시 신들의 정원을 훔쳐봤다고 선뜻 감탄이 나오지는 않는다는 노파심에서다. 불과 몇 초면 어차피 볼거리를 두고 뭐하러 열두 폭 병풍을 잘라내 지레 한 폭을 먼저 건네받았다고 해서 전연 즐겁지가 않더라는 이야기다. 다른 데서는 한 조각 떼어내는 일조차 벌벌 떨더니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못내 갸우뚱했다. 굳이 과유불급이란 걸 소환할 이유는 없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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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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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미서부 탐방기 ‘미서부의 상징적 인상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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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창에 비친 샌프란시스코 바다는 잔잔했다. 마치 아시아나 기장이 선보인 부드러운 착지처럼. 게다가 의외이다시피 입국 수속을 수월하게 마치고 합류한 서른한 명의 일행은 원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 덕분에 곧바로 승선한 베이크루즈 유람선. 관광지 특유의 요란함과는 달리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우리말 해설마저 나긋나긋하다. 다만 피셔맨즈 워프 항구가 그리 매력적인지는 일단은 의문부호. 어쨌거나 우리 부부의 두 눈은 선미를 따르는 바다 갈매기보다는 인근 알카트레저섬을 향했다. 탈출이 불가능한 감옥이었다는데 지금은 후줄근한 형체만 드러내고 있다. 이윽고 불그스름한 빛깔의 금문교(Golden Gate Bridge). 승객들의 시선이 쏠린 곳은 세계 최장(?) 현수교를 지탱하는 수십만 개의 쇠심줄이었다. 한 시간 남짓한 승선감을 뒤로하고 다시 리무진에 올라 긴 다리를 통과하는 느낌은 미국 땅을 밟고 있다는 나그네의 체감이다. 때마침 알맞게 익어가는 저녁노을. 포토스팟에 서서 추억을 남기면서도 탁 트인 시야로 빨려 들어오는 그림은 이채롭다. 구라파의 어느 대성당을 빼닮았다는 90만 도시의 시청사처럼.
여장을 풀고 잠자리에 누워본들 꼬박 뜬눈이다. 그걸 일거에 상쇄해버린 풍광이 있었으니 독특한 지형의 산야였다. 요모조모 뜯어봐도 신기한 모양새. 필자 머리에는 캘리포니아의 값비싼 생활물가는 어쩌면 자연환경을 보존하려고 붙이는 세금인지도 모른다는 뇌피셜이 스쳤다. 산자락이든 들판이든 온통 우리네 겨울 금잔디 빛깔이랄까. 이따금 푸른색을 띠는 건 애써 가꾸는 초지와 간간이 박힌 연녹색 수풀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색상의 조화가 참 좋았다. 이를테면 뉴질랜드의 정갈한 녹지와 몽골의 수더분한 초원과는 색다른 분위기. 부러운 지점은 최소한의 길만 뚫었을 뿐 훼손의 흔적이라곤 거의 없더라는 놀라움이다. 매끄러운 노면은 물론이요, 맨홀과의 일치점도 그만하면 합격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필자가 눈여겨보는 포인트는 보도 기울기 및 동선이 편안한 보행로. 한마디로 미합중국의 저력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나저나 속이 터질 만치 느려터진 화물열차. 가이드 말마따나 하도 길어 대충 세다가는 자칫 숨넘어갈지도 모른다. 고로 남들 눈치 못 채게 숨죽이고 세어보니 놀라지 마시라, 무려 90칸이 넘었다.
▲ 샌프란시스코 포토스팟에서 바라본 금문교
그런데 막상 내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은 건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 사전에 캘리포니아에서 네바다로, 애리조나에서 유타주에 걸쳐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만치 광활하다니, 어딜 보거나 지평선이 펼쳐져 있는 거야 당연한 풍경화로되, 제아무리 훑어봐도 이걸 두고 거푸 사막이라 일컬음은 좀 어폐가 있지 싶다. 그 이름이 토착민의 부족 명에서 따온 건 상식일 테고, 군데군데 물 자국으로 얼룩진 와디는 그렇다 쳐도 떨기나무 엇비슷한 수종으로 뒤덮여, 허연 모래벌판을 상상해온 글쓴이로서는 도무지 사막이라는 설명에 좀처럼 동의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여기에 그린 데저트(Green Desert)라는 명칭을 덧붙인 건 그래서였다. 가까이 격납고 같이 생긴 게 보여 물어보니 실제 중고 비행기를 보관하는 창고. 시월은 아직 우기가 시작되기 전이어서 장대비가 내리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래도 후드득 빗방울을 마주치기라도 할라치면 메마른 가슴이 촉촉해지는 기분일 듯싶다. 그때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창밖을 가득 채웠다. 더욱 반가운 건 재생에너지를 생산하는 태양광 설비이며 풍력발전기 행렬이었다. 내심 푸근했다.
3억 3천만 명이 흩어져 사는 주거지 역시 초미의 관심사. 언뜻 허술해 뵈기까지 한 주택가는 한국처럼 하늘 높이 치솟을 까닭 없이 죄다 나지막했는데, 특기할 만한 건 이렇다 할 울타리가 거의 없고 굳이 주차할 공간을 따로 마련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래서일까? 이네들은 매사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횡단보도 근처에 사람 그림자만 얼씬거려도 무조건 차량이 먼저 멈춰서는 풍토. 한국인이 이것만 몸에 익혀도 사상자가 대폭 줄어들 거라는 확신이 든다. 새삼 사계절 먹거리 가격이 일정하다는 인솔자의 전언에 현실감이 와 닿은 건, 생산 전 공정에 기계화를 이룬 결과이고 요소요소에 관정을 뚫어 가뭄에 연연할 까닭이 없어서란다. 거기다가 이네들 정책 가운데 으뜸은 유통기간은 지났으나 일괄 폐기하지 않고 소시민들의 생계를 돕는 마음 씀씀이. 문제는 애초에 전세 제도 자체가 없어 평생 사글세나 대출금 떠날 날이 없다는 점일 텐데, 격주로 임금을 받는 관행은 소비심리를 진작시키는 데는 얼마큼 효과가 있을 참이니, 천민자본주의 민낯이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는 농간만 막는다면 살만하지 않을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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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59호)에는 ‘미서부 탐방기 - 국립공원 최우선 보전책’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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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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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전쟁의 역설적 교훈 ‘전쟁과 평화의 병존 해법’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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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팍스 프레임에 빠진 전쟁 종식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제1차 대전의 1,500만 명도 모자라 제2차 대전에서는 5천만~1억 명의 희생자를 양산하고 말았다. 이는 이전의 인명 피해 추정치 합계를 훨씬 능가하는 수치다. 지레짐작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엄청난 대가를 치른 뒤에도 적잖은 국가들이 전쟁에 뛰어들고 있었다. 튀르키예, 불가리아, 루마니아에 이어 미국이 그랬다. 미국 경제가 영국을 앞지른 때는 1872년이었다. 1901년에는 독일이 영국을 추월했다. 1880~1914년 사이만 해도 영국 해군력은 세계 선두를 유지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곳은 그 무렵 일본의 약진이었다. 저자가 평한 비스마르크는 10세기 외교관 중 가장 비양심적이면서 가장 명석한 인물이었다. 한때나마 그가 독일인들에게 폭력성을 부추긴 일면은 음미할 만한 지점이다. 전쟁은 늘 과거와 미래를 핑계 삼아 현재를 저격할 따름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윌슨이 언급한 승리 없는 평화의 메시지에는 일리가 있다. 1차대전 후 국제연맹의 맹점을 보완하여 세계경찰을 자처한 미국의 위세는 아직은 대영제국의 추진력을 개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히틀러는 소련을 소환한 무력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모스크바가 아닌 베를린을 상정한 행보였다. 하지만 영국을 따돌리고 미국을 제치는 데는 135년 전 나폴레옹을 지워야 했다. 그의 천년 제국의 꿈은 500년 동안의 전화로 얼룩졌다. 이를 세계 정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히로히토를 항복하게 만든 핵폭탄이 터진 뒤였다. 미국 역시 바다를 지배한 결과였다. 한동안 미국은 유라시아를 넘볼 여지가 사라졌다. 장개석의 패전과 한국전쟁의 참화는 의외였다. 그 틈새를 비집고 일본이 되살아났다. 냉전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나토 같은 견제장치가 필요했다. 무기개발의 무한 경쟁은 상호확증파괴에 불과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치른 후유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구 종말을 앞당긴다는 위기감마저 감돌았다. 일찍이 월남전 이상의 소모전은 없었기 때문이다. 핵무기금지확산조약이라는 기득권은 자국을 지키려는 방편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죽음의 게임에 돌입한 상태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태초에 무엇이 있었을까? 다윈이 말한 진화도 변화를 수반한 유전 이전에 근원이 있어야만 성립하는 불완전 조건이다.
