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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국내 걷기 ‘박물관에 딸린 용산공원’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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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은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결 정돈된 모습이었다. 단박에 눈에 띈 건 역시나 경천사 10층 석탑. 그 의연한 자태에 오면서 보았던 산만한 거리 경관이 다소나마 정리된 느낌이다. 방문한 주목적은 나석주 의사 편지를 살펴보고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한 것. 물론 내친김에 바로 옆 한글박물관도 보고 반경을 넓혀 용산가족공원까지 두루 걸어보기로 했다. 소개란에 나온 내용처럼 4만여 평 규모를 자랑하는 전시공간을 죄다 돌아볼 수는 없으니 몇 군데를 선택하고 집중해야 했는데, 나의 경우 매번 어느 정도 배경 지식이 있는 고문서나 볼만한 서화 쪽으로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반면 아내(가정학 전공)는 늘 전통복식이나 시대별 자기류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다. 이전과 달라진 그림은 로봇 안내자가 관람객을 맞더니 버튼에 따라 해설을 제공하는 서비스. 마치 전문가의 육성처럼 들려주는 이야기를 귀담아들은 다음 새롭게 선보인 사유의 방에 들렀다 밖으로 나왔다. 아쉬운 지점은 소장한 42만여 유물 가운데 전시물이 12,000점(3% 미만)에 불과한 점. 이젠 일정 부분 순환 전시를 고려할 때라고 본다.
때 이른 더위에 솔바람이 부는 벤치에 앉아 시장기를 달랜 뒤 거울못에 비치는 청자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린이박물관이나 전통염료식물원을 지나친 채 박물관 나들길로 접어든 까닭은 화려한 배롱나무 군락에 끌려서였다. 바로 앞에서 그 고운 빛깔에 잠시 서성거리다가 석조물정원으로 가는 오솔길. 하지만 바닥이 고르지 못해 걷기에 불편했다. 때마침 점심시간에 산책을 나온 직원이 있어 실태를 알리니 공감했다. 눈요깃거리는 미르폭포가 아닌 석조물정원. 보신각종을 비롯해 장명등, 문인석, 석양등, 온녕군 석곽 등 석물들이 줄지어 섰다. 그런데 승탑을 포함해 남계원칠층석탑(국보 100호)을 이런 식으로 전시해도 무탈한지 의문스러웠다. 요즘 한창 해외에서 불어닥친 '케이팝 데몬 헌터스(약칭 케데헌)' 열풍에 힘입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마련된 뮷즈샵 기념품이 동나는 등 K컬처 전파중심지로 부상한 만큼 그에 걸맞은 인프라를 갖추는 일이 급선무라고 조언한다. 2025년 상반기 관람객이 270만 명(외국인 10만 육박)을 상회해 역대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면 주위 여건을 개선하는 노력이 이어져야 마땅할 터다.
거울못에 비친 국립중앙박물관
그에 비해 국립한글박물관은 썰렁했다. 게다가 입구에 안내문을 비치한 건 요식행위일 뿐 방문객을 대하는 직원 태도 또한 무성의했다. 이때 언뜻 한글박물관의 역할이 국립박물관과 국립도서관 사이서 겹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체부 규정을 보면, “한글 및 한글문화 관련 유물과 자료의 수집·보존·조사·연구·전시·교육 및 교류 등 한글문화의 보존, 확산 및 진흥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라고 되어있다. 개관 일자는 2014년 한글날. 최근 화재사고로 인해 가슴을 쓸어내렸으나 막상 진중하게 돌아보니 짧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자료를 한데 모아 다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애쓴 흔적이 뚜렷했다. 가장 돋보인 목록은 ‘한글 100대 문화유산’. 연대별로 그 일부를 적시하면,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을 위시하여 한글금속활자, 내훈, 설공찬전, 한글영비, 논어언해, 병자일기, 춘향전, 일동장유가, 농가월령가, 예수셩교젼셔, 서유견문, 독립신문, 홍길동전, 훈맹정음, 조선말큰사전, 한글맞춤법통일안 등을 들 수 있겠다. 차제에 광복 80주년을 맞아 한글 교육이야말로 전략적 외교 행위라는 화두에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은 심정이다.
동아시아 지정학적 안보상의 이유로 주한미군사령부 총 지휘부가 아직 남아있는 가운데 그들이 떠난 부지에 서둘러 조성한 용산가족공원은 넓은 잔디밭에 둘러싸인 인공연못을 중심으로 기존 개념을 뛰어넘은 친환경 추구형의 쉼터로 알려져 있다. 그 역사를 짚어보면 임진왜란, 임오군란, 갑신정변, 러일전쟁을 거쳐 1906년부터 1945년까지 왜군과 청군의 군사시설 및 일본인들의 주거지였던 땅을 서울시에서 가족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위치를 봐도 서울시 남북을 잇는 녹지 축의 연결고리로 중앙공원 성격을 띠고 있다는 설명이다. 구경 삼아 차분히 둘러보니 산책로를 따라 야외조각품을 배치해 격을 높였고, 각종 운동 시설과 주차장 등 편의시설도 갖췄다. 다만 녹색공간이 넉넉한 측면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하되, 정교하지 못한 노면은 편안한 발길을 방해했다. 철 따라 심고 가꾸는 화초 종류도 다채로워야 하거니와 빛바랜 정자나 나무다리 보완에도 정성을 쏟아야 장미원을 보고 맨발로 황톳길을 밟는 맛도 개운할 것이다. 앞으로 기대할 곳은 수련꽃이 피어날 생태습지. 인근 온누리교회는 요다음 들르기로 했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86호)에는 ‘국내 걷기 - 물향기수목원의 동선’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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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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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기독교의 본질과 비본질 ‘기독교의 현실 인식과 각성’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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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본질과 비본질이 그러하다면 과연 성도의 지향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일단 기독교의 교파나 교단은 세속화의 과정에서 빚어진 분열사로 파악해야지 그들이 내세우는 구원관, 신격화 대상, 정경, 교리의 차이로 인해 생겨난 불가피한 것이 아님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 역사적 추이를 살펴보더라도 J. 사이어가 말하는 세계관처럼 그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진정한 실재, 세계의 본질, 인간이란 존재, 사후 문제, 앎의 근거, 시비의 판단, 역사의 의미를 곱씹는 가운데 거듭난 자들이 여러 유형의 세계관들이 경쟁하는 구도에서 기독교 세계관이 어떻게 우월한지를 스스로 증명해내야 한다는 주문입니다. AD 66~70년 유대전쟁(사도행전 8:1)을 들여다보거나 구약성경 39권만을 인정한다며 예수 그리스도를 이단으로 규정한 만행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까스로 주후 90년 얌니아 주교회의에서 신약성경 27권을 확정하고, 285년 프톨레마이우스 때 70인역 성경(Septuagint)을 12지파 6명씩 72명이 72일간에 걸쳐 연구한 결과물이 극적으로 일치한 까닭입니다.
때가 차매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칙령으로 종교자유가 허용되었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하면서, 380년 테오도시우스의 데살로니가 칙령으로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지만, 395년 동서 로마가 분열하면서, 635년 네스토리우스파 교리가 중국에 전파된 사실이 서안(진나라 옛 수도 장안)의 ‘비림’에 남아있을 만큼, 781년 당나라 태종은 ‘대진경교(景敎)유행중국비’ 건립에 이어 기독교 선교 내용 및 교세를 기록했음에도, 1054년 이른바 필리오케(Filioque, 그리고 성자로부터) 논쟁이 불붙어, 1054년 동서교회는 분열되었고, 가톨릭교회는 성상 숭배, 화채설, 유아 영세를 주장한 반면 정교회는 성상 숭배를 거부하면서 급기야 1095~1291년에 걸쳐 십자군 1~8차 전쟁을 일으켜, 638년 이슬람 지배하에 있던 예루살렘 탈환극으로 치달아 4차부터 동서가 적대시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입니다. 그나마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95개조에 따라 개신교는 성경 중심, 이신칭의, 공재설 등을 택함에 따라, 1532년 칼뱅의 개혁운동으로 이어져 구원예정론, 직업 소명설을 기반으로 자본주의 태동의 토대 위에서 한국은 세계 10대 교회 중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비롯해 무려 7개를 보유했으나 이는 외형일 뿐 더는 하나님이 행하신 말씀의 역사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향기수목원 연못에서 자라는 연꽃
기독교인의 올바른 현실 인식이 문제해결의 교두보입니다. 일부에서 오해하고 있는 예정론은 신정론(神正論)에 근거해 자유의지를 구사하는 인생의 전 과정을 알고 계신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자기 의로 뭉친 슈바이처가 불신자이든 불세출의 아인슈타인이 불가지론자인든 무신론과 범신론(animism)은 그 뿌리가 같습니다. 거기서 유신진화론의 일종인 이신론, 자연신론, 토템사상이 나왔고, 제3의 성, 동성애, 수간을 운운하다가 사물 인터넷(IoT), 섹스 로봇, 동물권, AI, 환경파괴(기후위기), 출산율 저하로 인한 멸종을 부추겨 지구 종말을 자초한 형국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라는 말씀에 대한 답변은 극구 회피합니다. 자기네들의 빈약한 영적 허구성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는 사랑을 외친 안토니오 도미니스의 말을 상기할 때입니다.
신인식을 새롭게 하려면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죄이고 영적 죽음이라는 사실을 실시간 인지해야 합니다. 영혼을 가진 인간이야말로 영+혼+육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므로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중생한 다음 성화를 통해 믿음의 결과로 나타난 행실(신행일치)이 영화로워지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인간의 모든 활동은 근본적으로 “구령 사역”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아니면 채울 수 없는 절대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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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85호)에는 ‘박물관에 딸린 용산공원’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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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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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기독교의 본질과 비본질 ‘기독교의 비본질적 제 성분’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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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기독교의 비본질적 현상에 대하여 논의할 때입니다. 제도라는 이름으로 구축된 조직은 일종의 필요악으로 간주합니다. 응당 직책은 섬기는 리더십이어야 합니다. 결코 계급이 아니기에 낮아지면 질수록 선한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연보, 즉 헌금은 신앙의 깊이와 척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액수는 수치일 뿐입니다. 정결한 마음을 드린 과부의 두 렙돈(현재 한화 2,500원 정도)이 그 증표입니다. 절대 강요해서는 안 될뿐더러 잘못 사용할 수 없는 제물입니다. 건물은 예배를 드리는 장소이므로 구약의 제단이나 지성소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성전은 흩어진 성도가 모이는 곳이지 편의적 방편에 의한 건물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규모나 화려한 장식은 구원과는 무관합니다. 따라서 참배의 뜻을 포함한 성지 순례라는 조어는 적합지 않습니다. 성도의 삶이란 늘 경배를 드리듯 성결하게 이어져야 하기에 신앙심과 유적답사는 별개입니다. 십자가는 복음의 상징일 뿐 그 자체에는 능력이 없으므로 부적처럼 여기면 우상 숭배에 불과합니다.
