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0-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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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Ph.D.

사라진 산성을 찾아 떠나는 일이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을까? 이는 평소 나의 인문학적 관심사 가운데 하나여서 지면상에 선보일 만한 화젯거리를 털어놓으련다. ‘역사’라는 낱말의 사전적 개념을 들여다보더라도, “인류 사회의 발전과 관련된 유의미한 과거 사실들에 대한 인식”이 남아있는 ‘현장’, 즉 “어떤 일이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곳”을 보전하는 일은 당위에 속할 터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각에서는 몰상식한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왜일까? 이는 그 시공의 중심에 늘 사람이라는 사고(思考) 뭉치(?)가 도사리고 있어서다. 그만큼 수많은 사건의 주인공이며 허다한 조역을 눈여겨보는 일은 요긴하거니와, 그래서 더욱 생로병사로 점철된 인간사의 이면을 예의주시할 수밖에는 없다. 그곳에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녹아있고,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 남아있으며, 기록 자체에 대한 교훈이 살아있고, 교훈이 될 만한 상징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중에 내가 주시한 곳은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평택의 ‘비파산성(琵琶山城)과 ‘자미산성(玆美山城)’이었다. 인적이 뜸한 시골길은 짐작한 대로 성곽을 품을 만한 산자락을 찾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한 시간 전쯤 좀 헤매기는 했으나 인근 주민인 듯한 행인에게 길목을 물을 때만 해도 이토록 한 치 앞조차 안 보일 줄을 어찌 알았으랴. 실컷 자란 햇마늘 꽃 무리를 신기한 듯 쳐다보던 눈길도 잠시, 이리저리 오가며 ‘평택섶길’을 캐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몸도 맘도 지쳐갈 무렵, 한 분의 귀띔에 따라 가까스로 성글게 모여 사는 외딴 촌락으로 접어들었다. 반갑게도 동네 한가운데서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는 회화나무 세 그루, 그 밑 평상에 걸터앉아 하늘을 보니 어느새 해는 중천이다. 답답한 노릇은 휴식을 취하고 일어난 뒤에도 두 산성에 대한 아무런 꼬투리조차 찾아내지 못한 상태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거기서 다시 반경을 넓히고 좁히기를 되풀이하다가 겨우 찾아낸 비파산(琵琶山) 초입. 자그마한 절터를 뒤로하고 바삐 오르다 보니 비파산은 자미산(玆美山)으로 이어지는 무성산(武城山)의 한 줄기였다. 간간이 박힌 자갈길에 따가운 볕을 가려주는 솔숲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함께한 아내도 오르락내리락 산길을 걸으며 평택에 이만한 덩치의 산맥이 있다는 데 새삼 놀라는 눈치. 흔적을 감춘 비파산성에서 여우고개로 넘어가는 자미산(玆美山)에는 임경업 장군의 설화만 남아있는데, 그의 오줌 줄기에 갈라졌다는 산등성이 바위를 흘끔 훔쳐봤을 뿐 아무리 둘러봐도 둘레가 십여 리나 된다는 자미산성은 희미한 형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 원인인즉 이미 알려진 대로 아산만 방조제 공사 때 석재로 사용했다니, 아뿔싸 이거야말로 집단 몰지각에 기인한 게 아니면 무엇이랴. 우리나라에 가시지 않은 야만의 그늘이 한두 군데는 아니로되 문화재 보존에 대한 인식은 자못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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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길에서 사라진 자미산성을 찾아

 

단지 퍽 흥미로운 건 자미는 ‘북두칠성’을 가리키고, 지역민들은 아직도 이 산을 ‘재미산’으로 부른다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한자어의 뜻으로 풀어본들 ‘이렇게 검고 흐린 산[玆]’을 두고 ‘아름답다[美]’고 했을 리는 만무하거늘, 혹여 국자 모양의 별자리 아래 드러난 능선을 보고서 ‘재미 삼아’ 소원을 빈 데서 유래하지는 않았을지 내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경기도 도보(제3257호, 2005.10.17.)에 따르면 산세를 따라 둥글게 둘러친 성지(城址)에 흙으로 만든 내성과 돌로 만든 외성에, 동쪽 110m 부근의 흙으로 만든 부성으로 이뤄진 복합식 삼중 구조였으며, 석축은 평균 10~20m 정도 높이여서 해양으로 침투하는 적군이 쉽사리 접근하기 힘든 요새였다고 전해진다. 추후 학술조사를 실시한 결과 성내에서 문지(門地) 등 각종 시설물이 확인되었고,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는데 어느 부서에서 관리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로부터 남쪽에다 평지와 산지를 이어서 만든 비파산성 역시 여느 때 없이 배고픈 시절인지라 당장 농경지를 늘리는 일도 중요하였겠으나, 최소한의 보존 절차는커녕 전문가의 자문도 구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돌들을 유출하는 바람에 성벽 하부마저 일반인들의 육안으로는 도무지 식별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를테면 선인들이 이룩해 놓은 삼국시대의 테뫼식 석성을 후대인들이 새까맣게 지워버린 참이다. 다행히도 비파산과 자미산성을 이어주는 서낭고개는 여전히 자연생태계가 살아있었다. 이는 당대 힘겹게 고갯마루를 넘나드는 나그네들을 상호연결하는 통로였는데, 애석하게도 정부에서 주도한 대공사를 서두르면서 토루(土壘)를 떠받친 돌들까지 죄다 파다가 써버려 원형을 잃고 말았다니 떠올릴수록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63호)에는 ‘역사의 현장이 지닌 함의’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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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사라진 산성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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