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0-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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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Ph.D.

요세미티로 가는 길은 멀었다. 고 박정희 장군이 실권을 잡았을 때 이곳을 다녀갔다는 말은 현지 가이드에게 처음 듣는데, 이후 우리나라에 국립공원을 지정했다니 그건 고무적인 일이로되, 널리 퍼뜨린 소문처럼 거대한 암석군이 앞을 가린 채 금세 전설 속의 요정이라도 튀어나올 듯 울창한 숲속은 아니다. 설악산을 능가하는 산세라더니 자랑 일색이던 폭포수는커녕 가느다란 물줄기마저 모조리 말라붙었다. 그렇다면 기대하던 눈요깃거리가 사라졌으니 인스피레이션포인트에서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일밖에 돌아다니기도 마뜩잖았다. 그에 비해 유타주의 모뉴먼트밸리는 초장부터 우뚝 솟은 기둥이 특이한 데다가 콜로라도 고원의 암갈색 색상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밑에서 꼭대기까지 사암 덩어리라는데 속칭 벙어리 장갑(mitten)이라 불리는 연유를 알겠고, 소싯적 이웃집 TV에서 엿본 황야의 무법자들이 날뛰던 장면이어서 길손을 모으고는 있으나 깊숙이 들어간 엔텔로프캐니언을 빼고는 어딘가 덜 차린 듯한 밥상이었다. 우리 부부는 오래전 요르단의 페트라를 떠올리며 흩날리는 먼지를 피해 주변을 산책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랜드캐니언은 미대륙을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관. 크나큰 아쉬움은 있었다. 말로만 듣던 사우스림에서의 햇빛 반사 각도가 때를 따라 받쳐주지 않았던 참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지점에 궁금증이 일었다. 서간의 행간을 읽어내듯 그대 또한 늙어간다는 애처로움이랄까. 깎아지른 협곡을 구성하는 무지갯빛 지층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서는 경비행기나 헬리콥터에 올라야 한다지만, 심연처럼 강물이 여울져 흐르는 골짜기에서 대자연과 하나가 되지 않으면 그 안에 감추어진 창조세계의 신비를 도저히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게 탐사전문가의 견해이기에 그랬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해야 40분 남짓, 우리 부부는 일행과는 정 반대쪽을 겨냥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아내를 배려한 동선이었으나 서둘러 눈동자에 새기다 보니 어느새 반환점이 코앞이다. 그러고서야 나머지 현란한 색조가 망막에 들어온다. 다름 아닌 푸르른 파월호에서 불그레한 미드호까지 요동치며 굽이치는 강물의 몸부림. 이는 정작 장엄한 우아미의 총합이다. 여기에 어떤 수식을 덧칠하리, 발견자의 흉상은 뒷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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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브라이스캐니언

 

브라이스캐니언이야말로 상상을 잔뜩 자극할 만한 풍광. 신묘막측한 신의 손길이 아니면 이처럼 온갖 생김새를 빚어낼 리 만무하다. 안타까운 건 기기묘묘한 형상들이 눈에 띄게 마모를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 설령 가이드 해설이 아니었더라도 필자는 단박에 그 진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지구촌을 휩쓸어버린 산성비 탓이로다. 아니 기후위기를 자초한 인간들의 잘못이 천하절경의 신비경마저 무참히 망가뜨리고 있는 현장이로다. 그중에 초로의 부부를 가장 매료시킨 장면은 병마용을 빼닮은 화폭에 아무런 명칭을 달지 않았다는 점. 어딜 가나 구실을 붙여 억지 춘향 격으로 덕지덕지 나붙은 명명이 맘에 안 들던 터였는데, 기실 갖가지 형상도 형상이려니와 그보단 단색인 듯 단색 아닌 홍조 띤 빛깔이 더 매혹적이다. 이는 내가 유독 최애하는 색상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왠지 태초의 대지가 이렇지 않았을까 어림짐작하는 그 채도에 가까워서다. 하여튼 우리 둘이는 부랴부랴 선라이즈포인트부터 선셋포인트까지 접수한 부부팀이 되었다. 귀여운 손주들과 다시금 올 날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리려니 걸음이 무거웠다.


자이언케니언은 천하를 압도하는 듯한 장군상. 시온이라는 원발음이 자이언트로 둔갑한 게 되레 자연스럽다. 가이드가 그도 맞다는 추임새를 넣을 만치 거대한 산줄기. 하긴 이건 산맥이라기보다는 어마무시한 원형의 거산(巨山)이라는 편이 어울릴 법하다. 좌우로 고개운동을 한 건 회색과 암갈색 산빛을 번갈아 선보였기 때문이다. 소나무를 닮은 수목들이 바위틈을 비집고 자생하는 매무새도 대견스럽다. 슬며시 산마루에 걸쳐있는 옷자락은 실은 새털구름. 그런가 하면 노란색 산기슭도 필자의 눈길을 끈다. 하지만 괜한 짓을 보탠 맹점이 있었으니 터널 공사 중 문득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뜬금없이 옆구리를 맞창 낸 선을 넘은 발상이었다. 그래서 잠시 신들의 정원을 훔쳐봤다고 선뜻 감탄이 나오지는 않는다는 노파심에서다. 불과 몇 초면 어차피 볼거리를 두고 뭐하러 열두 폭 병풍을 잘라내 지레 한 폭을 먼저 건네받았다고 해서 전연 즐겁지가 않더라는 이야기다. 다른 데서는 한 조각 떼어내는 일조차 벌벌 떨더니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못내 갸우뚱했다. 굳이 과유불급이란 걸 소환할 이유는 없었다는 뜻이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60호)에는 ‘미서부 탐방기 - 다양한 도시환경 보고서’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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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미서부 탐방기 ‘국립공원 최우선 보전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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