기독교계에서 쓰는 용어의 오류도 심각합니다. ‘(대소, 열린) 예배를 보다’는 “예배를 드리다”로 고치고, ‘특송’이나 ‘준비 찬송’은 찬양의 지속성이라는 면에서 ‘찬송’과 ‘찬양’으로 통일해야 합니다. ‘성가(대, 곡)’은 일본어의 번역으로 “찬양대”로 바꾸고, 찬양이야말로 성도의 임무이므로 봉사(사역)가 될 수 없으며, 지휘자 등이 받는 대가는 비성경적입니다. 기도 중에 ‘종님’, ‘집사님’ 등 사람을 높인다든지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이라거나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다’는 등의 표현은 부적절합니다. 기도를 인도하는 자를 ‘대표’로 칭하거나 “만인 제사장”임을 잊은 채 ‘평신도’라는 호칭도 삼가야 합니다. 기도를 마칠 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처럼 현재형 종결어미를 쓰고, 중보기도라는 말은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므로 불가하며, 모태신앙(태아에 태교로 영향을 미칠 따름)과 태신자(전도 대상자)라는 조어도 쓰면 안 됩니다, 유아세례는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니 지양해야 마땅하고, 비유처럼 쓰는 메카, 공염불, 신선놀음, 명당, 도깨비, 운수(운명), 액땜, 명복, 사주팔자, 터줏대감이라는 말도 버려야 합니다, 그 외 축복과 기복을 혼동하거나 하나님을 나에게 도전을 주시는 존재로 인식하면 잘못입니다. 죽은 자를 향해 추도예배를 드릴 수 없고, 직분을 부목사, 항존직 등으로 부르면 안 됩니다.
물향기수목원 연못에서 자라는 연꽃
성직자라는 낱말은 달란트에 따라 신의 섭리에 순종하는 각자의 소명이기에 기본적으로 직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사람 앞에 성(聖, St.)을 붙인다든지 갓(God)이나 신을 참칭하는 행위는 옳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사리분별력에 따른 종합판단, 교학상장의 자세를 갖춘 학습과 교육, 공동체운영과 인사 배치에 민감한 적재적소의 경영 능력과 책무(청렴결백, 근검절약, 납세의무, 준법정신, 세습금지, 문제의식-문제제기-분석비판-대안제시-솔선수범)를 다하는 영적 안내자여야 합니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가리켜 특별히 목회서신으로 분류하는 이유입니다. 사람이란 나보다 연약한 사람에게 교훈을 줄지언정 추앙을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Christianity)의 유형을 개신교(Protestantism), 천주교(Roman Catholic),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y), 성공회(Anglican Communion) 등으로 나누지만 다음과 같은 무리가 어떠한 뜻을 풍자적으로 담고 있는지는 깊이 상고해볼 대목입니다. 가령 그중 몇몇을 소환하면 사두개인은 의로운 자들이라면서도 부활을 믿지 않았고, 바리새인은 구별된 자들이라지만 우연과 운명을 믿었으며, 에세네파 하시딤은 경건한 자들이라면서 세상을 등진 채 살았습니다. 나아가 Christian이라는 호칭이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나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비아냥이었고, Puritan도 국교도들로부터 까탈스럽고 깨끗한 척한다는 이유로 청교도라고 불렸으며, Lutheran 역시 루터나 따라가는 놈들, Protestant는 16세기 루터, 츠빙글리, 칼뱅 등이 주도한 종교개혁으로 로마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와 성립된 종교 단체 및 그 교도, Methodist는 웨슬리의 홀리 클럽을 보고 죄수들이 너희는 규칙쟁이라고 조롱한 데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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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84호)에는 ‘기독교의 본질과 비본질 - 기독교의 현실 인식과 각성’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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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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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기독교의 본질과 비본질 ‘기독교의 본질적 구성 요소’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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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기독교의 본질적 진리는 무엇일까요? 기독교 신앙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기독교 신자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창조주, 역사의 주관자, 최후의 심판자라고 믿습니다. 실효적으로 성부는 인류구원의 기획을 맡고, 성자는 그 실행에 나섰으며, 성령은 적용을 통해 내주하신다는 부연이 가능합니다. 그만치 하나님의 속성을 자존하므로 전지전능하시고, 항존하므로 절대섭리하시며, 영존하므로 무소부재하시다는 설명마저 순전한 믿음이 없이는 선뜻 뇌리에 와 닿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이신 분이 셋일 수 있으며 셋인 분이 하나일 수 있느냐는 항변에는 대처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온 주장이 양태론으로써 이는 단일신론을 고수하며 삼신론, 종속론, 양자론에 힘을 싣기 위한 술책에 불과합니다. 언뜻 솔깃하지만 유일신이 형상을 달리하며 나타난다는 가설이기에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 신비한 영역의 절정은 예수의 성육신(成育身)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사람이 되어 지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당신은 아직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이는 명확히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요한복음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적시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이 삼위의 하나님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김은수가 정리한 ‘터의 창조’에 대한 육하원칙 중 5원칙을 제한적이나마 참고할 수 있겠습니다. 누가? 창조자 하나님(영원히 자존하시며 자충족적이시고, 전적으로 자유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자유하시며 무조건적인 주권적 의지(뜻)에 따라; 어떻게? 그의 말씀과 영(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무엇을? 존재하는 모든 것을 절대적인 ‘무로부터 창조’하심; 언제? 하나님께서는 과연 언제 창조하셨는가? 특별히 이 문제는 “태초에(בראשית)”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음; 어디서? 시공을 초월하신 하나님은 우주 밖에서 삼라만상을 지으셨습니다(필자 견해).
물향기수목원 연못에서 자라는 연꽃
S. 하우어 워스의 반문처럼 기독교를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손으로 만든 곳에 계실 수 없다는 말씀(사도행전 17:24)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의 온갖 종교적 현상은 날조요 참칭일 뿐입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은 초림의 예표이며 재림의 언약입니다. 이를 증명해준 결정적 단서가 바로 선악과입니다. 창조의 주체와 객체를 명시적으로 일러주심으로써 동산 한가운데 선악과는 덫이 아니라 축복의 장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첫째는 아담에게 에덴동산의 관리권을 위임하셨습니다. 둘째는 사람에게 온갖 부요를 허락하셨습니다. 셋째는 아무 노력도 없이 엄청난 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넷째는 최적화한 기온에서 삶을 누렸습니다. 이제 사람이라는 피조물은 자칫 자신이 신이라는 착각에 빠질지도 모르는 위험 상황에 직면한 참입니다. 반드시 선악과라는 신분 자각 장치를 두어 실시간 일깨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창조신앙의 요체는 영혼 구원입니다. 그것은 삼위의 하나님이 공동 사역하신 우주 창조의 시작, 전개,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계시적 내용을 마음으로 믿어 주님과 나와의 관계에 따른 행동 양태를 유지하는 데 달려있습니다. 광대무변한 우주가 바로 창조세계의 증거입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불가해한 속도에도 불구하고 방향감각이 그대로인 것은 강력+약력+중력+전자기력에 의한 섭리입니다. 과학, 수학, 언어 등의 법칙을 통한 학습은 창조론의 필연일지언정 인과론과도 배치되는 우연적 진화론에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초점이 창조신앙에 입각한 삶의 전반적 인식과 총체적 지각의 틀이 대인관계와 사물에 의식적으로 간여함은 물론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상태에 맞춰진 것입니다. A. 카이퍼가 규정한 대로 창조(form), 타락(deform), 회복(reform), 완성(transformation)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피조세계의 역사는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인류구원의 완성을 향해 다가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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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83호)에는 ‘기독교의 본질과 비본질 - 기독교의 비본질적 제 성분’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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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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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기독교의 본질과 비본질 ‘종교에 대한 일반적 개념화’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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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宗敎)에 대한 일반적 정의는 개별 학자의 주장과 견해에 따라 개념화한 산물입니다. 종교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절대자(초월자)의 힘(전지전능)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존재 목적)를 추구하는 문화(신념) 체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대표적 학자가 내세우는 세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수용적 관점에서 I. 칸트는 “종교는 지정의에 기반하여 실천을 유도함으로써 완전자의 의도에 부응하려는 것”, E. 프롬은 “종교란 자신의 가치가 실재에 뿌리 박고 있다는 확신에 의거하여 그 경험세계 안에서 인간이 믿고 행하고 느끼는 것”이라고 보았고, 다음 정서적 관점에서 F. 슐라이어마허는 “절대 의존의 감정”, W. 제임스는 “열성적 지지의 기질”로 보았으며, 끝으로 부정적 관점에서 S. 프로이트는 “종교는 인간의 나약함을 참을 수 있게 만들기 위한 필요성에서 생긴 것이지만 종교적 교리가 엄격하다고 해서 더 행복하거나 도덕적이지는 않음”, K.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므로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는 결국 없어져야 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종교의 3요소로는 신봉 대상, 교리, 신도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첫째, 신봉할 대상에는 일단 신(神)이나 신적 존재에 가까운 교주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천지신명이나 영험하다고 여기는 사물을 놓고 섬기는 양상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특이하게도 알라를 믿는 이슬람교의 경우는 신과 교주가 공존하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고래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섬기는 달신을 믿던 무함마드가 구약경전을 각색하여 개종(開宗)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회교를 국교로 받드는 국가들의 국기에 초승달을 그려 넣어 적십자기 대신 적신월기를 쓰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둘째, 해당 교리를 체계화한 경전이 필요합니다. 교리의 중심에는 내세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만 불교의 경우에는 극락과 지옥을 대비시키는 가운데 윤회사상을 도입하는 바람에 사후세계보다 전생이 부각된 측면이 강합니다. 셋째 구성원의 조직화를 꾀하지 않으면 지속성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내부 질서를 잡기 위한 필수적 장치인 동시에 최소한의 관리책이기도 합니다. 다만 조직체가 점점 비대해지면서 불필요한 계급화를 조장하거나 과다인력 운용상의 부작용을 초래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합니다.
물향기수목원 연못에서 자라는 연꽃
각종 종교의 난립과 방만한 운영은 필연적으로 종교 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를 불러왔습니다. 모든 종교 또는 종교형태(사이비 포함)에는 그 나름대로 영적 함의, 즉 현세를 추동하는 힘과 사후세계의 작동 원리가 있다는 태도나 주의 주장이 난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반작용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흐름에 부합하는 쪽으로 진행되었고, 일종의 제설혼합주의(syncretism)적인 경향을 띠고 말았습니다. 이는 종교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철학적 사유까지 파고들어 각기 다른 내용이나 전통을 지닌 여러 학파 또는 종파가 혼합되는 일들을 자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례가 세계교회협의회(WCC : World Council of Churches)라는 단체입니다. 애초에는 그래도 기독교로 분류되는 종파를 중심으로 결성하는 듯하더니 회차를 거듭할수록 그 명칭마저 무색할 만큼 온갖 잡동사니까지 끌어모으는 쪽으로 흘러가는 모양새입니다.