▲ 전쟁터에 평화를 알리는 상생의 종
진화생물학자인 도킨스가 설파한 이기적 유전자야말로 가설에 바탕을 둔 억설이다. 균형을 깨려는 움직임 자체가 원위치를 향한 갈망인 참이다. 다만 사회적 동물이 지닌 속성에 대한 지나친 억측은 금기다. 벌거벗은 유인원을 보고 자기 착각에 빠져서는 곤란하다. 직립보행은 본능의 발로이자 훈련의 성과에 속한다. 폭력성은 자제력을 발휘할 의식일지언정 문화적 산물은 아니다. 인간은 문화적 진화를 야기하는 두뇌 회전으로 세계를 정복해왔다는 게 저자의 논리다. 평화주의자들의 딜레마가 바로 그것이다. 상업의 역할을 강조하는 계몽주의적 시각도 있다. 18세기 이후 과학과 이성에 의한 공감대는 일회적 사안이 아니다. 그러나 핑커의 말과는 정반대로 국가에서 무력을 독점할 경우 발생할 현안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공감과 이성주의 등이 생산적 전쟁의 결과물이라는 데 반기를 든 셈이다. 굳이 인과론으로 접근하면 완력은 선명한 도구로되 현실은 전연 간단치 않다. 고르바초프의 출현이 통독을 이끈 경험칙으로 인정하지 않는 그림이어서다. 여기서 권력의 손익분기점을 따지는 일은 너무 나풀거리는 느낌이다.
2012.11.26. 월요일(일요일 밤 10:30~화요일 오전 10:20 사이)을 현대사에서 경이로운 날로 기억하는 건 왜일까? 그날은 뉴욕시에서 살해당한 자가 단 한 명도 없는 날이었다(통계상 기준: 1994년 이래 수집한 관련 데이터). 평균적으로 매일 14명이 죽는다는 걸 감안하면 용케 피해간 구간일 것이다. 저자가 펼친 전쟁사는 인류사 전반에 걸쳐 일관된 줄기를 유지했다. 크게 개인적, 군 역사적, 기술적, 진화론적 접근법을 제시해왔다. 하지만 수많은 전쟁을 두고 인류에게 이로웠다는 강변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시종 화성에서 온 남자가 금성에서 온 여자를 설득하려는 화술처럼 들린 적도 있었다. 내 의식세계는 줄곧 죽음을 불러온 재앙을 합리화할 수 없다는 흐름이었다. 1991년 페르시아만 전투를 치르고 아프가니스탄 침략을 거쳐 돌아온 대가는 9·11 테러였다. 동구권의 붕괴 앞에 자숙하지 않은 채 이제 더는 등소평의 중국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자만이었다. 사슬을 끊어내는 몫은 강대국에 달렸다. 비관과 낙관이 교차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미래 죽음의 게임은 팍스 테크놀로지의 양상을 띨 가능성이 높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58호)에는 ‘미서부 탐방기 - 미서부의 상징적 인상화’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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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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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전쟁의 역설적 교훈 ‘야만과 문명의 충돌 양상’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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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제국의 위세는 위험을 동반했다. 역대 왕들이 노력한다고 심오한 통찰력을 얻을 수는 없었다. 예외 없이 부침을 거듭하는 건 그래서다. 선제적 기습은 또 하나의 방책이었으나 해답은 상생에 있었다. 그나마 기율이 로마군의 명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병사들의 한계치는 임계점을 넘지 못했다. 정주형 도적이나 유랑형 도적이나 사악하긴 매한가지다. 헤로도투스의 경고가 나온 배경이다. 이런 마당에 과거를 싸잡아 과학적 법칙을 벗어난 혼동이라고 몰아갈 수는 없었다. 군사적 반혁명의 분위기가 스멀대는 게 당연했다. 충성맹세는 한갓 요식절차에 불과했다. 각자도생의 공식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일찌감치 봉건적 무정부 상태를 직시한 애덤 스미스의 혜안이 돋보인 대목이다. 중국의 당나라를 두고 사망률 2~5%에 그쳤다는 연유로 성공적인 예라고 치켜세운 건 다소 의외다. 우주라고 해서 모두를 포용하지는 못한다. 차라리 싸우다가 일본처럼 동화를 택하는 족속도 있었다. 크고 작은 섬들이 뭉쳐야 했던 동력이다. 문제는 거의 좀비 제국들이 일으켜왔다. 아메리카 역시 문화상대주의로 풀어야 할 지역이다.
유라시아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는 주장이다. 행복한 소수는 다수의 지배를 거부한다. 이는 무기의 발달사를 보면 확연하다. 군사적 혁명이란 걸 들여다보면 인명 살상극에 지나지 않았다. 수적 우세를 갖추었던 몽골과 명나라의 군대가 무력화된 경위를 보면 알 수 있다. 현실적으로 유럽의 총포연구는 문화적 전통과는 무관했다. 단적으로 양보다는 질이 앞선 예였다. 항해 기술도 아시아에서 착수했으나 완결지는 유럽이었다. 포르투갈이 해양에서 선전한 것은 입지조건이 좋아서였고, 스페인의 성공 요인은 원주민들이 감염에 약해서였다. 나중에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같은 나라들도 후발 주자로 끼어들었다. 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영향력은 약한 편이었다. 그 요인은 인도양의 내수시장과 국제무역의 이원화였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저자의 주장과 다를 수 있다. 격동기 전쟁 수행 과정에서 가장 난감한 일은 사람들을 표준화하는 작업이었다. 군수자금조달 또한 최대 걸림돌이었다. 그들은 장부를 조작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역설적인 반전은 무장 수준이 상향 평준화를 거치며 사망자가 현저히 감소했다는 점이다.
▲ 전쟁기념관에 세운 결전의 조형물
경제적 측면을 넘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원제: 『여러 나라 국민의 부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한 고찰』)은 많은 걸 시사하고 있다. 한 나라 부의 원천은 약탈, 정복, 독점이 아니라 분업에 있다고 일갈했다. 그가 취한 입장은 정치적 중도였다. 세기의 저서가 출판된 바로 그해 미국이 영국에 반기를 든 건 필연이었다. 우리는 그날(1776.7.4.)을 미국독립선언일로 기념하고 있다. 어쩌면 전쟁과 평화는 공존의 개념인지도 모른다. 나폴레옹은 미처 이 점을 간파하지 못했다. 그의 사전에 없는 어휘는 불가능이 아닌 영원한 평화였다. 칸트가 같은 제목의 글을 집필할 무렵 프랑스 대혁명의 씨앗이 발아한 건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그사이 워털루에서 패퇴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변모하고 있었다. 무역의 재미를 맛본 결과였다. 때마침 꺼내든 영국인의 도발은 저돌적이었다. 찰스 디킨스가 『돔비 부자』를 통해 밝힌 “지구는 돔비와 그 아들의 무역을 위해 만들어졌다.”라는 발호였다. 인류가 쓰는 A.D.는 ‘그리스도의 기원’(anno Domini)이 아니라 ‘돔비 부자의 기원’(anno Dombey and Son)이라는 조롱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쳐들어간 땅이 중국이다. 아편전쟁에서 양국의 기술력이 드러났다. 1839년 영국수상이 천명한 국제무역이 활성화됐다면 아마도 양차 대전은 없었을 것이다. 스미스 말은 보이는 주먹을 안 보이는 손으로 막는 격이었다. 공통점은 원주민들을 향한 공포감 조성이었다. 동인도회사를 둘러싼 잡음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리바이어던의 출몰은 다반사였다. 식자층이 기록한 내용물도 미화 일색이었다. 평시 살인율이 전시 사망률보다 낮아졌다는 포효를 듣고 싶었다. 19세기 후반 들어 언뜻 500년 전쟁사의 종막을 고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톨스토이가 즐겨 읽었다는 국제적 베스트셀러 『무기를 내려놓자』가 그것이다. 여성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로니스 베르타 폰 주트너가 쓴 책이다. 그 중심에 그녀가 극구 “문화적인 천국에서 새로 떠오른 스타”라고 치켜세운 니콜라스 2세가 있었다. 1899년 130명의 외교관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모여 야만적인 행동을 최소화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재회동 약속은 제1차 세계대전과 겹치는 해였다. 팍스 브리타카나에서 팍스 아메리카나로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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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57호)에는 ‘전쟁의 역설적 교훈 - 전쟁과 평화의 병존 해법’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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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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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전쟁의 역설적 교훈 ‘전쟁에 관한 새로운 관점’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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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모리스에 따르면 전쟁은 줄곧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아니 전쟁은 평화를 향한 유일한 방편일 수 있다고 강변한다. 심지어 그는 갈리아인과 그리스인을 학살하고 지배세력이 된 로마제국이나 수백만의 원주민을 죽이고 미합중국을 세운 행위가 정당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이는 무정부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안전과 풍요를 제도화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궤변처럼 들린다. 하지만 강제된 평화는 단지 현상일 뿐 안정의 본질은 아니다. 거의 모든 전쟁에서는 상생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상식이 통할 리 없다는 에드워드 루트웍의 전략분석이 더 합리적이다. 상호 모순되지 않는 선형논리 규칙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델 하트의 말대로 좋은 결과를 바라고서 나쁜 일을 획책하는 게 전쟁이라고 규정한 이유다. 그나마 차악론이라도 힘을 얻으려면 미래의 어마무시한 살상극을 막아내야만 한다. 오늘날보다 그 옛날에 더 살인극이 난무했다는 추정에서 벗어나려면 말이다. 필자는 오히려 카실다 제타가 제기한 초기 인류는 극심한 폭력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설에 심증이 간다.
