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이켜보면 유대인들과 공존했던 이교시대의 족속들은 영욕을 같이하며 명멸하기를 거듭했다. 거칠 것 없어 보였던 바빌론인, 페르시아인, 히타이트인, 팔레스타인이 그랬고, 오늘날 큰 민족을 이룬 중국인, 힌두인, 이집트인들이 그랬다. 그렇지만 뒤의 세 민족도 실상은 유대인만큼 큰 영향력은 미치지 못했다. 그들은 자국 영토에서 쫓겨나지도 않았으며, 이민족에게 말 못 할 고초를 겪지 않았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 운위되는 이네들의 위상은 지구촌 재건을 위한 씨앗도, 다른 문명을 위한 탄생의 밀알도 되지 못한 채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유대민족의 생존사를 들여다보면 4,000년간의 역사 속에서 무려 3,000년 동안이나 지성적, 정신적 영향력을 발휘해왔으며, 3,000년간이나 나라 없는 백성으로 떠돌면서도 민족성의 본질을 유지해왔다. 유대인들의 왕성한 저술 활동은 실용적이고 학술적이며 문학적이고 예술적이다. 역설적으로 다수의 민족이 전쟁에서 이기고 비문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자랑했으되 대부분 흔적 없이 사라진 이면에, 유대민족의 사상과 언어는 오늘날 생생히 살아있는 것이다.
유대민족이 응전하여 극복한 역사를 보면 크고 작은 도전들이 끊임없이 출몰했다. 그때마다 피로써 투쟁했고, 고비를 넘기고 나면 또 다른 항전들이 그들을 기다렸다. 유대인의 주적은 늘 이교도들이었는데, 과거 유목민으로 떠돌던 시절에는 바빌론, 앗시리아, 페니키아, 이집트, 페르시아 등과 같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시달려야 했다. 정복하느냐 당하느냐는 적자생존의 정글 속에서 유태인만이 가진 문화적 사고와 강인한 정신력이 공동체를 살아남게 한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막상 1,700년 동안의 유랑과 노예생활, 전쟁에서의 학살, 망명의 세월을 버텨낸 유태인들이 돌아온 고국에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학정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걸 이겨낸 힘의 원천은 전적으로 창조주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설명이나 설득이 되지 않는다. 그리스에 정복당한 로마조차도 희랍화로 치닫던 그 시절,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종교, 예술, 문학은 물론 법과 제도까지 정부로부터 보호되고 있었다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무엇이랴. 인류 문화사적으로 화려하기 그지없던 그리스의 허다한 족적은 로마군대의 멸망과 함께 소멸되고 말았던 것이다.
▲ 예루살렘의 외곽 도로 및 주택가
기원전 6세기경 바빌론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때부터 19세기 유럽의 게토에서 해방될 때까지의 기간 중,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유대인들에게 다가온 양상이 유대교의 탄생과 아우른 디아스포라였다. 이때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역에 광범위하게 흩어진 유태인들의 독자적 삶은 이국 문화로의 동화가 아닌 문화 이질감의 극복으로 나타났다. 통치국의 조직적인 분산 정책을 견뎌낼 수 있었던 힘이 탈무드라는 종교적 규약이 그 자체로써 큰 역할을 해냈다. 탈무드는 1,500년간이나 율법적으로 유대민족의 내면을 압도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 시기를 가리켜 ‘탈무드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7세기에 접어들어 유대교에서 기형적으로 파생한 종파가 이슬람교다. 마호메트에 의한 신종교의 출현은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심각한 도전이었다. 이른바 알라신에 의해 세워진 마호메트 제국이 불과 1세기 만에 서구 문명에 정면으로 맞섰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약해진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이 장손을 자처하며 적자 이삭에게 대적한 뒤 700년이 지나고 유대인 문화도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세 암흑시대야말로 그들에게는 멸종을 면하기 위한 1,200년간의 극심한 투쟁기였다. 십자가로 상징하는 기독교 앞에 모든 국가가 굴복하고 개종하는 사이 유독 유대인들만은 험난한 고난을 딛고 위대한 지도자의 인도에 따라 독자생존의 길을 모색한다. 그 결과 그들은 스스로 지켜낸 가치들이 유용한 것으로 인정받았고 유럽의 사고를 재편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유태인들 가운데 국가의 수상이 나오고 대형 사업가로 성공하는가 하면, 한 나라의 군대를 통솔하며 시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모임을 창립하는 등의 대 활약상을 펼치는 일들이 벌어진 참이다. 다만 사건들을 영적 시각으로 들여다보면 이성적 계몽주의가 진화론을 불렀고, 공산주의가 부추긴 유물론은 사람을 정신분석학으로 재단하여 해석하려고 시도해왔다. 그 결과는 무섭게도 복음의 상실이어서, 그로 인해 인류가 얻은 것은 영적 공허에다 복음의 고갈로 이어졌다는 그 지점이다. 여태껏 메시야를 기다리며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채 참 복음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너무나 안타까워 토로하는 중이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53호)에는 ‘영적으로 탐색한 이스라엘 - 성경으로 탐구한 유태인’이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