본격적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톺아보려는 마당에 서다니엘이 정리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WCC의 시발점은 1937.7.8.~10. 영국 웨스트필드(Westfield)대학에서 생활봉사(LW)위원회와 신앙직제(FO)위원회의 위원 35명이 모여 양대 기구의 통합을 결의하면서 출동합니다. 창립총회 개최 일자와 장소는 1948.8.22.~9.4.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었고,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으며, 미국 뉴욕, 예루살렘에 지역사무소를 두고 있습니다. 다신론 사상을 기조로 가톨릭, 개신교, 불교, 이슬람, 신도, 무속 등 모든 종교의 통합을 위하여 현재 110여 개국, 349개 교단, 5억 8천만 명의 신자(아프리카 28%, 유럽 23%, 아시아 21% 순)를 확보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한국에서 가입한 주요 교단을 보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가입교단들, 즉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순복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구세군대한본영, 대한성공회, 정교회한국대교구 등 총 6개 교단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WCC는 신구약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단지 전통의 산물로써 각자 신앙적 행위의 수단으로 여길 뿐입니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82호)에는 ‘기독교의 본질과 비본질 - 기독교의 본질적 구성 요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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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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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중앙아시아 기행 ‘우즈베키스탄 중심지를 걷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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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Uzbekistan, 남한 면적의 4.5배, 인구 3,700만, 1인당 GDP 3,600달러) 타슈켄트까지 항공기로 이동한 뒤 또다시 기차를 타고 요즘 한창 뜨고 있는 부하라로 향했다. 얼마 전 열차에서 테러가 발생한 이후로 탑승 전 검색은 까다로웠으나 실명제 예약에 따라 착석한 의자는 넓고 편했다. 얼룩진 차창에 비친 보잘것없는 풍경. 시든 풀밭에서 노니는 양 떼는 드물고 재배하는 작물 또한 생기가 부족했다. 간간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물상 가운데 실크로드를 떠올릴 만한 풍치를 찾을 수 없는 건 적잖이 아쉬운 대목. 이를테면 누군가의 지적처럼 대규모 뽕나무밭이라든지 비단을 생산하는 농공단지 같은 곳을 기대한 참일까. 겉으로 드러난 대지의 쓰임새는 앞서 방문한 두 나라와 대동소이. 국토가 넓은 만큼 놀리는 땅이 흔할뿐더러 농사법이 그리 체계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한가운데 마주한 좌석을 차지한 유럽 노인들은 다른 길손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큰소리로 웃고 떠들며 여행을 즐기고 있다. 이따금 지나가는 차내 판매원을 대하니 그 옛날 우리네 풍속화를 보는 거 같아 퍽 정겹게 다가왔다.
부하라(Bukhara, 인구 30만)는 고풍스런 옛 도시를 보는 듯했다. 현존 이슬람 건축물 중 최고라는데 높이 46m의 칼란 미나렛은 칭기즈칸의 명으로 건재하다는 사실(史實)에 방점을 찍으면서도 시멘트를 버무려 관광용으로 각색한 느낌은 지우기 어려웠다. 곧이어 들른 차슈마 아유프 묘만 해도 구약성경을 들먹이며 욥의 샘물을 제공했는데 신학을 전공한 필자로서는 사실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 그나마 18세기 아크르 왕이 살았던 커다란 성채를 둘러보며 전망대에서 고성의 정취를 느낀 게 작은 보상이랄까. 그걸 야경을 통해 되풀이한들 새로운 바는 없었으되 여러 차례 외침을 겪으며 붕괴와 복구를 거듭한 흔적에도 고고학적 가치를 보존한 성과는 치하할 만하다. 도시 속의 도시인 달과 별의 궁전이었다는 20세기 전후 여름별장 모히호사를 돌아볼 때는 1622년 나지르 지반베기에 의해 설립된 이슬람신학교 메드레세에 눈길이 갔고, 자랑 일색인 타일 문양이나 고대도시 중심에 자리 잡은 라비하우스 호수는 뇌리에 남은 바 없다. 그보다는 반구형 지붕 아래 북적이는 굼바스 노천시장이 현지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에 있는 레기스탄 야경
사마르칸트(Samarkand, 인구 60만)로 넘어가는 길. 오색 조명으로 치장한 레기스탄 광장은 무척 화려했다. 첫눈에 16세기 티무르제국의 도읍지를 정복했다는 우즈벡인들의 자부심이 느껴질 만큼 갈색 톤이 인상적이었다. 과거 알현할 때나 공공집회가 열렸던 장소로 동양의 건축미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눈앞 비비하눔이야말로 중앙아시아 모스크의 진수로 손꼽는다는 설명에 힘이 실리는 모양새. 그 배경에 15세기 티무르왕이 전사한 손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구르에미르 영묘가 자리하고 있다. 그다음 찾은 곳은 울르그벡 천문대. 저명한 학자의 반열에 올랐던 임금이 15세기 초에 이미 1년 365일의 비밀을 풀어냈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에 딸린 아프로시압 박물관의 전시물 역시 한때 동방의 로마로 불리던 영화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부하라에는 실크로드를 가로지르는 지역답게 군데군데 뽕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예전에는 낙타 등에 물건을 가득 실은 대상들로 붐볐을 테지만 가이드 말대로 아직도 시어머니가 며느리 운명을 옥죄고 흔든다면 이는 가정파괴를 일삼은 터여서 뒷맛이 씁쓸했다.
타슈켄트(Tashkent, 인구 290만)로 향하는 열차 안, 그런데 이번에는 이탈리아 여행객들로 인해 객실이 소란스러웠다. 여기서 잠시 오래전 기억을 소환하면 우리 부부는 그리스 탐방 경유지로 이곳을 오간 적이 있었다. 입국시 그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청사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으되 이내 시내로 접어들어서는 역사성을 갖춘 우즈벡인의 수도다운 면모를 읽기에 충분했다. 아무르 티무르 박물관만 해도 전시물은 미약하나 노점상들을 브로드웨이 젊은이 거리로 옮겨서 좋았고, 한자리에 가톨릭과 러시아정교회가 공존하는 모습도 이채로웠다. 무엇보다 필자의 취향을 저격한 건 도심을 산책하듯 주요 지점을 두루 구경한 것. 대지진 극복의 상징 기념물을 보고 맑은 하천 옆 소로를 거쳐 우거진 숲속을 거닐며 대통령궁 앞 보도를 걸은 경로 또한 맘에 들었다. 최대 재래시장(초르수 바자르)에 들렀다가 한껏 치장한 지하철에서 한글을 아는 소녀를 만나 얘기를 나눈 일이 가장 기뻤거니와 교민들이 발행하는 <한인일보>의 충실한 내용은 엄지척. 게다가 출국 수속 전 맛본 맛깔스런 깍두기는 좀체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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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81호)에는 ‘기독교의 본질과 비본질 - 종교에 대한 일반적 개념화’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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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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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중앙아시아 기행 ‘키르기스스탄은 자연보호 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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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스탄(Kyrgyzstan, 남한 면적의 2배, 인구 7백만, 1인당 GDP 2,700달러)으로 넘어가는 출입국관리소, 짧게 끝난 입국 절차는 다소 의외였다. 상대방 배려를 모르는 한 남정네로 인해 상한 기분을 추스르고 수도 비슈케크(Bishkek, 인구 110만)로 가는 차편에서 목격한 광경은 초장부터 파헤친 도로공사 현장. 엉망진창인 보행로를 따라 허름한 가옥들이 성글게 늘어서 있었다. 숙소로 가는 동안 차창 밖 풍경은 퍽 후진적. 그에 비해 호텔은 상당한 국제화를 이뤄 잠자리는 깨끗했고 음식도 먹을 만했다. 이튿날 일행이 향한 이름난 이식쿨(‘따뜻한 호수’라는 뜻). 한눈에 수평선이 있어 바다로 보암직한 호수였다. 표면적이 서울시의 9배에 달하는 데다가 정확한 둘레조차 모를 만큼 드넓은 염수호(염도 0.6%). 문제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돼 있는데도 근래에 호수 주변에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관광업 관련 시설물이다. 내륙에 갇힌 나라이다 보니 생겨난 어쩔 수 없는 추세라고는 해도 눈앞에 들어선 신시가지에서 보듯 당국의 치밀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점은 불문가지였다. 이들이 극구 자신하는 치안 상태처럼.
오전 일정 중간부터 비좁은 비포장도로임을 감안해 소형승합차로 갈아탄 뒤 접어든 농로는 나름 운치가 있었다. 이만하면 산천경개를 제대로 갖춘 곳. 가까이는 맑은 물이 흐르고 멀리는 만년설이 보이더니 이어진 산자락에 그림 같은 초원이 나타났다. 한마디로 몇 시간에 걸친 밋밋한 풍경화를 일거에 상쇄해버린 대반전. 목축업 비율이 70%라더니 양무리와 소들이 풀을 뜯었다. 거기 스묘나스코에 계곡에 정성껏 차린 점심상. 빵, 쌀밥, 양고기, 감자튀김, 사과 등으로 든든히 속을 달래고 이식쿨에 띄운 유람선에 올랐다. 정박해 있는 선박들을 보니 만만찮은 영업 규모. 하지만 그에 비례하는 수질 오염도는 어찌할 텐가. 코앞의 이익을 좇다가 세계 두 번째 산정호수의 청정가치를 해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일행과 공유했다. 뱃전에서 들은 가이드 설명 중 특이사항은 이 나라에 경비행기 숫자가 850대라는 것과 보쌈, 매매혼에 관한 얘기. 전자는 기간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고 빈부격차가 심해서라는 데 동의했으나, 후자는 원시 부족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어서 생뚱맞게 느껴졌다. 그것이 7개 교회의 사역은 아닐까.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에서 바라본 톈산산맥
솔직히 기대치에는 크게 못 미친 선상체험을 뒤로하고 들른 르호르도 종교관도 매한가지. 3/4이 무슬림인 나라에 1/5을 차지하는 러시아정교회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구촌에 존재하는 신앙 형태를 한 곳에 모아 놓고 관광상품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였으나 그에 걸맞은 콘텐츠가 없다 보니 유의미한 볼거리는 아니었다. 일단 대표적 종파만이라도 그럴싸한 회당을 짓고 경전을 총망라한 자료실이며 조각품 대신 박물관 등으로 구색을 갖추는 일이 시급했다. 그보다 눈길이 간 곳은 촐폰아타의 암각화 공원. 심각한 건 엄연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음에도 1,500여 암각화를 야외에 방치한 상태였다. BC 2,000~AD 8세기 사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필자 눈에는 지형상 천재지변에 의한 독특한 돌무더기로 보였다. 사람, 낙타, 산양. 말, 사슴. 눈표범 등이 새겨져 있고, 곳곳에 주거생활을 꾸렸던 흔적이 남아있는데, 임의로 돌들을 옮겨 주차장을 만들고 통행로를 내는가 하면 좀도둑까지 기승을 부린다는 전언이어서 말문이 막혔다. 듣자니 영국 옥스브리지 분교까지 둔 마당에 적절한 역할이 있었으면 한다.