홉스가 적시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종식시킨 동력은 전쟁에 의한 권력 행사가 아닌 법과 질서를 존중한 최소한의 도덕률이었다. 전쟁광이 있는 한 폭력성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논리다. 곧 전쟁의 역설을 풀어내는 방법론이 개인적 접근이든 군 역사의 기술적 연구이든 간에 진화의 일부분으로 파악하는 방향성에는 일정 부분 동의하는 편이로되, 케인즈이 지적도 어느 정부이건 전쟁을 획책한 내막을 들여다보면 범죄집단에 가깝다는 사실관계를 염두에 둔 말이다. 예컨대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이디 아민, 김일성 등이 그 철면피들이다. 영국 외무성이 간파한 사상에 해당하는 이즘(ism)이 과거의 사상(워즘, wasm)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갈이 설득력을 얻는 건 그래서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로마군 침략사로 옮겨 간다. 즉 초토화를 자행한 팍스 로마나를 가리켜 평화라고 우기는 형국이다. 오죽하면 코먼웰스(commonwealth)라는 개념부터 재정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으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제는 전쟁 대신 범죄와 법에 시달린다는 볼멘소리는 농담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어쨌거나 로마는 제국이었다.
▲ 인형의 눈으로 바라본 전쟁 무기들
바로 창조적 소수를 가리키는 소수정예(a-few-good-men) 지배이론이 소구력을 얻는 지점이다. 하지만 거꾸로 정주형 도적이라는 지적을 간과하면 곤란하다. 리바이어던의 출현을 극도로 경계는 하되 수로와 도로를 뚫어 우편을 활성화한 지혜는 높이 살만하다. 처칠의 말처럼 제아무리 장황할지라도 파국을 부르기보다는 설득이 낫다는 교훈이다. 미개한 적들을 향해 물질문명을 길들이는 전략을 구사하자는 제안이야말로 예수의 가르침이나 바울의 충고가 유효한 국면 전개다. 급진주의로 인해 자칫 과거로의 회귀를 막자는 필요성에서다. 일찍이 평화는 허구일 뿐이라는 플라톤의 전언과 맥을 같이하는 대목이긴 하되 그렇다고 일방적 단정에 마냥 수긍하기는 어렵다. 전쟁은 언뜻 상기된 발명품이나 한낱 타성에 젖은 관성을 확인하는 차원의 도구만은 아니니까 말이다. 야노나미족에 얽힌 일화 또한 인류사에 남은 환부로 뒤덮기에는 양심의 그물이 걸려있다.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최근 100년간 100억 명 중 전쟁, 살상, 불화로 인한 사망자가 1~2억에 달하는 데 비해 소규모 사회에서는 그 열 배라는 통계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금 로마로 눈을 돌려야 한다. 희랍어 가운데 카오스(chaos)라는 낱말이 적합한 표현일 듯하다. 그때 상황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했다. 하지만 저자는 서구사회를 두고 안전하다고 두둔하지 않는다. 인류사에서 명멸했던 제국들이 그 증거다. 팍스 로마나에 필적할 만한 나라가 팍스 시니카였다. 중국의 한나라 역시 평화를 정착시켰다고 회고한다. 팍스 인디카도 있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를 일컫는다. 얼마 전 다행히 한때 사라졌던 아르타샤스트라 고문서가 출현했단다. 페르시아는 어떠한가. 중국판 폼페이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고고학자를 두고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자들이라는 자각은 유효하다. 성경에 나온 대로 해 아래 새것이 없기에 그렇다. 역설적으로 진화론 논쟁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다. 리바이어던이 무너진 경위를 보면 정반합의 조합이다. 단, 후손의 생계에 도움이 되는 국면은 고무적이다. 일찍이 빈손으로 돌아간 알렉산더대왕의 깨달음이 새삼스럽다. 다소 가혹할지라도 통치자는 살인자였다. 코끼리는 전시실을 그냥 놔두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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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56호)에는 ‘전쟁의 역설적 교훈 - 야만과 문명의 충돌 양상’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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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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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전쟁의 역설적 교훈 ‘전쟁의 역설에 대한 리뷰’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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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모리스(Ian Matthew Morris)가 쓴 『전쟁의 역설』(War! What is it good for?)은 제목부터 흥미를 끈다. ‘폭력으로 일군 1만 년의 역사’(김필규 옮김)라는 부제 또한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언뜻 600쪽이 넘는 두께만 보면 초장에 질릴 듯싶지만 일단 차례를 펴는 순간 생각이 싹 달라질 것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알려주는 전쟁이 만들어낸 더 큰 이야기는 무엇이고, 우리의 미래에 관한 내용물이라는 안내에 그 누구인들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엇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기존의 책들과는 확연히 다른 접근방식도 구미를 당기게 한다. 서장과 총 7장으로 구성된 소제목의 배치에서는 저자 특유의 번득이는 기지(위트)를 발견할 수 있다. 맨 처음 ’서장‘의 표제는 ’장의사의 친구‘이다. 이러한 어구를 보고 사람에 따라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다소 섬뜩한 기분이 될 수도 있겠으나, 짧지 않은 글의 서문을 재치 있게 풀어가는 문장 구사력만 보아도 저자의 탁월성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참고로 저자는 영국 출신의 미국인으로서 스탠포드대학교에서 역사학, 고고학, 고전학을 가르치고 있다.
제1장에서는 ‘황무지: 고대 로마시대의 전쟁과 평화’, 제2장에서는 ‘괴물 가두기: 생산적인 방식의 전쟁’, 제3장부터는 연대별로 ‘야만인들의 반격: 비생산적인 전쟁, 1~1415년’, 제4장에서는 ‘500년 전쟁: 유럽이 (거의) 세계를 지배하다, 1415~1914년’, 제5장에서는 ‘강철의 폭풍: 유럽에서의 전쟁, 1914~1980년대’, 제6장에서는 ‘인정사정없는 싸움: 왜 곰베의 침팬지들은 전쟁에 나서는가’, 제7장에서는 ‘지구의 마지막 최선의 희망: 미 제국, 1989~?’라는 논제를 점층적으로 숨 가쁘게 이끌어가고 있다. 서문 페이지에서 소제목 내용을 뒷받침하는 소항목들을 살펴보면 딱딱한 역사서라기보다는 일종의 소설류 같은 느낌이 든다. 관심이 가도록 제시한 키워드마다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킬뿐더러, 그러함에도 전개 양상이 그리 복잡하게 와 닿지 않아서다. 한마디로 전쟁사 중심의 세계사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저자의 고고학적 혜안이 넘기는 책장을 통해 독자들의 눈동자를 사로잡는다고 하여 결코 과언이 아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줄거리를 담고 있다고 해도 막상 읽히지 않는 책이라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을지 의문이다.
