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0-09(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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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Ph.D.

이와 같이 제국의 위세는 위험을 동반했다. 역대 왕들이 노력한다고 심오한 통찰력을 얻을 수는 없었다. 예외 없이 부침을 거듭하는 건 그래서다. 선제적 기습은 또 하나의 방책이었으나 해답은 상생에 있었다. 그나마 기율이 로마군의 명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병사들의 한계치는 임계점을 넘지 못했다. 정주형 도적이나 유랑형 도적이나 사악하긴 매한가지다. 헤로도투스의 경고가 나온 배경이다. 이런 마당에 과거를 싸잡아 과학적 법칙을 벗어난 혼동이라고 몰아갈 수는 없었다. 군사적 반혁명의 분위기가 스멀대는 게 당연했다. 충성맹세는 한갓 요식절차에 불과했다. 각자도생의 공식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일찌감치 봉건적 무정부 상태를 직시한 애덤 스미스의 혜안이 돋보인 대목이다. 중국의 당나라를 두고 사망률 2~5%에 그쳤다는 연유로 성공적인 예라고 치켜세운 건 다소 의외다. 우주라고 해서 모두를 포용하지는 못한다. 차라리 싸우다가 일본처럼 동화를 택하는 족속도 있었다. 크고 작은 섬들이 뭉쳐야 했던 동력이다. 문제는 거의 좀비 제국들이 일으켜왔다. 아메리카 역시 문화상대주의로 풀어야 할 지역이다.


유라시아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는 주장이다. 행복한 소수는 다수의 지배를 거부한다. 이는 무기의 발달사를 보면 확연하다. 군사적 혁명이란 걸 들여다보면 인명 살상극에 지나지 않았다. 수적 우세를 갖추었던 몽골과 명나라의 군대가 무력화된 경위를 보면 알 수 있다. 현실적으로 유럽의 총포연구는 문화적 전통과는 무관했다. 단적으로 양보다는 질이 앞선 예였다. 항해 기술도 아시아에서 착수했으나 완결지는 유럽이었다. 포르투갈이 해양에서 선전한 것은 입지조건이 좋아서였고, 스페인의 성공 요인은 원주민들이 감염에 약해서였다. 나중에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같은 나라들도 후발 주자로 끼어들었다. 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영향력은 약한 편이었다. 그 요인은 인도양의 내수시장과 국제무역의 이원화였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저자의 주장과 다를 수 있다. 격동기 전쟁 수행 과정에서 가장 난감한 일은 사람들을 표준화하는 작업이었다. 군수자금조달 또한 최대 걸림돌이었다. 그들은 장부를 조작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역설적인 반전은 무장 수준이 상향 평준화를 거치며 사망자가 현저히 감소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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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기념관에 세운 결전의 조형물

 

경제적 측면을 넘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원제: 『여러 나라 국민의 부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한 고찰』)은 많은 걸 시사하고 있다. 한 나라 부의 원천은 약탈, 정복, 독점이 아니라 분업에 있다고 일갈했다. 그가 취한 입장은 정치적 중도였다. 세기의 저서가 출판된 바로 그해 미국이 영국에 반기를 든 건 필연이었다. 우리는 그날(1776.7.4.)을 미국독립선언일로 기념하고 있다. 어쩌면 전쟁과 평화는 공존의 개념인지도 모른다. 나폴레옹은 미처 이 점을 간파하지 못했다. 그의 사전에 없는 어휘는 불가능이 아닌 영원한 평화였다. 칸트가 같은 제목의 글을 집필할 무렵 프랑스 대혁명의 씨앗이 발아한 건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그사이 워털루에서 패퇴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변모하고 있었다. 무역의 재미를 맛본 결과였다. 때마침 꺼내든 영국인의 도발은 저돌적이었다. 찰스 디킨스가 『돔비 부자』를 통해 밝힌 “지구는 돔비와 그 아들의 무역을 위해 만들어졌다.”라는 발호였다. 인류가 쓰는 A.D.는 ‘그리스도의 기원’(anno Domini)이 아니라 ‘돔비 부자의 기원’(anno Dombey and Son)이라는 조롱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쳐들어간 땅이 중국이다. 아편전쟁에서 양국의 기술력이 드러났다. 1839년 영국수상이 천명한 국제무역이 활성화됐다면 아마도 양차 대전은 없었을 것이다. 스미스 말은 보이는 주먹을 안 보이는 손으로 막는 격이었다. 공통점은 원주민들을 향한 공포감 조성이었다. 동인도회사를 둘러싼 잡음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리바이어던의 출몰은 다반사였다. 식자층이 기록한 내용물도 미화 일색이었다. 평시 살인율이 전시 사망률보다 낮아졌다는 포효를 듣고 싶었다. 19세기 후반 들어 언뜻 500년 전쟁사의 종막을 고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톨스토이가 즐겨 읽었다는 국제적 베스트셀러 『무기를 내려놓자』가 그것이다. 여성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로니스 베르타 폰 주트너가 쓴 책이다. 그 중심에 그녀가 극구 “문화적인 천국에서 새로 떠오른 스타”라고 치켜세운 니콜라스 2세가 있었다. 1899년 130명의 외교관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모여 야만적인 행동을 최소화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재회동 약속은 제1차 세계대전과 겹치는 해였다. 팍스 브리타카나에서 팍스 아메리카나로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57호)에는 ‘전쟁의 역설적 교훈 - 전쟁과 평화의 병존 해법’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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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전쟁의 역설적 교훈 ‘야만과 문명의 충돌 양상’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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