먼길을 되돌아와 휴식을 취한 뒤 서둘러 고선지 루트를 따라 비슈케크로 향하는 길. 여전히 담장 안 살림집은 허술했고 너저분한 거리는 초라했다. 하지만 한참을 내달리다 만난 들판은 어느새 낯빛을 바꿨다. 그야말로 일대 변신, 선명한 풀밭이 이어지더니 철길을 따라 강폭 가득 물길이 출렁였다. 바로 톈산산맥을 지탱해온 설봉들이 바로 대지와 연결돼있어 꿀, 꼬냑, 치즈가 세계적이란다. 간간이 스치는 트럭 말고는 변화무쌍한 봉우리가 전부.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커다란 덩치의 산들이 끊이지 않더니 코카서스를 빼닮은 풍광이 눈동자를 메우기 시작했다. 차이라면 단지 줄지어 서 있는 포플러 행렬뿐, 산자락에는 나무 한 그루는커녕 중턱을 덮은 옅은 풀빛마저 찾을 수 없는 산세에 연신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내달려온 끝에 비슈케크 중앙관청이 모여 있는 알라토 광장에서 레닌을 조우한 건 뜻밖이었다. 해설자에 따르면 옛 소련 위성국에 단 하나 건재한 동상. 그래선지 어설픈 교대식보다는 전사자 기념탑에 눈길이 갔다. 고마운 이는 키르기스스탄에 정착한 박성림 씨, 이분은 성실한 직업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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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80호)에는 ‘중앙아시아 기행 - 우즈베키스탄 중심지를 걷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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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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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중앙아시아 기행 ‘카자흐스탄에서 받은 인상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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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카자흐스탄(Kazakhstan, 남한 면적의 27배, 인구 2천만, 1인당 GDP 14,500달러)이란 나라에 대해 궁금해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두루 돌아본 발칸반도에 이어 코카서스를 돌고 나니 그렇다면 내친김에 실크로드를 가로지르는 이른바 ‘~스탄’(~의 땅)이 붙은 국가들에 관해서도 점차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밤하늘 기창에서 굽어본 알마티 시가지. 카자흐 민족의 땅에 안착한 일행이 찾은 호텔은 수준급이었고, 네 시간의 시차로 인해 새벽녘 단잠을 설치긴 했어도 아침 식사는 비교적 괜찮았다. 다만 현지 가이드를 왕초보에게 맡기는 바람에 어설픈 토막해설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보조 가이드를 하다가 하필이면 이번부터 인솔책임을 떠맡는 통에 기본기 자체가 태부족한 상태. 자신을 자국어(러시아어, 카자흐어 겸용)와 한국어를 비교 연구하려는 언어학자라고 소개하여 몇 가지 물어보니 이제 막 학부를 졸업했다기에 어문학 교육자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아연실색한 사실은 여태껏 시간이 없어 K-드라마 한 편 본 적이 없다니 이를 정녕 문화 차이로 돌릴 수 있으랴.
출근 차량을 피해 알마티(Almaty, 인구 약 200만) 시내를 벗어나면서 보니 이렇다 할만한 건물은 눈에 띄지 않고 요로에 도로확장이 한창이어서 주위는 산만한 느낌이었다. 명색이 한 나라의 특별시로 지정된 데다가 1925~1994년까지 70년간 수도였으면 나름 위세를 갖추었겠거니 했던 기대는 이튿날 이곳을 떠날 때에서야 부분적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차창에 비친 풍경은 그간 들은 바대로 생기를 잃은 모양새의 연속. 주택가는 특유의 형태미를 찾기 어려웠고 도시계획 전반이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인상을 못내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농촌의 풍광은 나은가. 흐릿한 산야에서 보듯이 턱없이 부족한 강수량 탓이겠으나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작물들이 싱싱할 리 만무했거니와 방치한 토지라고 해서 자연보호가 잘 되어있지도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간간이 보이는 흙탕물 줄기. 저 물속에는 농사에 알맞은 각종 양분이 녹아있으렷다. 이들이 읊어온 시들은 김소월의 서정성을 빼닮았다는데 러시아 지배 시절부터 사과의 도시라고 불리던 산지 과일마저 왜 이다지 푸석푸석한지 갈수록 의문이 드는 대목이었다.
카자흐스탄의 자랑인 톈산 침블락 설산 중턱
알마티에서 세 시간 만에 도착한 차린계곡. 이들은 여기를 카자흐스탄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 부른단다. 그러나 협곡(canyon) 형태의 특이지형을 본 적이 없다면 모를까 이런 걸 두고 천하의 그랜드캐니언과 비교한 건 그야말로 한도를 넘는 표현(over)에 속한다. 차라리 특징 없는 밋밋한 풀밭일망정 제법 굵은 띠를 이루며 자라난 관상용 양귀비 군락이 필자 눈에는 훨씬 강렬했다. 다만 어느 여행자가 남긴 후기에서처럼 한 시간여를 직접 걸어가면서 그 옛날 지각이나 지층의 변화상을 생생히 목도한 바는 큰 소득. 흙먼지 흩날리는 좁다란 길목에서 어찌 보면 일부에서 튀르키예 카파도키아를 떠올리게도 했지만, 한편으론 광야 한가운데 서 있는 떨기나무류 앙상한 가지에 꽃망울들이 맺힌 모습이어서 쉬이 접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 길목에서 낯선 이들과 어울려 땀 흘린 트래킹은 분명 태곳적 어느 시점에 머문 느낌이었다고 회상할 듯하다. 이윽고 반환점에 다다라 메마른 협곡을 적시는 강물에 손을 씻은 뒤 멀리 설산을 배경 삼아 소중한 추억을 남기고 소형트럭에 올라탈 때까지 잠시 가진 휴식은 꿀맛이었다.
이식박물관에 전시한 유물은 극히 소박했다. 역사를 온전히 보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으나 선조들의 희미한 흔적을 조금이라도 건진 건 카자흐 민족의 마지막 자존심이리라. 막간을 이용해 질뇨니(녹색시장이란 뜻) 바자르에 들러 고려인들의 먹거리를 살펴본 뒤, 판필로바 28인을 기리는 공원 내에 설치된 세계 제2차대전의 승전 기념비를 거쳐 러시아정교회인 젠코바 성당관람은 의미가 있었다. 그 목조건물 경내에 피어난 작은 꽃송이만큼 정갈한 외관을 뒤로하고 곧바로 올라간 곳은 카자흐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텐산산맥의 중턱. 일자리 창출인 듯 일행을 택시에 태우고 1,100m까지 가더니 거기서부터 케이블카로 갈아타고 2,600m에서 내려 다시 해발 3,200m 산자락에 올라서니 침블락 스키장이었다. 경관이 가히 스위스 버금간다는데 고산증은 없었고 아직도 만년설에 덮인 나라여서 사방으로 설산이 보였다. 인파로 붐비는 걸 보면 명실공히 카자흐스탄 제일 관광지임이 틀림없거니와, 오르내리는 동안 심하게 긁힌 창문에도 불구하고 이만치 선명한 사진을 남긴 적은 일찍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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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79호)에는 ‘중앙아시아 기행 - 키르기스스탄은 자연보호 중’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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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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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욥기」의 주제의식 ‘욥의 회개와 전화위복’ (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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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소리를 내겠느냐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욥 40:8-10)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욥은,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욥 40:4-5)라고 토설하며,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욥 40:11-12)라는 말씀 앞에 자복하며 무너지고 만다.
그런데도 여호와의 다짐은 집요했다. 잇달은 문답에도 불구하고,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너는 밧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그것이 어찌 네게 계속하여 간청하겠느냐 부드럽게 네게 말하겠느냐 어찌 그것이 너와 계약을 맺고 너는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 어찌 장사꾼들이 그것을 놓고 거래하겠으며 상인들이 그것을 나누어 가지겠느냐 네가 능히 많은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을 그 머리에 꽂을 수 있겠느냐”(욥 41:1-4; 6-7)라는 속사포에 가까운 질문을 쏟아내시며, 그것과 싸우겠다는 생각 자체가 헛된 희망이라고 기를 꺾어버린 터였다(욥 41:8-9). 여기서 우리는 익히 시가서로 분류하는 욥기의 갈래가 극문학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답은 자명하다. 신정론(神正論)에 입각하여,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 41:11)라는 대전제에 이미 정답은 정해졌다. 다소 장황하게 기록된 사탄의 정체는 명확하다. 해당 구절을 차례로 살펴보니, “네 손을 그것에게 얹어 보라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하리라 참으로 잡으려는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니라 그것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는 기가 꺾이리라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만큼 담대하지 못하거든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내가 그것의 지체와 그것의 큰 용맹과 늠름한 체구에 대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리라”(욥 41:8-12)라는 말씀에서 공포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락산과 덕암산 아랫마을에 피어난 꽃무리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빛을 발하고 그것의 눈은 새벽의 눈꺼풀 빛 같으며 그것의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꽃이 튀어 나오며 그것의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마치 갈대를 태울 때에 솥이 끓는 것과 같구나 그의 입김은 숯불을 지피며 그의 입은 불길을 뿜는구나 그것의 힘은 그의 목덜미에 있으니 그 앞에서는 절망만 감돌 뿐이구나”(욥 41:18-22)라는 말씀에 더해, “칼이 그에게 꽂혀도 소용이 없고 창이나 투창이나 화살촉도 꽂히지 못하는구나 그것이 쇠를 지푸라기 같이, 놋을 썩은 나무같이 여기니 화살이라도 그것을 물리치지 못하겠고 물맷돌도 그것에게는 겨 같이 되는구나”(욥 41:26-28)라는 경각심도 모자라, “깊은 물을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를 기름병 같이 다루는도다 그것의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 그는 깊은 바다를 백발로 만드는구나”(욥 41:31-32)라고 알려주시면서,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욥 41:33-34)라는 선언이 그것이다.
욥기의 주제의식을 파고든 결론은 성경에서 언급한 의인은 상대적일 뿐이어서(롬 3:10),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6)라는 고백을 통해 누구든지 통회하지 않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최후통첩이다. 창조주의 절대 주권 앞에서,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2-3; 5)라는 깨달음을 얻었기에 욥이 옳았음을 인정받았고(욥 42:7-8), 세 친구는 욥에게 행한 범죄로 인해 번제를 드림으로써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으며(욥 42:9), 그들을 위해 욥이 기도할 때 그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이전보다 갑절이나 축복하신(욥 42:10) 현장을 생생히 확인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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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78호)에는 ‘중앙아시아 기행 - 카자흐스탄에서 받은 인상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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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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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욥기」의 주제의식 ‘신묘막측한 창조 사역’ (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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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후는 내친김에 욥에게,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 그 소리를 천하에 펼치시며 번갯불을 땅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그의 위엄에 찬 소리로 천둥을 치시며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 빛을 멈추게 아니하시느니라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비도 내리게 명하시느니라 폭풍우는 그 밀실에서 나오고 추위는 북풍을 타고 오느니라 하나님의 입김이 얼음을 얼게 하고 물의 너비를 줄어들게 하느니라”(37:2-4; 6; 9-10)라는 창조세계의 오묘함을 전한다. 창조주께서는 우주의 모든 생명체에게 명령하시는 분이시니 욥은 이것을 귀담아듣고 조용히 하나님의 오묘한 사역을 깨달으라(욥 37:12; 14)고 변증한 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욥에게는 서른 가지가 넘는 질문지에 대한 응답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곧 “하나님이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로 번쩍거리게 하시는 것을 그대가 아느냐”(욥 37:15)라는 말씀을 필두로, “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 땅이 고요할 때에 남풍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그대가 아느냐 그대는 그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 녹여 부어 만든 거울같이 단단하게 할 수 있겠느냐”(욥 37:16-18)라는 말씀으로 숨 가쁘게 이어진다. 이를 통해 보면 창조 사역에 대한 기록물에 이처럼 신비로운 수사가 또 있을까 싶다.