▲ 전쟁기념관에 게양된 한국전쟁을 도운 우방국의 국기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을 소환하면 초두에 홉스가 적시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종식시킨 동력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아니라 법과 질서를 존중한 최소한의 도덕률이라는 일갈이었다. 케인즈의 지적도 어느 정부이건 전쟁을 획책한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범죄집단에 가깝다는 사실관계를 염두에 둔 말이다. 아울러 창조적 소수정예(a-few-good-men) 지배이론이 말 없는 대다수에게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는 지점이었고, 통치자는 죄다 살인자였다는 필설은 촌철살인 같은 대목이다. 제국의 위세가 늘 위험요인을 동반하는 건 코끼리는 전시실을 그냥 놔두지 않아서란다. 경제적 측면을 위주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즉 『여러 나라 국민의 부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한 고찰』(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은 많은 걸 시사하는 저서다. 놀랍게도 그가 취한 입장은 정치적 중도였다. 극적인 반전은 각국의 무장 수준이 상향 평준화를 거치며 사망자가 뚜렷이 감소했다는 역설이다. 저자는 미래 죽음의 게임은 팍스 테크놀로지의 치열한 싸움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와 같이 관점에 따라서는 퍽 도발적으로 읽힐 수 있는 전체 주제가 언뜻 전쟁의 폭력성에 대한 우호적 발상처럼 보일지라도, 본격적인 논의는 야만과 문명의 충돌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거니와 심층적으로는 재난과 평화의 병존 방법을 모색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결국, 저자의 궁극적 의도와 지향점은 인류가 벌여온 전쟁사를 되짚어 영원한 평화의 해답을 찾기 위한 일련의 시도로 보인다. 그중 인상적인 장면을 들자면 2012년 11월 25일 일요일 밤 10시 30분부터 화요일 오전 10시 20분 사이에 뉴욕시 안에서 살해당한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단 하루 반 정도이긴 해도 깜짝 놀랄 만큼 평화로운 구간이 아니었나 싶다. 막바지까지도 지은이는 힘주어 말한다. “우리가 진실로 전쟁이 아무 소용없는 세계를 원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전쟁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라고 말이다. 흔히들 전쟁이라는 낱말에 대해 각인되어 있던 부정적 통념을 잠시 접어두고, 부디 객관적인 시각에서 냉철히 전쟁의 양면성에 관하여 숙고해 볼 수 있는 독서의 장이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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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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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영적으로 탐색한 이스라엘 ‘성경으로 탐구한 유태인’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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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덧붙여 유대민족을 괴롭힌 것은 근대 그 자체, 시대적 상황이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일어난 민족주의, 산업주의, 공산주의, 전제주의 등의 열풍은 유대인들에게는 특수한 도전이었다. 서구의 불건전한 정신에서 태동한 반유대주의가 그들의 처지를 더한층 어렵게 만들었다. 유태인들은 지금 이전과는 다르게 새로운 생존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주위 여건에 둘러싸여 있다. 작금의 세계정세는 친 이스라엘파의 움직임으로 이슬람 문화권을 한데로 뭉치게 하고 있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친이정책의 결과로 나타난 국제정치의 변수는 바야흐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공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불거진 각종 테러의 확산으로 인해 전 세계를 총포의 화염 속으로 몰아가고 있는 형국이어서, 이스라엘과 아랍의 끊임없는 보복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어느 누가 끊어줄 것인가의 해답은 오직 주님만이 알고 계신다는 확신에서, 이스라엘 역사야말로 복음에 입각한 온전한 구속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그것이 성경이 전하는 영적 메시지다.
그에 따라 지상에 남은 흔적이 아예 없다고 알려져 역사의 존재 여부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는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그대로가 실체적 진실이다. 문제는 성경을 연구한다고 하면서도 실은 인류사의 주요 사료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존 학계의 태도에 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종교를 학문에 끌어들이지 말라는 역사학계의 취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학문적 유불리를 떠나 하나님의 섭리를 불신한 채 저지르는 영적 무지의 단면이 고질적 문제라는 것이다. 세인들이 금지옥엽처럼 여겨온 고대 문헌들과 그간 발굴된 유물들은 어디까지나 성경의 보충교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게다가 역사의 개념을 정의하는 학계의 합의마저 유명무실한 현실을 감안하면 사정은 더 답답하다. 눈에 보이는 사실을 통한 해석 방법과 올바른 역사관의 확립이 지금으로서는 절실한 과제다. 이 시점에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일은 성경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토막을 내서 증명하려는 일부 신학자의 자세다. 과연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하는 소리인지 그것부터 차분히 하나하나 검증해볼 단계다.
▲ 어둑발에 찾아 바라본 통곡의 벽
무려 1,500년이 넘는 기간에 40명 내외의 기록자에 의해 완성된 신구약 성경의 세세한 내용은 성령의 감동(영감)이 없이는 그토록 일관성 있게 진술할 수 없는 성삼위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임이 틀림없다. 따라서 연구가들이 성경전서 66권을 펼쳐놓고 종교적 문헌의 하나쯤으로 운운하는 행위 자체가 가당찮은 일이다. 성경에서 일러주는 역사적 지식 전반이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인 것이다. 민감한 사안들이 학계에서 합의가 되었든 아니든 창조 신앙을 가진 필자에게는 부수적 요소에 해당한다. 창세 이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우주의 원리에 앞서는 창조주의 주권적 영역일 뿐이다. 어찌 성경에 적시된 주제들이 실제와는 무관한 문학적 창작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펼 수 있는지 심히 의아할 따름이다. 현재 우리 교단에서 이른바 창조론을 운위하면 이는 무지하거나 겁도 없는 교사로 취급을 받는다. 최소한 창조론과 진화론을 양립이라도 하자고 주장해도 시대 흐름조차 모르는 무모한 지식인으로 폄하되기 일쑤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보듯이 각국에서 정리한 역사는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일 수도 있다.
초장에 밝힌 바와 같이 필자는 철두철미한 성경주의자다. 고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 세상의 모든 해답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흔히 말하는 최대주의자(maximalist)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공언한 그대로 성경 기자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혜를 십분 활용하여 특별히 내려주신 영적 감동으로 지상에서 벌어진 영적 현상과 본질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에게 이스라엘의 기원을 묻는다면 창세기를 비롯한 열왕기와 역대기를 들어 그걸로 족하다고 답변할 수밖에 없다. 설혹 그것이 역사학적으로 정리된 체계적인 연대기적 구성과 들어맞지 않는다고 해도, 성경은 여타의 자료들을 모아 증명해야 마땅할 절대가치일지언정 기타 증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동원되는 부차적 사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역사물도 성경의 권위를 훼손한다면 철저히 배격해야 옳다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를 보는 필자의 확고부동한 원칙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속에서도 유대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이 아니고서는 아예 설명 자체가 불가한 지점이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54호)에는 ‘전쟁의 역설적 교훈 - 전쟁의 역설에 대한 리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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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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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영적으로 탐색한 이스라엘 ‘이스라엘 민족사의 단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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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유대인들과 공존했던 이교시대의 족속들은 영욕을 같이하며 명멸하기를 거듭했다. 거칠 것 없어 보였던 바빌론인, 페르시아인, 히타이트인, 팔레스타인이 그랬고, 오늘날 큰 민족을 이룬 중국인, 힌두인, 이집트인들이 그랬다. 그렇지만 뒤의 세 민족도 실상은 유대인만큼 큰 영향력은 미치지 못했다. 그들은 자국 영토에서 쫓겨나지도 않았으며, 이민족에게 말 못 할 고초를 겪지 않았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 운위되는 이네들의 위상은 지구촌 재건을 위한 씨앗도, 다른 문명을 위한 탄생의 밀알도 되지 못한 채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유대민족의 생존사를 들여다보면 4,000년간의 역사 속에서 무려 3,000년 동안이나 지성적, 정신적 영향력을 발휘해왔으며, 3,000년간이나 나라 없는 백성으로 떠돌면서도 민족성의 본질을 유지해왔다. 유대인들의 왕성한 저술 활동은 실용적이고 학술적이며 문학적이고 예술적이다. 역설적으로 다수의 민족이 전쟁에서 이기고 비문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자랑했으되 대부분 흔적 없이 사라진 이면에, 유대민족의 사상과 언어는 오늘날 생생히 살아있는 것이다.
유대민족이 응전하여 극복한 역사를 보면 크고 작은 도전들이 끊임없이 출몰했다. 그때마다 피로써 투쟁했고, 고비를 넘기고 나면 또 다른 항전들이 그들을 기다렸다. 유대인의 주적은 늘 이교도들이었는데, 과거 유목민으로 떠돌던 시절에는 바빌론, 앗시리아, 페니키아, 이집트, 페르시아 등과 같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시달려야 했다. 정복하느냐 당하느냐는 적자생존의 정글 속에서 유태인만이 가진 문화적 사고와 강인한 정신력이 공동체를 살아남게 한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막상 1,700년 동안의 유랑과 노예생활, 전쟁에서의 학살, 망명의 세월을 버텨낸 유태인들이 돌아온 고국에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학정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걸 이겨낸 힘의 원천은 전적으로 창조주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설명이나 설득이 되지 않는다. 그리스에 정복당한 로마조차도 희랍화로 치닫던 그 시절,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종교, 예술, 문학은 물론 법과 제도까지 정부로부터 보호되고 있었다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무엇이랴. 인류 문화사적으로 화려하기 그지없던 그리스의 허다한 족적은 로마군대의 멸망과 함께 소멸되고 말았던 것이다.
