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창에 비친 샌프란시스코 바다는 잔잔했다. 마치 아시아나 기장이 선보인 부드러운 착지처럼. 게다가 의외이다시피 입국 수속을 수월하게 마치고 합류한 서른한 명의 일행은 원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 덕분에 곧바로 승선한 베이크루즈 유람선. 관광지 특유의 요란함과는 달리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우리말 해설마저 나긋나긋하다. 다만 피셔맨즈 워프 항구가 그리 매력적인지는 일단은 의문부호. 어쨌거나 우리 부부의 두 눈은 선미를 따르는 바다 갈매기보다는 인근 알카트레저섬을 향했다. 탈출이 불가능한 감옥이었다는데 지금은 후줄근한 형체만 드러내고 있다. 이윽고 불그스름한 빛깔의 금문교(Golden Gate Bridge). 승객들의 시선이 쏠린 곳은 세계 최장(?) 현수교를 지탱하는 수십만 개의 쇠심줄이었다. 한 시간 남짓한 승선감을 뒤로하고 다시 리무진에 올라 긴 다리를 통과하는 느낌은 미국 땅을 밟고 있다는 나그네의 체감이다. 때마침 알맞게 익어가는 저녁노을. 포토스팟에 서서 추억을 남기면서도 탁 트인 시야로 빨려 들어오는 그림은 이채롭다. 구라파의 어느 대성당을 빼닮았다는 90만 도시의 시청사처럼.
여장을 풀고 잠자리에 누워본들 꼬박 뜬눈이다. 그걸 일거에 상쇄해버린 풍광이 있었으니 독특한 지형의 산야였다. 요모조모 뜯어봐도 신기한 모양새. 필자 머리에는 캘리포니아의 값비싼 생활물가는 어쩌면 자연환경을 보존하려고 붙이는 세금인지도 모른다는 뇌피셜이 스쳤다. 산자락이든 들판이든 온통 우리네 겨울 금잔디 빛깔이랄까. 이따금 푸른색을 띠는 건 애써 가꾸는 초지와 간간이 박힌 연녹색 수풀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색상의 조화가 참 좋았다. 이를테면 뉴질랜드의 정갈한 녹지와 몽골의 수더분한 초원과는 색다른 분위기. 부러운 지점은 최소한의 길만 뚫었을 뿐 훼손의 흔적이라곤 거의 없더라는 놀라움이다. 매끄러운 노면은 물론이요, 맨홀과의 일치점도 그만하면 합격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필자가 눈여겨보는 포인트는 보도 기울기 및 동선이 편안한 보행로. 한마디로 미합중국의 저력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나저나 속이 터질 만치 느려터진 화물열차. 가이드 말마따나 하도 길어 대충 세다가는 자칫 숨넘어갈지도 모른다. 고로 남들 눈치 못 채게 숨죽이고 세어보니 놀라지 마시라, 무려 90칸이 넘었다.
▲ 샌프란시스코 포토스팟에서 바라본 금문교
그런데 막상 내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은 건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 사전에 캘리포니아에서 네바다로, 애리조나에서 유타주에 걸쳐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만치 광활하다니, 어딜 보거나 지평선이 펼쳐져 있는 거야 당연한 풍경화로되, 제아무리 훑어봐도 이걸 두고 거푸 사막이라 일컬음은 좀 어폐가 있지 싶다. 그 이름이 토착민의 부족 명에서 따온 건 상식일 테고, 군데군데 물 자국으로 얼룩진 와디는 그렇다 쳐도 떨기나무 엇비슷한 수종으로 뒤덮여, 허연 모래벌판을 상상해온 글쓴이로서는 도무지 사막이라는 설명에 좀처럼 동의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여기에 그린 데저트(Green Desert)라는 명칭을 덧붙인 건 그래서였다. 가까이 격납고 같이 생긴 게 보여 물어보니 실제 중고 비행기를 보관하는 창고. 시월은 아직 우기가 시작되기 전이어서 장대비가 내리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래도 후드득 빗방울을 마주치기라도 할라치면 메마른 가슴이 촉촉해지는 기분일 듯싶다. 그때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창밖을 가득 채웠다. 더욱 반가운 건 재생에너지를 생산하는 태양광 설비이며 풍력발전기 행렬이었다. 내심 푸근했다.
3억 3천만 명이 흩어져 사는 주거지 역시 초미의 관심사. 언뜻 허술해 뵈기까지 한 주택가는 한국처럼 하늘 높이 치솟을 까닭 없이 죄다 나지막했는데, 특기할 만한 건 이렇다 할 울타리가 거의 없고 굳이 주차할 공간을 따로 마련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래서일까? 이네들은 매사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횡단보도 근처에 사람 그림자만 얼씬거려도 무조건 차량이 먼저 멈춰서는 풍토. 한국인이 이것만 몸에 익혀도 사상자가 대폭 줄어들 거라는 확신이 든다. 새삼 사계절 먹거리 가격이 일정하다는 인솔자의 전언에 현실감이 와 닿은 건, 생산 전 공정에 기계화를 이룬 결과이고 요소요소에 관정을 뚫어 가뭄에 연연할 까닭이 없어서란다. 거기다가 이네들 정책 가운데 으뜸은 유통기간은 지났으나 일괄 폐기하지 않고 소시민들의 생계를 돕는 마음 씀씀이. 문제는 애초에 전세 제도 자체가 없어 평생 사글세나 대출금 떠날 날이 없다는 점일 텐데, 격주로 임금을 받는 관행은 소비심리를 진작시키는 데는 얼마큼 효과가 있을 참이니, 천민자본주의 민낯이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는 농간만 막는다면 살만하지 않을까 끄덕였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59호)에는 ‘미서부 탐방기 - 국립공원 최우선 보전책’이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