놀라운 일은 여호와께서 친히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 욥에게 물으셨다는 점이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욥 38:4-6; 8)라고 말을 거시며,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욥 38:9-11)라고 직접 알려주신 것이다.
부락산과 덕암산 아랫마을에 피어난 꽃무리
아울러 캐묻기를,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욥 38:12-13)라는 말씀에 이어,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어느 것이 광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어느 것이 흑암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욥 38:16-19)라는 물음과 더불어,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환난 때와 교전과 전쟁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남겨 두었노라”(욥 38:22-23)라는 문답으로 이어진다.
창조주의 무대는 응당 우주를 가리킨다. 그러기에 거푸, “광명이 어느 길로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땅에 흩어지느냐 누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었으며 우레와 번개 길을 내어 주었느냐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비에게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 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네가 목소리를 구름에까지 높여 넘치는 물이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번개가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욥 38:24-25; 27-29; 31-35)라고 아주 길게 질의하신다.
이윽고 하나님은 욥을 바라보시며,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 누가 지혜로 구름의 수를 세겠느냐 누가 하늘의 물주머니를 기울이겠느냐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욥 38:36-38)라고 금수를 아우르시며, “내가 들을 그것의 집으로, 소금땅을 그것이 사는 처소로 삼았느니라”(욥 39:6)라고 말씀하셨고,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이제 소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욥 39:19; 40:15)라고 다시 한번 욥의 본분을 일깨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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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77호)에는 ‘「욥기」의 주제의식 - 욥의 회개와 전화위복’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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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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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욥기」의 주제의식 ‘설전을 잠재운 엘리후’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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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였다(욥 32:2). 그는 네 사람의 말잔치를 잠재우려고 나타난 지혜자였는데, 그가 분노를 표출(욥 32:2-3)한 것은, 욥은 시종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세 친구는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 욥을 정죄했기 때문이다(욥 32:2-3). 나이가 적은 엘리후의 일성은,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욥 32:6-9)라는 전제하에 당신들의 슬기와 말에 귀를 기울였으니 자신의 의견을 들으라는 훈시였다(욥 32:10-11).
설령 사태의 진상을 파악했다손 치더라도 그를 추궁할 자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라는 일갈이었다(욥 32:13). 게다가 상대가 자기 이론을 제기하지 않는 한 나 또한 당신들의 이론으로 욥에게 대답하지 않겠다는 단서까지 달으니 그들이 놀라 반박하지 못했다는 것이 성경의 기록이다(욥 32:13-15). 더는 기다리지 않겠다던 엘리후는, “나는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욥 32:17-18)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만약 사람의 낯을 고려하고 아첨하듯 피조물에게 영광을 돌렸다가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서술로 마무리를 짓는다(욥 32:21-22).
엘리후의 말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므로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즉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는 그대를 누르지 못한다(욥 33:4; 6-7)는 말이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욥 33:13)라는 질문과 함께, “이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의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욥 33:17-18)라는 계시를 통해 욥이 잃어버린 자녀들의 행방까지 알려주신다.
부락산과 덕암산 아랫마을에 피어난 꽃무리
제아무리 “우리가 정의를 가려내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욥 34:4)라고 한들,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욥 34:5; 9)라고 질책하신다면,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욥 34:12)라는 말씀에 답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아니하시며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의 낯을 세워주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라”(욥 34:19)라고 규정하셨고,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욥 34:23)라는 점을 분명히 하시면서 사람의 행위에 따라 공의롭게 심판하신다는 선언이었다(욥 34:11-12; 25).
그러니 나름 유식한 척 말솜씨를 뽐내던 세 친구는 물론 최대한 절제력을 발휘한 욥마저 무지의 소치를 노출한 참이다(욥 34:35). 결정적으로 엘리후는 욥을 향해,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욥 35:7)라고 추궁하니, “그들이 악인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부르짖으나 대답하는 자가 없음은 헛된 것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욥 35:12-13)라는 말씀 가운데, “그러나 지금은 그가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악행을 끝까지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욥 35:15-16)라는 죄인의 속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셈이다.
엘리후의 사자후는, “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그대에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욥 36:2)라는 말씀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는 이어, “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의 일을 찬송하였느니라”(욥 36:24)라는 말씀에 걸맞게, “그가 물방울을 가늘게 하시며 빗방울이 증발하여 안개가 되게 하시도다 보라 그가 번갯불을 자기의 사면에 펼치시며 바다 밑까지 비치시고 그가 번갯불을 손바닥 안에 넣으시고 그가 번갯불을 명령하사 과녁을 치시도다 그의 우레가 다가오는 풍우를 알려 주니 가축들도 그 다가옴을 아느니라”(욥 36:27; 30; 32-33)라는 창조주의 섭리로 매듭을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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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76호)에는 ‘「욥기」의 주제의식 - 신묘막측한 창조 사역’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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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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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욥기」의 주제의식 ‘의롭지 아니한 말다툼’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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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세 치 혀는 이후에도 날카로운 공방을 벌인다. 욥이 소발에게,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누가 능히 그의 면전에서 그의 길을 알려 주며 누가 그의 소행을 보응하랴”(욥 21:15; 31)라고 반격을 가하자, 엘리바스는 이를 받아,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욥 22:2; 5)라는 말로 결정타를 날린다.
이에 질세라 욥은,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욥 23:3; 6)라고 하지만 그도 사람이기에 또다시,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욥 24:1)라는 읍소에 이어,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7-10)라고 담담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빌닷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욥 25:4; 6)라는 말에 대해 욥은 화제를 바꿔,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는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욥 26:7-10)라고 창조세계의 비밀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 뒤 욥의 현란한 입술은 풍자적으로,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욥 27: 5-6)라는 최상의 비유를 든다.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욥 28:14)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며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 그때에 그가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탐구하셨고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 28:23-28)라는 창조 사역의 섭리로 귀결된다.
▲ 부락산과 덕암산 아랫마을에 피어난 꽃무리
말씀의 진수를 깨닫고 난 뒤 욥의 직유는,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 그 때에는 전능자가 아직도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나의 젊은이들이 나를 둘러 있었으며 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욥29:2; 5; 14)라는 축복의 회고담이었다. 그에 따라, “이제는 그들이 나를 노래로 조롱하며 내가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며 그들이 나를 미워하여 멀리하고 서슴지 않고 내 얼굴에 침을 뱉는도다”(욥 30:9-10)라는 멸시를 감내하면서,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욥 30:21; 23)라는 깊이의 깨달음을 얻는다.
이제 욥에게 남은 소망은,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내가 언제 다른 사람처럼 내 악행을 숨긴 일이 있거나 나의 죄악을 나의 품에 감추었으며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욥 31: 6; 33; 23)라는 간구로 옮겨간다. 급기야 욥의 포효는, “만일 내 밭이 나를 향하여 부르짖고 밭이랑이 함께 울었다면 만일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출을 먹고 그 소유주가 생명을 잃게 하였다면 밀 대신에 가시나무가 나고 보리 대신에 독보리가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욥 31:38-40)라는 진술을 쏟아내고서야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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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75호)에는 ‘「욥기」의 주제의식 - 설전을 잠재운 엘리후’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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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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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욥기」의 주제의식 ‘욥이 맞대응한 장면들’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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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친구의 전방위적인 공격 일변도에 욥은 일단,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욥 6:2-3),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라는 말로 자신을 돌아보면서도,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욥 6:4),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욥 6:8)라고 하며 한결 다소곳해진다.
그러니 울부짖는 욥의,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욥 9:17)라는 말이나,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욥 9:23)라는 절규를 접해도,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욥 9:21)라는 원망으로 이어져,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욥 10:2-3)라는 항의성 반문이 이해가 간다.
따라서,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욥 10:8-9; 18)라는 항변이 가슴에 와 닿거니와,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욥 6:24-25)라는 말대꾸나,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넘기는구나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욥 6:27-28)라는 원망과 다짐을 한낱 일개인의 의(욥 6:29-30)에 불과하다며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 부락산과 덕암산 아랫마을에 피어난 꽃무리
하지만 욥은 곧바로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욥 6:10)라고 바짝 엎드리며, “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욥 6:11)라는 말로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욥 7:5),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욥 7:16)라는 절망과 절규를 접하며 다수는 욥이 짊어진 질고를 얼마큼 이해할 수 있을지 여전히 미지수일 뿐이다.
그 와중에 그는,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욥 12:2)라고 반박하며,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원이니라”(욥 13: 2-4)라는 말로 이어진다. 그는 작정한 듯,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욥 13:23-24), “그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욥 14:5),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욥 14:15)라고 항거하기에 이른다.
욥은 비장한 어조로,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욥 16:3; 10)라는 대꾸에 이어, “우리가 흙 속에서 쉴 때에는 희망이 스올의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욥 17:16)라는 말로 맞받지만,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욥 19:17),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욥 19:13)라고 되뇌며,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5)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74호)에는 ‘「욥기」의 주제의식 - 의롭지 아니한 말다툼’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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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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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욥기」의 주제의식 ‘욥이란 인간의 정체성’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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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에 따르면, 욥이라는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서(욥 1:1),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였다(욥 1:3). 7남 3녀의 자녀를 둔 그는(욥 1:2) 자신의 생일잔치를 베풀 때면 혹시 자식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았을까를 염려하여 아침에 일어나면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림으로써 늘 성결 의식을 거르는 법이 없을 정도였다(욥 1:4-5).
이러한 욥에게 어느 날 갑자기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폭풍처럼 몰아닥친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욥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는 단서를 달아 시험을 허락하신 것이다. 땅에 넘치도록 부어주신 모든 소유물을 쳐도 좋다는 승인이었다(욥 1:12). 상상하기 힘든 청천벽력 같은 사태가 연달아 일어났다. 그 첫째는 소가 밭을 갈고 나귀가 풀을 뜯을 때 스바 사람이 느닷없이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다는 알림이었다(욥 1:14-15). 더구나 홀로 피한 사환이 주인께 아뢰는 사이에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과 종들을 살라버린(욥 1:16) 사건에 이어,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낙타를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다(욥 1:17)는 참극과 함께 거친 들에서 큰바람이 불어와 집 네 모퉁이가 무너져 그 청년들이 죽고 말았다(욥 1:19)는 비보의 연속이었다.
일련의 비극은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 일어났다(욥 1:13; 18). 그러나 진정한 신앙심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반응하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모든 것에 범죄하지 않았다(욥 1:20-22). 이러한 사태 앞에서 곧바로 창조주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피조물의 본분을 자각하는 성도가 오늘날 얼마나 있을지를 겸허히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여호와께서는 이어 땅을 두루 돌아 다녀온 사탄에게 욥을 칭찬하시며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는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지 않았느냐고 반문하신다(욥 2:2-3). 하지만 사탄의 공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사탄은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시면 틀림없이 주님을 욕할 거라고 장담한다(욥 2:5). 이에 여호와께서는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라는 단서를 달아 욥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도록 해도 좋다고 허락하신다(욥 2:6-7).