▲ 예루살렘의 외곽 도로 및 주택가
기원전 6세기경 바빌론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때부터 19세기 유럽의 게토에서 해방될 때까지의 기간 중,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유대인들에게 다가온 양상이 유대교의 탄생과 아우른 디아스포라였다. 이때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역에 광범위하게 흩어진 유태인들의 독자적 삶은 이국 문화로의 동화가 아닌 문화 이질감의 극복으로 나타났다. 통치국의 조직적인 분산 정책을 견뎌낼 수 있었던 힘이 탈무드라는 종교적 규약이 그 자체로써 큰 역할을 해냈다. 탈무드는 1,500년간이나 율법적으로 유대민족의 내면을 압도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 시기를 가리켜 ‘탈무드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7세기에 접어들어 유대교에서 기형적으로 파생한 종파가 이슬람교다. 마호메트에 의한 신종교의 출현은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심각한 도전이었다. 이른바 알라신에 의해 세워진 마호메트 제국이 불과 1세기 만에 서구 문명에 정면으로 맞섰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약해진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이 장손을 자처하며 적자 이삭에게 대적한 뒤 700년이 지나고 유대인 문화도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세 암흑시대야말로 그들에게는 멸종을 면하기 위한 1,200년간의 극심한 투쟁기였다. 십자가로 상징하는 기독교 앞에 모든 국가가 굴복하고 개종하는 사이 유독 유대인들만은 험난한 고난을 딛고 위대한 지도자의 인도에 따라 독자생존의 길을 모색한다. 그 결과 그들은 스스로 지켜낸 가치들이 유용한 것으로 인정받았고 유럽의 사고를 재편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유태인들 가운데 국가의 수상이 나오고 대형 사업가로 성공하는가 하면, 한 나라의 군대를 통솔하며 시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모임을 창립하는 등의 대 활약상을 펼치는 일들이 벌어진 참이다. 다만 사건들을 영적 시각으로 들여다보면 이성적 계몽주의가 진화론을 불렀고, 공산주의가 부추긴 유물론은 사람을 정신분석학으로 재단하여 해석하려고 시도해왔다. 그 결과는 무섭게도 복음의 상실이어서, 그로 인해 인류가 얻은 것은 영적 공허에다 복음의 고갈로 이어졌다는 그 지점이다. 여태껏 메시야를 기다리며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채 참 복음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너무나 안타까워 토로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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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53호)에는 ‘영적으로 탐색한 이스라엘 - 성경으로 탐구한 유태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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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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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영적으로 탐색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에 대한 선이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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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처지가 되어 정처 없이 세계 각지를 떠돌다가 1948.5.14. 전격적으로 지중해 동남방에 건국의 깃발을 꽂은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이스라엘(State of Israel)이었다. 인구 930만여 명이 모여 사는 곳에 대한 필자의 일천한 지식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속사를 천착하는 데 크나큰 걸림돌이다. 아울러 아직도 줄줄이 꿰(뚫)지 못하는 신구약 성경 내용 또한 스스로 답답해하는 속내 가운데 일부다. 하지만 ‘이스라엘’이란 국호에 대한 정리만은 확실히 해두고 싶다. 혹자는 그것이 단지 ‘산지(山地)’의 지명이라고 추론하면서 지리적 용어라는 견해를 펴고 있으나, 필자는 창세기 22장에 의거하여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싸워 이기고 하나님께 얻어낸 이름’이라고 사려한다. 그 명칭이야말로 창조주께서 택하신 백성(들)에게만 내리시는 성스러운 용어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사실들을 중심으로 영적으로 거듭난 자만이 그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어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대전제하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역사적 견해에다 참고자료들을 들여다보며 총정리하는 것으로 이번 글월을 기술하고자 한다.
본격적인 서술에 들어가기 앞서서 명확히 해둘 일은 모든 자료에 우선하는 것이 성경이라는 점이다. 비록 택함을 받은 사람의 손을 거치긴 했으나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성경을 각종 문헌의 조합으로 이뤄진 여타 기록물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해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중대 사안이어서다. 설사 성경 안에 일부분 상호 모순된 사항이 있다 할지라도 이는 전체 흐름으로 접근한다면 대부분은 풀린다고 본다. 성경 안의 의문점은 근본적으로 성경 안에 그 답이 숨어 있다. 여태껏 해결하지 못한 부분은 인간들이 아직 영적 메시지를 찾지 못했을 뿐이다. 개중에는 세상의 원리로는 더이상 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수록 악으로 점철된 인류사를 영적으로 바라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기존의 세계사는 기본적으로 물질적인 사관에 의해 편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상당한 고고학적 발굴이 이뤄졌어도 고대사의 재구성이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거니와 실제 지구촌의 학교 현장에서 실시하는 거의 모든 수업이 철저히 진화론적이며, 심지어는 유물사관까지 동원해 문명사를 가르치는 실정이다.
▲ 광야 가운데 심은 침엽수림의 띠
어쨌거나 지적 자산 하나로 버텨온 유태인의 세월은 실로 험난했다. 그러니 유대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만의 사유물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이란 무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유대민족을 필요한 도구로 사용하신 섭리의 장소였다. 그만큼 여기서 이루어진 일들은 인간의 합리적 사고로 이해하기에는 어렵고도 놀라운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이에 필자는 가능한 한 역사 비평적 입장에서 벗어나 최대한 사실을 위주로 한 집필에 충실할 참이다. 세간에 회자하는 자료비평이나 전승비평 등도 기본적으로는 성경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므로 가급적 거리를 두려고 한다. 원론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탐색은 그들의 지난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예표로 보여주고자 하신 전 세계 백성에 대한 구속사적 이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기존의 수많은 역사물도 이미 우상이 되어 있거니와 인간이 재단하는 사회 제도 자체가 흡사 신처럼 행세하고 있어서다. 왜곡된 이스라엘의 통사는 이제 제자리를 찾아야만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대로 진행되는 구원사의 일부분일 뿐이다.
기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유대인들의 삶이란 처참한 몰골이었다. 바빌론인이나 그리스인들과 함께 살면서 로마인들의 운명을 지켜보아야 했고, 한때는 마호메트 문명에 뒤섞여 번잡하기도 했으며, 1,200년간의 중세 암흑기를 용케도 견뎌 근대의 지성으로 화려하게 등극하기도 했다. 세계인구의 0.3~0.5%(추산 방식에 따라)의 비율로 노벨상 10% 이상을 차지하며, 미국 대학 강단의 30%를 점유하고 있는 사실만 봐도 유태인 교육의 위대성을 확인하고도 남을 일이다. 고대 그리스가 한때 지성의 대표적 지위를 누렸다고 하나 겨우 500년에 불과한 데 비해 유대민족의 창의성은 무려 4,000여 년을 면면히 이어온 참이다. 반면에 유태인이 끼친 지적 해악 또한 만만찮다. 라이프니츠가 있었는가 하면 스피노자가 있었고, 아인슈타인이 있는가 하면 프로이트가 있었으며, 플랭클린의 뒤에는 칼 마르크스가 있었다. 그들의 장삿속은 가히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하여 온갖 포르노를 만들어 성적 타락에 앞장서는가 하면, 급기야는 유전자 조작 사업에까지 손을 뻗쳐 전 세계를 생명의 공포 속으로 빠뜨린 선봉에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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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52호)에는 ‘영적으로 탐색한 이스라엘 - 이스라엘 민족사의 단면’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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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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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걷기 편한 도시환경 제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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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걷고 싶은 길과 길이 촘촘히 연결된 도시환경이라면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을까요? 평소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거리에 나서 보면 발길에 걸리는 장애물이 귀찮을 만큼 많다고 느낍니다. 예컨대 울퉁불퉁한 보도블록, 요철이 심한 맨홀 뚜껑, 각종 불법 적치물은 물론 노면 기울기까지 맞지 않아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걷기가 힘들어집니다. 사실 노인네들 못지않게 불편한 이들은 유모차를 끄는 엄마들입니다. 이따금 시각장애인이 보도 점자블록을 따라 걸어가거나 휠체어 등 보조 장구를 이용하는 장면을 보노라면 얼마나 불편할까 싶어 내심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사정이 이런고로 문제점을 조목조목 정리해 요로에 수차례 건의도 해보고 국민신문고에 민원도 올렸지만, 안타깝게도 즉시는 아니더라도 뒤늦게나마 수용이 되었다는 소식은 없었고, 정책에 반영되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올시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납부기일을 어기지 않고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시민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사안들을 시정하는 것이 저출생과 고령화 등 인구감소에 대응하는 정책 중 하나라고 봅니다. 은퇴 후의 삶을 꾸리는 우리 부부의 경우 앞으로 골목길에서 대로변까지 무심코 걸어가도 발길에 걸리는 거 없이 신경 쓰지 않고 기분 좋게 외출할 수 있는 도시를 찾아 이주할 계획을 세우는 중입니다. 국민신문고에 올리는 민원의 제목을 ‘부창부수’라고 정한 것도 공동체 문화 형성에 늘 의기투합하고 있어서랍니다. 자기 자랑 같아서 차마 입으로 거론하기는 좀 그렇지만 평소 준법정신을 통한 질서확립이나 사회의 건전문화 창달 등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며 살아갑니다. 곳곳에 노면이 고르지 않아 자칫 발목을 접질리거나 넘어져 다칠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면 너무 서글프지 않습니까? 설계부터 시공까지 법률 제정이 꼭 필요한 시점입니다.