▲ 부락산과 덕암산 아랫마을에 피어난 꽃무리
이것이 앞으로 욥이 당하게 되는 본격적인 고통의 서막이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8-9)라는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두 가지를 동시에 들여다보게 된다. 하나는 욥의 아내가 그간 남편의 존재를 어떻게 여기며 살아왔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고작 저주의 대상쯤으로 믿어왔는가이다.
타락 이후에 사람이란 존재가 제아무리 연약할지라도 고초를 겪는 배우자는 물론 감히 하나님을 향해서까지 막말을 쏟아내는 행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국면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대목은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도 욥의 신실함에는 하등 변함이 없었다는 점이다. 참을 수 없는 아내의 말을 듣고서도 욥은 한 어리석은 여인의 말로 치부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도 받지 않겠느냐며 자칫 범하기 쉬운 말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것이다(욥 2:10).
사실 성경에서 사람을 칭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욥 이외의 사례를 톺아보면, 요셉을 가리켜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3)라고 하셨고, 노아를 일컬어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라고 하셨으며, 모세를 두고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라고 하신 데 이어, 다윗을 보고는 신구약에 걸쳐 내 마음에 합한 자(삼상 13:14, 행 13:22)라고 하신 뒤로, 신약시대에 와서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인 이방 여인(막 7:26)을 향하여 단 한 번,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라고 하신 말씀밖에는 찾을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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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72호)에는 ‘「욥기」의 주제의식 - 세 친구의 가증스러움’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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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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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욥기」의 주제의식 ‘세 친구의 가증스러움’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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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말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한 그때 그의 세 친구,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그를 위로하려고 날을 잡아 먼길을 달려 와보니(욥 2:11) 눈을 뜨고 쳐다볼 수 만큼 상황은 끔찍했다.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욥 2:12-13)라고 반응한 데까지는 인지상정이었으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말로는 이루 형용하기 어려운 괴로움에 지친 욥이 먼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며 태를 여신 하나님으로부터 어머니의 자궁을 들먹이고 빛을 주신 하나님까지 소환하면서(욥 3:1-24),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욥 3:25-26)라는 장탄식을 늘어놓는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욥이 다소 수세적인 자세를 취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세 친구들의 입에서는 그간 그의 위세에 밀려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놓는다.
이때를 놓칠세라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맨 먼저 포문을 연다. 네가 싫증을 내면 나 역시 참지 않겠다(욥 4:2)는 말을 시작으로 이전에 너는 여러 사람을 훈계하더니 이제는 어찌 스스로 유약한 모습을 보이느냐며 초장부터 질타를 가한다(욥 4:3-5). 가혹한 채찍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리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온전한 소망을 노래하더니 죄 없이 망한 자가 어디 있느냐고 추궁한다(욥 4:6-7). 심지어 악독을 뿌린 자는 창조주의 콧김에 사라질 것인즉 사람이 어찌 여호와 하나님보다 의롭고 깨끗할 수 있느냐고 닦아세운다(욥 4:8-9; 17).
엘리바스의 공격은 이미 친구로서의 금도를 넘고 있었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욥 5:8)라는 말에서는 충고를 넘어 비아냥마저 감지된다. 게다가 “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욥 5:12)라는 막말도 모자라,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욥 5:17)라는 훈계에 이어,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욥 5:27)라는 직격탄으로 첫 심문을 마친다.
▲ 부락산과 덕암산 아랫마을에 피어난 꽃무리
욥의 대꾸도 만만치 않았으나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이어진 수아 사람 빌닷의 뼈아픈 충고를 들어보면,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욥 8:3-6)라고 염장을 지른 데 이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라는 주제 파악조차 안 된 언사로 덧난 상처에 소금을 뿌린다.
나아마 사람 소발의 정죄도 앞의 두 친구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는 점잖게,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욥 11:2)라는 입바른 말로 양비론을 들고나오며,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욥 11:4)라는 말이거늘,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욥 11:5-6)라고 정곡을 찌른다.
이후 내용은 더욱 가관이다. 엘리바스는 욥을 향해, “네 영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이는 그의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에게 힘을 과시하였음이니라”(욥 15:13-14; 25)라고 했고, 빌닷 또한 이에 질세라,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욥 18:5; 21)라고 했으며, 소발은 한술 더 떠,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그의 가산이 떠나가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욥 20:15, 28)라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저주를 퍼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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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73호)에는 ‘「욥기」의 주제의식 - 욥이 맞대응한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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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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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모로코를 만나다 ‘휴양도시 카사블랑카를 걷다’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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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집이라는 뜻의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제1의 도시답게 인구 380만이 상주하는 상업의 중심지. 시청과 법원 등이 도열한 관공서 구역에 상업은행 본점이 있었다. 유럽의 영향을 받은 듯 상당히 정교한 가로에 야자수 행렬이 볼 만했다. 바다가 지척이어서 여전히 갯바람은 거칠었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영화로 인해 한껏 유명세를 탄 이후 유럽인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로 탈바꿈한 보도를 어딘가 이방인인 듯한 사람들이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 영화의 배경처럼 비록 어수선하지는 않았지만 지상에서 가장 높다는 하산 메스키타 모스크를 빼면 선뜻 구미를 당기는 건 없었다. 1956년에야 비로소 프랑스와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왕국으로 자리매김한 뒤부터 여러 차례 반전을 시도했으나 인구의 절반을 넘는 문맹률에 갇혀 여태껏 답보 상태를 거듭하고 있단다. 아닌 게 아니라 곳곳에 쓰레기가 방치되어 있고, 매끄럽지 못한 노상에는 비둘기 똥이 지천이다. 그중에 유독 눈에 들어오는 상호는 사하라 투어(SAHARA TOUR). 그밖에 몇 군데 영문자가 눈에 띄었지만 보면 볼수록 아랍어 생김새는 알아보기가 어렵다.
그때였다. 반가운 문자가 코앞에 나타났다. 알파벳으로 적은 ‘HYUNDAI’, 새삼스레 강조하건대 외화를 벌어들이는 기업이 애국자다. 식민지 시절 건설한 프랑스식 성당이 10개에 달한다는데 쉬이 발견할 수는 없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8시경, 출근행렬로 인해 병목현상이 빚어졌다. 재밌는 건 건물들이 죄다 네모난 모양새. 차 안에 흐르는 페리귄트의 조곡을 뒤로하고 부슬비를 맞으며 항구로 내닫는 가운데 사고현장을 보았다. 물길을 겸한 중간분리대에 대중버스가 뒤집혀 있었다. 이상한 광경은 그 주위를 빼곡히 에워싼 구경꾼들. 호기심에 흘끔흘끔 쳐다보는 거야 이해하겠으나 아예 차들을 세워놓고 일삼아 즐기는 문화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고맙게도 개중에는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이들도 보였다. 응당 그들에 의해 체증이 생긴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련만 그 북새통을 놓칠세라 호객꾼들이 판을 쳤다. 바람직한 건 이네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엔지니어, 특히 토목 분야가 으뜸이란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의식의 흐름은 훨씬 나은 터다. 우리처럼 마냥 화이트칼라를 지망하는 풍조만은 지양해야 마땅하리라.
▲ 유럽인들이 즐겨 찾는 카사블랑카 거리 모습
그걸 뒷받침하듯 저만치 밭에서 진흙탕 놀이에 푹 빠진 아이들이 보였다. 어린 나이부터 학원으로 내몰리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광경. 저렇게 열심히 노는 게 아이들의 일이거늘 한국은 어쩌다가 선행학습의 장으로 전락했는지 모를 일이다. 차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사이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다. 점심은 교포 할머니가 싸주신 도시락. 양배추김치에 오이장아찌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혀끝에 생생하다.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일이 이토록 많은 길손들에게 즐거움을 줄 줄을 미처 모르셨단다. 빵에 물린 위장이 어머니의 손맛을 보다니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부디 건강하게 오래 사셔서 모로코를 찾는 동포들에게 고향의 참맛을 선사하길 빌었다. 자동차는 어제 들렀던 라바트를 경유해 어느덧 바닷가를 달리고 있었다. 내륙으로 뻗은 평원에 갈색과 회색의 풀들이 나풀거린다. 내친김에 두 시간을 채웠으니 어김없이 휴게소에 머물 시각. 저만치 유칼립투스가 자라는 곳은 과연 옥토일까, 박토일까? 나지막한 비닐하우스 사이에 간간이 뵈는 원두막은 비에 젖어 후줄근했고, 땅 기운은 습할 대로 습했다. 그렇게 얼마큼을 더 가니 이정표에 지브롤터(Gibraltar)라고 씌어있었다.
그때 가이드는 일행을 향해 기도를 부탁했다. 풍랑이 심할 경우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진다는 전언. 안전상 문제로 인해 웬만한 파고에도 페리를 띄우지 않은 채 지체되었던 실례가 있었단다. 만일 큰 배를 이용해 멀리 돌아갈 경우 자그마치 네 시간씩이나 걸린다니 말이다. 더 큰 문제는 별도의 추가 요금 부담은 물론 좌석이 찰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것. 다행히 약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출발. 잔잔한 풍랑이 일행을 도왔다. 게다가 떠날 때는 어린이 두 명이 엔진 부위 빈 공간에 숨어 있다가 발각된 것 말고는 별다른 제재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장난을 쳐도 그들이 받는 제재는 훈방조치가 고작. 아내는 애써 뱃멀미를 무찌를 셈인지 셋이서 짝을 이뤄 대화에 열중이었다. 문득 둘째 날에 나와 동갑내기가 자신의 아내를 향해 사용한 표현이 떠올랐다. ‘내 인생의 동반자이자 가장 좋은 친구’라는 멘트가 좌중의 심금을 울렸다. 아무렴, 왜 아니 그러하랴. 저마다 흐뭇한 표정을 짓는 사이 어느덧 다시금 찾은 타리파 항구가 지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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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71호)에는 ‘「욥기」의 주제의식 - 욥이란 인간의 정체성’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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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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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모로코를 만나다 ‘라바트의 하산탑을 올려보다’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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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인구가 200여만 명에 이르는 라바트(아랍어로 ‘교외’라는 뜻)로 접어드는 길은 때마침 귀경행렬로 가득했다. 몹시 막힐 걸 예측한 가이드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거라며 추억의 흑백영화 ‘카사블랑카’를 틀었다. 하지만 깨알 같은 자막을 읽어내느라 신경을 곤두세웠는지 잠깐 선잠이 들었나 보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화들짝 놀랄 만한 광경이 차창을 메웠다. 고속도로상에 쌩쌩 달리는 자전거 행렬이라니! 제아무리 문화적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독한 교통체증을 감안하면 너무 생소한 장면이랄까. 게다가 안전을 담보할 만큼 지키는 통행규칙은 고사하고 사고위험에 대한 기초적 개념조차 없는 것처럼 보여 더 의아했다. 하지만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현지 가이드의 설명. 게다가 연휴를 즐기고 떠난 자리에는 어김없이 휴짓조각이 널브러져 지저분하단다. 그런 무질서에 신물이 났는지 넓은 가로에 가지런한 보도를 보는 순간 색다른 느낌. 여러 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조폐창을 지나니 드디어 라바트 시가지였다. 이어 이른바 대왕대비가 손자에게 선물했다는 왕실 전용 승마장과 함께 왕궁이 나타났다.
그러나 막상 도심지를 둘러싼 기다란 담벼락 외에는 별반 볼거리는 없었다. 왕궁의 전체 둘레나 규모는 철저히 비밀인 만큼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마저 수풀에 가려져 아예 볼 수조차 없었으나 그 이상 호기심도 발동하진 않았다. 현지어로 오레그렉 강변을 따라 왕릉 쪽으로 조깅 코스를 조성한 풍경은 그런대로 수준급. 우리나라 대사관저를 지나쳐 돌아본 하산탑(Hassan Tower)은 44m의 높이에 기둥이 354개에 이를 만치 어마어마한 규모란다. 사원의 외부를 포함하면 총 10만 명을 수용하는 거대규모라면 가뜩이나 어려운 재정에 얼마큼 무리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들이 한껏 조아리며 알라신에게 무릎을 꿇는 그 시각에 맞춘 듯 일행을 맞이한 참이다. 바로 거기서 막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해변공원을 뒤로한 채 서둘러 카사블랑카로 달려가야 했다. 그래서인지 안내자가 가진 지식을 총동원해 이슬람의 교리며 국기의 연원을 설명했으나 공허한 메아리처럼 귀에는 들어오질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이들 역시 난폭운전에 길든 다혈질이라는 대목만은 예외. 제아무리 둘러봐도 알라신을 믿는다는 것이 이네들의 실생활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좀체 알기 어려웠다.
▲ 어스름에 찾은 라바트의 하산탑 불빛 아래서
그나저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체로 뚱뚱한 체구를 가졌다. 다름 아닌 인스턴트 식품의 악영향이란다. 무슬림의 계율에 따라 허용된 게 새우버거라지만 밤늦게 먹는 식습관으로 인해 몸집이 거반 퍼졌다는 얘기인데 운동량이 부족하고 태생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담뱃불로 인해 산불이 난들 신고하는 자가 없다니 걱정을 넘어 놀라운 일이다. 그때 눈앞에 나타난 건 철 지난 크리스마스트리. 12세기 성벽을 끼고 자리한 카사블랑카(Casablanca)는 예상치보다는 가까웠다. 핸드폰을 잡고 사는 모습은 지구촌 어디나 매일반. 다만 현대-스즈키-기아로 이어지는 상호들을 빼고는 온통 불어권이어서 간판을 통해 본 도시 분위기는 프랑스풍 일색이었다. 유난히 하얀 집들이 많은 틈새를 비집고 투숙한 곳은 호텔 CASABLANCA. 다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시설은 그저 그랬고 저녁은 선뜻 손가는 게 없었다. 설상가상 층간 소음이 들리는 구조여서 머무는 내내 기분이 영 개운치 않았다.
일찌감치 일어나 리무진 버스에 오른 시각은 06:30. 프랑스인 20만 명이 이주해 개발했다는 카사블랑카 거리는 어둑발이 채 가시지 않았다. 가이드는 갈 길이 멀다며 서둘렀다. 일행이 탄 리무진과는 대조적으로 시내를 누비는 버스들은 하나같이 낡았다. 그리그의 서정적인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만난 앙파지구는 사우디와 쿠웨이트 왕실에서 소유한 별장들이 널린 곳. 정원이 보이지 않을 만치 대체로 담장들이 높다랗다. 그 담벼락을 끼고 세련되게 가꾼 해변도로를 따라 정갈하게 심어놓은 야자수와 종려나무들. 초장에 들른 곳은 하산 6세가 세운 모스크였다. 자그마치 5억 달러나 들였다는데 별반 감흥은 없었다.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세계 세 번째. 200여 개에 이르는 미나렛에 칠한 청색은 신을 향한 충성심의 표시, 곧바로 만난 모하멧 5세 광장 역시 바로 그런 데였다. 참고로 유라시아에 분포한 이슬람국가의 복음화율을 살펴보니, 아프가니스탄 0.02%, 예멘 & 소말리아 0.05%, 모로코 0.01%, 튀니지 0.22%, 알제리 0.29%, 터키 0.32%, 이란 0.33%, 나이지리아 0.4%에 지나지 않았다. 열방과 더불어 가능한 한 화평을 유지하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구원의 비밀을 알려줄 민족들이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70호)에는 ‘모로코를 만나다 - 휴양도시 카사블랑카를 걷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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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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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모로코를 만나다 ‘페스와 메디나를 돌아다니다’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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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는 모로코인들의 정신적 수도. 시가지에 수천 개의 모스크가 드물지 않게 마을마다 늘어서 있다. 하지만 덤처럼 10개가량의 교회당에 유대교 회당 5개가 더 있다는 설명이다. 단 선점한 타종교를 인정하되 그 이상 포교는 금지돼 있단다. 무슬림은 금요일, 유대인은 토요일, 기독교인은 일요일이 안식일. 뒤이어 정성껏 금박을 입힌 옛 왕궁 앞에서 멋쩍게 포즈를 취했는데 성문 밖 샛길은 미로에 가까웠다. 고분고분 가이드를 따라 재래식당에 간 건 그래서였다. 아라비안나이트 풍의 도심을 파고들어 꾸스꾸스를 맛보았다. 밀가루를 좁쌀처럼 빚어 과일, 배추, 닭고기를 집어넣고 쪄낸 전통식. 약간의 뜬 내 말고는 희한하리만치 내 입에 맞았다. 흐뭇이 지켜보던 아내가 맛깔스레 무친 채소요리를 권했다. 그러나 덥석 물었다간 자칫 큰일이 나겠다 싶어 호기심을 억누른 채 ‘막판에 속이 뒤집어지면 골치 아프다’고 사양했더니 뒤집어진다는 표현이 우스웠는지 다들 크게 웃었다. 배가 불러 푸짐하게 내놓은 오렌지 후식도 드는 둥 마는 둥 일어나 뿔뿔이 흩어져 빠져나오려니 아니나 다를까 골목길을 빠져나오는 데 꽤나 애를 먹었다.
상주인구 155만에 달하는 메디나(Medina)에서 가장 좁다란 골목길. 기실 모로코 여행의 백미는 길라잡이가 쥐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평화가 당신과 함께’라는 뜻의 인사를 건네는 키 작은 노인. 몇 마디 우리말을 익혀두었다. “반갑습니다!”를 시작으로 “왼쪽, 오른쪽, 계단, 똑바로!” 등 일행을 안내하는 데 익숙했다. 태네리 염색공장을 찾아가는 길은 미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밀집 구역을 잰걸음으로 지날 때는 바짝 정신을 차려야 했다. 통로가 14개라는 명문대학의 측문에서 잠시 사진을 찍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목하 기둥이 241개나 늘어선 상가를 헤집고 지독한 비둘기 똥내를 맡으며 그 현장을 찾아가는데 아내 역시 코를 막고 괴로운 표정. 유독 나만은 유년시절 양계장집 아들의 내성(?)이 작동한 참인지 견딜 만했다. 다만 실온은 쾌적하여 발가락이 고슬고슬했다. 이윽고 당도한 가죽염색공장. 여기저기 가판을 벌려놓고 원색으로 물들인 가죽제품을 사가라고 판촉에 열을 냈으나 선뜻 살만한 물건은 없었다. 보면 볼수록 열악한 작업여건. 저러고도 과연 인체가 견뎌낼까 근심스러울 지경. 천년 공법이 고스란히 배어있다며 기존방식을 고수하는 이네들의 모습에서 이쯤에서 무엇을 얻고 버릴 것인가를 헤아려보았다.
▲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페스의 염색작업 현장
희귀한 구경을 마치고 왕궁을 둘러싼 돌담을 끼고 돌아나가는 길. 그런데 버스에 오르자마자 난처하게도 카메라에 이상 신호가 떴다. 당황한 나머지 옆 사람에게 문의하니 뾰족한 수가 없다는 표정. 어쩔 수 없이 카메라를 매만지다가 흘끔 창밖을 보니 대단위 공동묘지. 준비를 철저히 했더라면 무탈할 일을 성급한 마음에 흔치 않은 장면을 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사진기를 붙들고 한참 씨름한 끝에 겨우 작동이 된 건 그나마 다행. 기분 좋게 고개를 드니 교각을 지탱하는 축대에 스페인풍의 정교한 공법이 묻어났다. 새파랗게 색칠한 페인트 행렬. 그래서인지 농축산 단지를 개발한 지혜는 괄목할 만했다. 공터가 있어 바깥바람을 쐴 겸 밖으로 나오니 지중해성 기후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훈풍. 길가에 늘어선 식물의 이파리에도 윤기가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행정수도인 라바트(Rabat)는 적어도 외양적으로는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는 중이란다. 단 나쁜 일은 왼손으로, 좋은 일은 오른손으로 처리하는 습속을 지켜온 것처럼 금기시하는 것이 많은데 특히 왼손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일은 엄금이라고 일렀다.
토지는 거의 왕실 소유. 새삼 빈부격차를 논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천양지차란다. 황무한 사하라사막과 해발 4,184m의 아플라스산맥을 빼고는 국토 전체가 곡창지대일 정도로 비옥한데도 종교 교리와 제도적 미비로 인해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다는 것. 물론 한때 소수 지식인을 중심으로 삼권분립을 주장하는 등 개혁운동이 일어났으나 하산 2세가 틀어쥔 절대 왕권을 벗어나지 못한 채 여태껏 제정일치 시대의 정치체제에 꽉 묶여 있단다. 하긴 독재자가 혜안을 갖추고 일사불란한 통치권을 행사할 때 오히려 비약적인 도약을 이룬 예들이 있긴 하다. 예컨대 무려 1,000km에 달하는 고속도로 건설에 우리 업체가 참여하는 등 양국 정상의 빅딜로 아프리카를 잠식하던 중국의 힘을 대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 고무적인 일은 이전부터 비교적 관계가 원활한 스페인이 관개수로 완성 계획에 적극적이어서 이를 기반으로 터키에 이어 1987년부터 EU에 가입을 타진하고 있다고 하니 부디 개방의 호기를 잘 활용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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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769호)에는 ‘모로코를 만나다 - 라바트의 하산탑을 올려보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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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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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모로코를 만나다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향하다’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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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타리파(Tarifa)’ 항구를 통해 들어간 아프리카대륙. 지브롤터해협이라야 불과 14km 바닷길이어서 40여 분 만에 육지가 나타났다. 수월하게 당도한 ‘탕헤르(Tanger)’ 항구는 한눈에 허름했다. 차일피일 미룬 끝에 밟아보는 미지의 땅. 그때 누군가 상주인구 4천만에 가까운 모로코(Morocco)를 채 4만에도 못 미치는 모나코인 줄 알았다며 썰렁한 농담을 던졌다. 특이한 건 입국 절차. 그냥 타고 온 버스에 앉은 그대로 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 가이드에 따르면 이건 편리함을 넘어선 큰 행운이란다. 만약 현지 차량을 빌릴 경우에는 코를 찌르는 냄새로 인해 내내 시달려야 한다고 귀띔했다. 그런데 30분이 다 지나도록 버스는 좀체 움직일 줄 몰랐다. 가까스로 현지 가이드를 내세워 급행료(?)를 얹어주고서야 어렵사리 출입국 관리소를 벗어날 수 있었다. 탕헤르는 인구 130여만 명이 상주하는 자유무역항. 한때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분할 점령했던 땅이다. 그곳을 떠나자마자 금세 어둠이 밀려왔다. 흡사 밀물에 떠밀린 갯벌 체험객처럼 찾아든 CHELLAH 호텔은 예고와는 달리 전화기도 없고, 화장실 변기 덮개마저 온전하지 않았다. 다만 부실하다던 저녁 식탁은 의외라 싶게 풍성해 수프, 빵, 고기, 사과, 바나나에 식수까지 제공했고, 침실에 놓인 침대 또한 누울 만했다.