국내외 여행을 가서도 맨 먼저 체감하는 지점이 바로 이동선입니다. 생활하는 데 가장 민감한 구역이 보행로이기 때문입니다. 건축물의 표고와 보도의 높이가 맞지 않아 생기는 귀책 사유는 건물주에게 있지 않나요? 가게 앞 노면을 보행자에게 맞춘 일본처럼 상가 출입구에 계단을 설치하면 됩니다. 우리나라라고 해서 전부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드나들기 매우 편한 곳이 더 많습니다. 걸을 때 좌우 기울기가 다르면 신체의 균형이 무너질뿐더러 허리에 무리가 감으로써 걷는 데 피로도가 증가합니다. 앞서 지적한 장애인이나 노인분 중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차도를 이용하는 바람에 교통사고를 유발하는 상황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특히 손수레를 끌고 갈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보도 위에 방치된 물건들이나 광고대는 재빨리 치워야 합니다.
▲ 신구도시의 경계선에 위치한 서정천변길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요? 먼저 보도블록 ‘시공자의 전문성 제고’를 위해 관련 조례 제정이 절실합니다. 공사장의 전체 공정에 실시간 ‘철저한 관리 감독’을 요구합니다. ‘준공 허가 기준’을 세밀하고 엄격하게 정해야 합니다. 사후관리 차원에서 ‘하자의 수시 보강’을 위한 ‘전담 직원을 배치’해야 합니다. 언론에 보도된 바와 같이 ‘서울 성동구’의 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습니다. 직제에 수리보수를 담당하는 상시 체제를 갖추고 즉시 출동하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참고로 필자가 얼마 전 방문한 ‘두바이’의 경우는 세계 최상의 보행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습니다. 최고 지도자의 눈높이에 따라 도시 전반을 정교하게 설계하고 정밀시공한 결과물이라고 봅니다. 시민들에게 널리 ‘불편신고 접수를 위한 창구 전화번호’를 반드시 공개해야만 합니다.
그에 따른 효능감은 자명합니다. 우선 시민들의 이동권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거리에 나들이 인파가 북적이면 상가의 매출 신장에 도움이 됩니다. 관광객이 늘어 도시 전체에 활기가 넘칠 것입니다. 매끄러운 가로변에 들어선 건축물에 다채로운 색상을 입히고 형태의 다양성을 가미하면 유럽처럼 볼거리가 생길 것입니다. 우리 인체는 자주 산책을 하면 우울감 해소 등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다 함께 힘을 모아 활기찬 지역사회 분위기를 만들어나갑시다. 걷기 편한 도시는 이제 선택지가 아닌 필수적 과제입니다. 동시에 위험 인자를 줄이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미래형 도시정책은 예측 가능한 변수를 제거할 때 상생의 길이 열립니다. 지금은 우리네 도로 사정은 이대로 좋은가에 대하여 숙고할 때입니다. 부디 대충주의라는 고질병을 고쳐나간다면 새로운 걷기의 장이 마련될 것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시를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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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51호)에는 ‘영적으로 탐색한 이스라엘 - 이스라엘에 대한 선이해’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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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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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고덕국제신도시’라는 이름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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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서 서정천을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가량. 천변길에 접어들면 저만치 삼성반도체 캠퍼스가 보인다. 거기서 어울림 아파트 단지까지는 다시 30분 남짓이니 걷기 운동량으로는 퍽 적절하다고 보겠는데, 문제는 양쪽으로 낸 보행길의 질적 수준. 고덕신도시 개발권을 따낸 LH공사에서 나름 한다고 했겠으나 필자 눈에는 미흡하기 짝이 없다. 그 공과를 살펴보되 잘못한 일부터 지적하면, 먼저 천변길을 걷다 보면 노면이 고르지 않은 데가 많다. 특히 턱이 진 이음매는 당장 바로 잡아야 한다. 둘째 개천에 흘러드는 오염수를 차단해야 한다. 이는 관계 당국에서 조치할 것을 촉구한다. 셋째 천변에 심은 나무와 수초를 대폭 교체해야 한다. 넷째 경사면의 잔디를 보강하여 사철 꽃을 심고 가꿔야 한다. 다섯째 주택가로 올라가는 계단이 기울어 사고로 이어지기 전 재공사를 서둘러야 한다. 가장 심각한 곳은 허울뿐인 수변공원이고, 자전거와 보행자가 부딪히는 경우를 막는 방안도 강구해야 한다. 썩 잘한 일이라면 지나가는 다리 옆면에 색상을 넣은 점이다. 당연하지만 의자를 설치하고 쉼터를 조성한 점도 잘한 일이다.
코스를 바꿔 북쪽 길을 택하면 머잖아 들어설 자연공원 예정지를 마주하게 된다. 다만 무슨 일인지 차일피일 공사가 지연되면서 공용주차장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으므로 인접한 공터를 가로질러 민세초·중학교 쪽으로 빠지는 게 나을 수 있다. 도로변 매연이 싫다면 아예 거대한 상가를 양편에 두고 느긋이 걸어가도 무방하다. 그래도 산책할 만한 둘레길 중에 가운뎃길을 추천하는 까닭은 길가에 조성한 녹지가 충분해서다. 아쉬운 건 자전거를 우선시하여 보행길의 동선이 흐트러진 점이다. 기대를 거는 땅은 탄약고 자리다. 시민을 위한 공원 용지로 돌려주되 여의치 않다면 오랜 기간 미군에게 점령당한 만큼 마땅히 공공적 목적으로 되돌려야 한다. 신호등의 체계도 지금보다 치밀해야 한다. 교차로의 경우 보행자들에게 동시 신호를 주는 쪽으로 전면 개편해야 한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도록 권장하고 유도해야 한다. 비싼 기름값도 아끼고 누구나 건강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만약 일삼아 걷는 일이 지루하다면 날마다 구간별로 나눠 변화를 주는 것도 바람직하다. 새로운 주택가여서 올레길이 없는 점은 어쩔 수 없다.
▲ 고덕국제신도시에 조성된 도심 보도블록
우리 부부가 맘먹고 삼성길을 돌아오려면 그날 컨디션이 따라줘야 했다. 집을 떠나 소요되는 시간을 재보니 휴식하기 따라 네다섯 시간 전후이니 한나절을 투자해야 가능한 거리여서다. 현재까지 완주한 횟수는 총 네 번. 마실 물은 물론이요 간단한 도시락을 짊어지고 나서야 한다. 곁에 철로를 끼고 걷다 보면 1번 국도의 흐름도 읽을 수 있다. 걱정거리는 공룡처럼 버티고 선 상가 겸 지식센터 건물로, 하루는 그 내부가 궁금한 나머지 볼일을 보고 주차장으로 올라갔다. 예리한 눈매에 걸려든 치명적 허점은 한가운데 정원처럼 꾸며야 할 꽃밭이 엉망이었다는 것. 가게 주위에 휴지조각을 방치하는 부주의도 역지사지해보면 상행위로는 걸림돌이다. 손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빌미를 주는 사실 자체가 개념 없는 일이어서,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우리 속담은 몇 가지 함의를 갖는다. 혹자는 머피의 법칙으로 풀이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문일지십이란 지극히 총명하다는 뜻과 함께 어느 하나를 보고 그를 판단하는 근거로 삼을 수 있다는 시각이다. 중간에 없앤 소공원을 복원하는 일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셈이다.
얼마 전 성대하게 준공식을 치른 ‘함박산중앙공원’에 대해서는 벌써 필자의 기고문을 통해 밝힌 적이 있어 재삼 거론할 필요는 줄었으나, 이곳이 ‘2024 대한민국 조경대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에는 실소를 금하기 어렵다. 이런 게 바로 나눠먹기식 행정의 표본이 아니면 뭐냐고 힐문하고자 한다. 철 지난 철제를 엮어 지은 전망대는 날카로운 느낌을 주고, 관리실 옥상에 심은 꽃들은 조용히 앉아 감상하기도 남세스러웠다. 낮은 수심과 좁은 연못에 왜 높다란 난간으로 시야를 가리고, 천편일률적인 좌석 배치는 구태의연할뿐더러 한여름 뙤약볕을 피할 만한 나무 그늘은 태부족한 데다가 딱딱한 촉감의 길바닥은 이뿐이었는지 캐묻고 싶다. 차제에 다채롭게 꾸민 이후 안락한 흔들의자나 그네를 설치하는 방안과 아울러 공원 근처에 들어선다는 아트센터와 도서관 등 여러 문화시설에 기대를 걸고 있다. 부디 신개념 조경을 곁들여 정성껏 개관한다면 공원과 어우러질 수 있겠다. 자, 저간의 사정이 이렇다면 국제라는 단어를 뺀 고덕신도시라고 한들 이름값에 부응하고 있는가? 필자는 위 내용을 통해 이미 답했다고 생각한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50호)에는 ‘걷기 편한 도시환경 제안서’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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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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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보행 운동의 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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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등하굣길이 멀었던 나에게 걷는 취미가 생긴 건 가정을 이루고부터였다. 무기력한 청소년기에는 야무지게 걸을 힘조차 없었거니와 등 떠밀려 잡혀간 병영의 일과에서조차 하루하루 죽지 못해 날짜를 채우고 나온 경우였으니 오죽하랴. 어쨌거나 대학에서 취득한 자격증에 맞춰 가까스로 직장을 잡고 이세들이 잇달아 태어나면서 가족이 함께 집 주위를 거닐기 시작한 건 덤처럼 주어진 복락. 그러나 심신의 건강을 생각하며 보행 운동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특이하게 걷기보다 힘겨운 등산이 먼저였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기숙사에 머물면서 지금 거주하는 집을 중심으로 동네를 한 바퀴씩 돌아온 게 계기였는데 초기에는 반경을 좁혀 주로 동쪽으로 가는 편이었다. 이후 차츰 발길이 닿는 대로 지경을 넓히며 다른 방향을 기웃거렸고 틈나는 대로 산책을 즐기는 부류에까지 끼게 되었다. 물론 퇴임과 동시에 박사과정에 적을 두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한두 주가량을 건너뛰기도 하지만 최종학위를 마친 뒤에는 한 달에 열흘 정도는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중이다.
그 지형지물 가운데 으뜸은 부락산 둘레길. 제법 산허리가 굵은 동산이다 보니 반경을 넓히면 이십여 리는 족히 되지 싶다. 현관을 나와 레포츠센터를 지나면 곧바로 동령마을인데 아담한 교정보다는 그 뒷산을 밟아주는 편이 낫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널찍한 아파트단지를 끼고 산책로를 돌아가거나 한산한 자전거길로 빠져나와도 좋다. 둘레길에서 해 질 녘 마주친 등나무 터널은 좀 스산한 느낌이 든다. 조심스레 내리막길을 내려와 만나는 찻집은 정원이 예뻐 언제든 한 번쯤은 들어가 보고 싶지만, S자형 갈림길에서 수성 최씨 장군 묘를 보며 위로 빠지든 우곡마을을 지나쳐 깔딱고개를 넘을 때는 숨이 좀 치오른다. 전엔 균형을 잡고 논두렁과 친할 때도 있었으나 이젠 그마저 여의치 않은 상태. 가끔은 보폭을 넓혀 마산리 쪽의 옛길로 접어들어도 괜찮다. 발걸음이 가벼울 때 둥실봉 너머를 엿보는 재미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거기 한구석에서 발견한 절이 불법사. 알려진 동녕사나 최유림 장군 사당 근처 사찰 말고 이만치 작은 절이 숨어 있는 줄을 미처 몰랐던 터다. 물론 부락산의 해발이 150m에 지나지 않으니 보통은 완만한 능선길을 선호함에도, 아래로 내려가 성불사를 등진 채 문화공원을 딛고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나 그 주변을 아울러 둘러보는 샛길을 권하련다.
▲ 부락산 둘레길로 접어드는 이충분수공원
다음은 장당동 야산을 벗 삼아 지경을 대폭 늘린 삼성길. 일단 평택시의회를 기점으로 조성한 신시가지를 보노라면 상전벽해에 버금가는 설계도에 가깝다. 다만 나는 다랑논이 있던 시절을 더 그리워한다. 아직 차량통행을 허용하기 전 논밭을 뭉개고 닦은 도로변을 걷던 때를 소환하면 그간 이룬 브레인시티 안내도는 그야말로 격세지감. 그걸 접어둔 채 시멘트 농로를 걸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사라질 농가에는 몇 마리 가축만 남았는데 인적이 드문 언덕길에도 운치는 있건만 그보단 가구 숫자가 불어난 전원마을을 굽어보며 타고 넘는 산행길이 훨씬 익숙하다. 짓다가 만 가옥 골조는 늘 보아도 흉물스럽다. 언젠가 그 앞집에 사는 노인분에게 사연을 물으니 반색하며 이주 의향이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신축도서관을 거쳐 아치형 육교를 가로지르면 큼지막한 삼성반도체 캠퍼스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내와 뻥 뚫린 곧은길을 완주한 횟수도 도합 다섯 차례. 꼬박 세 시간이나 걸리는 길이어서 쉽사리 나설 순 없으나 새로 쓰는 고덕국제신도시의 초창기 역사를 지켜보는 기분은 남다르다.
급변하는 세태에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구시가지를 살펴보는 일 또한 흥미롭다. 심심할 때마다 찾아가는 신장동 일대는 실은 재개발지구로 지정된 채 몇 년을 끌어왔었다. 일부 헛바람에 기댄 부동산 거품이 빠지면서 그대로 눌러살게 된 원주민으로서는 한숨을 돌린 참. 문제는 여기가 바로 옆 투기를 불러온 신도시와 인접해 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그 중간에 널따란 공원이 생겨 완충지대가 될 거라지만 도리어 다닥다닥 붙은 공동주택으로 인해 슬럼가로 전락할 확률이 높다는 진단이거니와 거기에 비교의식이 출중한 민족성이 단단히 한몫 거들리라는 우려감에서다. 그나저나 신장쇼핑몰보다는 평택국제시장이라는 새 이름이야말로 보편성을 띠기에 충분하다. 숨통을 트여준 근린공원에서 그네를 뛰며 잠시나마 동심으로 돌아가 보는 틈새도 추천할 만하다. 요즘 부쩍 이용객이 는 철길을 따라 성의껏 꾸민 벤치에 앉아 색다른 여유를 가져보는 건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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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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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49호)에는 ‘고덕국제신도시라는 이름값’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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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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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코카서스 기행 ‘아르메니아의 수더분한 고유미’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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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도시인 사다클에서 지루한 입국 수속을 밟고 대면한 아르메니아(Armenia: 280만가량, 29,743㎢, 8천 달러)에 대한 인상은 고유미를 지닌 수더분한 얼굴이었다. 미루나무에 둘러싸인 가옥에 설치한 가스관도 이웃나라와 대동소이. 종교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95%)라는 명칭을 사용하기에 물어보니 기존 정교회나 예수교(4%)와는 달리 그리스도 단성론을 취하여 민족적 결합을 꾀한 측면이 강했다. 하지만 이는 계시(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신이 깨우쳐 알게 함)를 왜곡한 것이다. 기독교 정통교리에서는 이를 이단(異端)으로 분류한다. 제번하고 예정했던 아르메니아 비잔틴 양식과 카브카즈 건축을 혼합한 알라베르디 지역의 아그파트 수도원은 수해 복구 중이어서 아쉽게도 발길을 세바나반크 수도원으로 돌렸다. 다행히 길이 78km, 폭 56km에 이르는 세반호가 넉넉한 품으로 “안녕(바렘)”하며 일행을 반겼다. ‘감사(멜시)’한 건 1,900m 고지에 찰랑대는 호숫가도 좋은데 촉촉한 물바람의 촉감이 고풍스런 수도원만큼이나 운치 어렸다는 것. 이번 여행 들어 처음 느낀 이런 기분은 나만이 누린 호사일까?
수도 예레반(약 110만 명 거주)의 보도는 앞서 방문한 두 나라에 비하면 눈에 띄게 양호했다. 과연 돌의 나라라는 명성에 걸맞은 석공술. 때마침 차창 안으로 빨려 들어오는 경치 가운데 유독 눈요기가 될 만한 바위산이 많았다. 게다가 노르웨이에서 스웨덴으로 넘어올 때 장경(場景)을 코카서스에서 그대로 마주할 줄이야, 정겨운 휴양마을을 지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산맥이 온통 초지로 뒤바뀌었다. 지질학자들조차 모른다는 궁금증을 안고 나타난 보조 가이드는 한국 외대에서 공부한 20대 재원. 이름이 ‘아니’라는 말에 닉네임을 ‘아론’이라고 쓰는 해설자와는 어떤 사이냐고 물어 한바탕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발걸음을 재촉한 곳은 지하 감옥이라는 뜻의 코르비랍 수도원. 그 길목 양편으로 포도원이 펼쳐졌다. 그런데 밭 한가운데 잠시 내려 구름에 덮인 아라랏산을 겨냥하자니 아무래도 초점을 잘못 맞춘 듯. 어차피 수도원 둔덕에 올라서면 왼쪽은 소아라랏산이요, 오른쪽은 대아라랏산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좀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아라랏의 신비를 껴안은 채 그 밑자락 널따란 묘원을 응시했다.