눈을 뜨니 주일 아침, 가이드의 호들갑스런 예고편에 지레 겁부터 먹었으나 아내가 잠들기 전 바퀴벌레를 퇴치한 일 말고는 그런대로 기분이 괜찮았다. 조촐한 조반 역시 그만하면 합격점, 뜨뜻미지근하다는 요구르트는 신선했고, 영상으로만 보았던 전병은 고소했다. 해외여행 중에는 늘 그래왔듯이 둘이서 예배를 드린 뒤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이른 6시 반 페스(Fes)로 향하는 길. 희뿌연 안개를 제치고 달려가는 도중에 유목민들의 주거지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영상으로만 보았던 베르베르족의 움막들. 뒤이어 모로코 최초의 알카라위인대학교가 나왔다. 마치 샌드아트처럼 옥토와 박토가 번갈아 스쳐 지나가는 차창 풍경. 간간이 보여주는 극명한 대조야말로 여기가 아니면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해박한 가이드의 해설이 이어졌다. 이곳의 기업들은 죄다 국영이지만 시장경제체제는 분명히 작동하고 있어, 비록 과학기술은 보잘것없어도 철광석 등 지하자원 매장량이 풍부하여 각국이 앞다퉈 자원외교를 벌이는 중이란다. 특히 무기화합물인 인산염(燐酸鹽)은 부럽게도 지표면에 그대로 노출돼 있단다.
▲ 아침나절에 만난 모로코 탕헤르 항구의 후경
저만치 솔숲 위를 날아가는 외기러기. 바로 옆 늪지에는 오리 떼가 헤엄을 치고 있다. 이따금 풀을 뜯는 소와 양들도 보였다. 야산에는 선인장들이 자라나고 길가에 유칼립투스가 줄지어 서 있는 건 지중해가 가깝다는 것. 다만 유칼립투스는 독성을 풍겨 주위에 다른 수종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데, 바로 그때였다. 아뿔싸, 달리는 버스를 향해 달려들 듯 나란히 달리는 애들이 보였다. 위험천만해 뵈기에 대뜸 물으니 엔진의 한쪽 구석에 찰싹 달라붙어 바다를 건너보려는 시도라고 했다. 저토록 생명을 걸고 사력을 다한들 뜻하는 바를 유럽에서 이룰 수는 없겠지만 희망 없는 현실을 탈출하려는 몸부림까지야 어쩌랴. 한결같이 안쓰러운 얼굴들. 그 틈에 세계적으로 드문 육지염전을 목도할 수 있었다. 이는 노아 홍수의 결정적인 증거물. 즉 사십 주야를 퍼붓는 빗줄기에 바닷물이 뒤섞여 여기저기 고인 염분이 말라붙은 터였다. 그렇게 생겨난 데가 사해 같은 염호를 비롯해 소금산, 암염 등인 줄을 왜들 모르는지 안타깝다. 비록 가공을 거친다지만 이들에게는 절실한 생필품이다.
어쨌거나 무자비한 십자군 원정 이후 이웃의 돌팔매질을 견디다 못해 새로이 개척한 땅이었으나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아닌 헛된 잡신을 섬기는 종교문화가 똬리를 튼 게 원인이었다. 나면서부터 숙명처럼 택한 외길이었기에 던지는 피드백이다. 포장은 했으되 비포장에 가까운 길. 그렇게 얼마를 내달린 끝에 제법 헌칠한 휴게소에 들렀다. 30분간의 휴식시간에 바지런히 주변을 둘러보니 둔덕에 펼쳐진 드넓은 초지가 궁금했다. 정답은 건초를 수출하는 나라. 그 모퉁이 깡마른 당나귀 두 마리를 끌고 거친 밭을 갈며 살아가는 촌부들의 삶은 적잖이 고달파 보였다. 양분이 모자라 까칠하게 자라나는 올리브나무 중 잘생긴 한 그루를 카메라에 담았다. 하지만 땅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열매를 털어 일일이 자루에 담는 모습이 끄히 원초적인 데다가 대지 또한 미개발 상태여서 대기는 맑을 듯싶은데 자꾸만 콧물이 흘러내려 호흡기를 괴롭혔다. 까닭인즉 체감온도는 우리네 환절기여서 고질병인 비염이 도진 터. 아, 이 고통은 언제쯤 멈추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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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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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역대 정부에 대한 촌평 ‘민주주의의 위험도를 높이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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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님은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고용 사장의 인상이 짙었다. 청와대 입성을 위해 결정적으로 가동한 기획은 청계천 복원사업이었다. 물론 거대 도심에 정교한 산책로를 조성한 공로는 인정할 수 있지만, 기실 그의 입지를 구축한 서사에는 현대건설 회장이라는 직함보다 월급을 반납하며 서울시장직을 수행한 치밀함에 주차 관리를 맡은 기독교 장로의 얼굴을 덧씌웠다. 가장 황당한 발상은 4대강 운하인데, 이는 간선 도로망이 촘촘한 마당에 무슨 해괴한 공약이냐는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강바닥 준설로 바꿨으나 자연 유속을 무시한 채 보를 설치하고 기존 물길에 손을 댄 결과는 수질오염이었다. 차제에 천변에서 채소를 공급하던 농사꾼들의 삶은 청계고가도 밑 공구상들과 함께 온전한지 캐묻고 싶다. 무리한 북한 적대시 정책으로 인한 천안함 폭침과 금강산관광 중단 및 언론장악, 부자 감세, 부동산 투기 조장에 이어 다스 소유주 사기로 구속된 뒤 해외자원 유실까지 실정투성이나, 청계재단은 그렇다 쳐도 무역 규모 1조 달러 달성, 한미중일 통화스와프 계약, 교련 폐지, 한국장학재단설립 등에는 눈길이 머문다.
박근혜 님은 어차피 한번은 거쳐야 할 정치판의 위험 인자였다. 판에 박힌 형상은 전형적인 공주상이거니와 보기에 따라서는 백치미를 지닌 여인상일 수 있다. 일부러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전연 없으나 최 씨 부녀에 정 씨를 겹치면 비밀에 싸인 사생활의 의문이 얼마큼은 풀릴 수도 있는데, 그녀가 노인들의 지지를 받은 건 순전히 부친의 향수로되 상당 부분은 모친을 빼닮아서다. 적잖은 기간 청와대에서 이것저것 보고 자랐거늘 도대체 무얼 배우고 익혔는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공과를 살펴보면 좀 어설프긴 하지만 공무원 연금개혁에 손을 댔고, 기초연금을 인상했으며, 법을 위반한 과거사위 변호사들을 처벌하고, 전두환의 추징금 환수에 박차를 가하는가 하면 이어도에 방공식별 구역을 설정하고, 방산 비리를 잡는 성과가 있었던 반면, 외국인 근로자들을 홀대하고 귀화 조건을 까다롭게 고치더니 전교조 법외노조화, 통합진보당 해산, 우편향 국사교과서 편찬, 개성공단 폐쇄 등의 과실을 범했다. 탄핵을 당한 뒤에도 박근령이나 박지만의 소식은 세간의 신경계를 건드리고, 롯데호텔의 퀴퀴한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 고층 빌딩처럼 올라가는 신축 아파트
문재인 님은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퍽 부담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하긴 정치가 싫다고 피해 다닐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하나 권력의지가 약해서 벌어진 후과는 만만치 않다. 물론 요즘 허다한 국민이 연일 겪고 있는 일들을 지적한 것인데, 나름 최선을 다했으니 곧바로 잘한 일부터 살펴보면 그는 남북관계 개선에 진정성을 보였다. 다만 트럼프의 막무가내식 제동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아쉬움은 크다. 복지예산을 늘리는 일에도 주력했으나 문제는 늘 한정된 재원이다. 탈원전이란 용어는 ‘향후 50년간 원전 축소’로 바꿔야 했고, 유례없는 기후위기를 맞아 그 방향은 옳았다. 아울러 기간제 교사의 순직 처리, 국사 국정교과서 폐지는 잘했고, 공무직의 무기계약직 전환은 서두르는 바람에 비판을 받았는데 채용 요건의 미비를 챙기지 못해서였다. 검찰개혁의 로드맵이 결여된 행보는 한 가족의 멸문지화를 낳았다. 여성 장관이 투기심리를 제어하지 못해 초래한 부동산 정책 실패는 정권을 잃는 재앙으로 나타났다. 개인적 견해로는 최고 책임자의 경우, 심성이 착한 편보다 강한 쪽이 훨씬 나으리라고 사려한다.
윤석열 님은 국군 통수권을 악용해 나라를 망가뜨린 모리배였다. 오죽하면 어느 고교생이 그의 업적으로, 첫째는 최고 명문대 출신이 가진 학력주의의 민낯이요, 둘째는 기소권을 사유화한 반공익적 검사의 행태요, 셋째는 홍범도 장군 격하로 본 공산주의에 대한 정확한(?) 개념(역사 왜곡)이요, 넷째는 이상한 사람이 당선될 수 있는 민주주의 제도의 맹점을 알았다고 조롱했으랴. 돌아보면 연일 거짓이 판을 치고 불공정과 몰상식이 난무한 채 일주일이 멀다고 탄핵거리가 쏟아져 나온 느낌이다. 고작 0.73%를 앞서고 고려 무신정권인 양 상생은커녕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을 독점하여 정적 죽이기에 몰두하다가 결국, 본인이 내란 수괴가 되어 쇠고랑을 차는 신세로 전락했을뿐더러 인류사에서도 보기 드문 국정 관여 영부인(사실상 V1)의 발호 역시 도를 넘다가 끝내 파국을 맞고 말았다. 거기에 무속까지 끼어들었다면 망연자실할 수밖에는 없지만, 이 시점에서 각자 속내를 냉철히 들여다봐야 함은 일찍이 플라톤이 남긴 명언이 떠올라서다. “나랏일에 무관심한 대가는 악인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라는 일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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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