▲ 아르메니아서 바라본 아라랏 산정
바라볼수록 아르메니아를 대표할 만한 독특한 경관. 줄곧 설산을 맴도는 독수리는 무얼 노리는 걸까? 일찍이 이 땅에 정착한 선조가 노아의 5대손이라는 전설이 있단다. 다만 여덟 식구로 묶인 당대 의인의 육적 구원은 방주에 물기가 채 마르기도 전 밤새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추태로 이어졌다. 아마도 함, 셈, 야벳으로 갈라진 저주의 통로가 아니었다면 적어도 홀로코스트(레위기에 나오는 번제라는 뜻)로 대표되는 제노사이드의 참극을 되풀이하진 않았을까? 가끔씩 묵상에 임해보면 부지불식간에 필자 특유의 영적 노파심이 뇌파를 건드리곤 한다. 가능하다면 우주 공간에서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목도하며 지도상에 표시한 동서남북의 바다 빛깔이 흑해-백해-홍해-청해로 채색되어 있는지 보고프다. 그 시점이 임박한 날 아라랏산 어딘가에 자취를 감추고 있는 노아의 방주도 세상에 정체를 고할 것이다. 하츠카르 석판 십자가를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에 우리 부부가 묘지공원을 산책한 건 그래서였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노라는 우리 속담처럼 죽음을 앞두고 배회하는 뭇 영혼의 행방에 대해 상고한 시공이었다.
아짜트 계곡에 퍼진 주상절리는 그 규모만 하더라도 세계 최대라는 희귀성이 있었다. 가까이 접근해 보아하니 다양성 측면에서도 이제껏 구경한 주상절리 가운데 최상급. 화산 분출 과정에서 용암이 흘러내리며 식을 때 육각형 기둥 모양으로 균열이 일어나 생기는 형태의 오묘함이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필자의 눈매에 잡힌 문제점은 이토록 귀한 천연기념물이 급속히 망가지고 있다는 현실적 위기감. 아슬아슬 붙어있다가 낙하물로 인한 안전불감증은 물론 바로 위쪽으로 차량이 오가도록 놔두고 가옥들까지 방치한다면 거기서 내뿜는 매연이나 오폐수가 스며들어 얼마 가지 않아 훼손당할 게 빤했다. 큰 근심거리를 짊어진 채 구슬픈 연주로 물든 가르니신전 내 글라디에이터에 관람에 뒤이어 예레반의 랜드마크라는 캐스케이드 조각공원은 공화국 광장과 일체를 이룬 예레반 관광의 기준점. 층계마다 구상한 창의성이 돋보일뿐더러 발품을 팔아 맨 위 횃불 탑에서 아래를 굽어보니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산책로 끝에 가면 일평생 아르메니아를 제 몸처럼 아꼈다는 공원 설계자 타마니안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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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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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48호)에는 ‘보행 운동의 별미’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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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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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코카서스 기행 ‘조지아의 자산가치는 자연환경’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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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르조바(안녕)”에 이어 “마드로바(감사)”로 여는 나른한 오후. 부지런히 내달려 진발리 인공호수가 내려다뵈는 아나누리 성채에 당도했다. 칙칙한 회당 내부야 보면 볼수록 오십 보 백 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고 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 중인 아줌마 부대만 보고서 냅다 올라간 성벽 체험은 하마터면 큰일을 치를 뻔했다. 막상 난간조차 없는 데를 기어 올라가니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금세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이었는데, 설상가상 한 사람 겨우 지나갈 만한 비좁은 길목에 퇴로마저 막혀있어 둔한 몸을 돌려 갔던 길로 되돌아 내려올 때까지 우리 부부는 내내 서로의 새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제야 탁 트인 시야에 들어온 주변 산수화. 과연 물의 나라다웠다. 기껏 트빌리시(상주인구 120만 남짓)를 벗어났다며 이만치 상큼한 기분이 될 줄이야! 불과 하루해도 못다 채운 체류 기간을 두고도 총인구의 1/3가량이 모여 살다 보니 가당찮은 착시현상이 벌어진 참이 아닌가. 기실 기독교 철학으로 최종학위를 마친 처지에서 어쩌면 숨 가쁘게 쏟아내는 해설자의 말잔치로부터 해방감을 맛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산세가 빼어난 구다우리를 출발하여 조지아와 러시아의 우정을 다짐하는 기념물을 딛고 조망한 악마의 협곡은 흡사 그 옛날 선녀가 몸을 씻은 금강산계곡처럼 보였다. 우리 부부의 눈길은 어느새 주먹 크기 사파이어를 빼닮은 둠벙에 꽂혀있었다. 사방에 초점을 둔 사진을 남긴 뒤 카즈베기로 이동하는 길. 구불구불한 산간도로에는 러시아로 향하는 트럭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세계사 전반을 관통한 전천후 해설가의 막힘없는 명강의. 하지만 직전에 꽂힌 동영상에서 미처 헤어나오지 못한 탓인지 그동안 귀담아듣던 기독교 이면사마저 귀에 잘 들어오질 않았다. 카즈베기에서 곧장 사륜구동 차량으로 올라간 해발 2,170m 언덕. 저만치 아득히 뵈는 산정은 자그마치 5,047m나 되는 고점이라서 사철 만년설이 쌓여있을 수밖에 없겠다. 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교회는 트레킹을 즐기는 이들의 쉼터라고 해도 될성부르다. 14세기에 지어져 국가적 재난을 당할 때마다 귀중한 유물을 지켜온 공력이 크다는데, 촬영을 금지한 실내보다는 냉큼 밖으로 나와 떼로 몰려다니는 산중턱의 운무를 카메라 화면에 담는 편이 유용하리라.
▲ 조지아를 지탱한 놀라운 자연환경
조지아 대자연의 특징은 일단 거대한 산자락을 뒤덮은 초록빛에 다초점을 맞출 수 있다. 가도 가도 끊이지 않는 대초원의 향연. 조지아인들이 국운을 걸고 지켜내야 할 국부의 우선순위는 자연유산인 셈이다. 시나브로 짙푸른 경치에 빠져들다 보면 비몽사몽이 되어 풀을 뜯는 양무리가 영락없이 구더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소 떼가 바쁜 길손의 앞을 가로막을 수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짐승처럼 본분에 충실한 존재가 또 있을까?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들은 탐욕에 골병이 들고 급기야는 기후위기를 불러 오늘날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간간이 골짜기를 할퀴고 지나간 자국은 주로 두 가지 원인으로 진단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해마다 빗물에 오염된 빙하가 녹아내리는 바람에 경사면이 점점 약해져 벌어진 경우요, 다른 하나는 산기슭에 무리하게 길을 내다가 지반이 쓸려 내려오는 경우가 그것. 사안이 이만큼 중대함에도 중국 건설업체를 끌어들여 산맥을 파헤치고 겨울나기 터널을 마구잡이로 설치하다니, 필자는 이를 구린내 나는 돈줄이 암세포를 키우는 연고로 파악하고 있다.
조지아 정교회 투어의 대미를 장식한 곳은 두 군데. 먼저 들른 곳은 므츠헤타 언덕에 있는 즈바리 수도원(일명 성스러운 십자가상의 교회)이었다. 산바람이 어찌나 드센지 온몸이 흔들릴 정도. 요새로 쓰인 성벽이 빗물에 휩쓸린 자국도 보수가 시급한 지점이다. 그 아래로 내려와 4세기 초 건립된 스베티즈호벨리(생명을 주는 기둥이란 뜻) 성당을 돌아봤다. 때마침 선남선녀의 결혼식이 한창. 방금 식을 마친 쌍은 추억을 담기에 바쁘다. 우리네가 본받을 만한 간소하고 엄숙한 예식의 현장. 느긋이 건축미가 빼어난 건물 내부를 살펴본 뒤 고대 이베리아 왕국의 길거리를 두루 걸어봄도 유의미했다. 둘 다 므츠바리강과 아라그비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세웠다는 점과 양 건축물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것도 공유할 대목. 찌는 듯한 무더위는 여기서도 기승을 부렸다. 트빌리시로 돌아와 둘러본 도심의 주거 여건은 그리 윤택해 보이진 않았다. 문득 자유의 광장에 있다는 게오르기우스 황금상이며, 그 앞 공원에 있는 푸시킨의 흉상이 궁금했다. 이로써 조지아의 진면목을 일부는 마주한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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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47호)에는 ‘코카서스 기행 - 아르메니아의 수더분한 고유미’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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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