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2-0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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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평택목련로타리클럽 김해연 회장

“회원들과 함께 소외계층 위한 봉사를 이어가겠습니다” “봉사는 여유 있어야만 하는 것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는 나눔” ▲ 목련로타리클럽 제22대 김해연 회장 지난 6월 24일 국제로타리 3750지구 평택목련로타리클럽 22대 회장으로 취임한 김해연 회장은 취임 후 팽성복지관 암환자병동 및 장애협회 후원, 효원요양원 물품봉사, 관명장학금 장학증서 전달, 행복홀씨 입양사업 환경정화봉사, 시메온의 집 생필품 후원 봉사 등 평택지역의 소외된 아동·청소년과 이웃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김해연 회장은 “봉사는 꼭 여유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움직이면서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24일 김해연 회장을 만나 ▶평택목련로타리 소개 ▶취임 후 봉사활동 ▶향후 계획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편집자 말> ■ 김해연 회장 “사랑을 나누는 평택 만들겠다” - 평택목련로타리는 어떠한 단체인지? 평택목련로타리클럽은 지난 2001년 회원 37명이 뜻을 모아 창립했으며, 그동안 지역사회에서 노숙자 및 독거노인 무료급식봉사, 독거노인 생필품 및 성금 전달, 경로잔치, 노인 야유회, 수술비 지원 자선 바자회, 소년소녀가장 돕기 생필품 전달, 동방아동재활원 간식봉사, 청소년 및 리라아동복지관 장학금 전달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통해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현재 8월 기준 총 60여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제가 취임한 후 ▶평택피해아동학대 심리치료 지원 글로벌 보조금 협약 ▶팽성복지관 암환자병동 및 장애협회 선풍기와 김 후원 봉사 ▶효원요양원 물품봉사 ▶관명장학금 장학증서 전달 ▶행복홀씨 입양사업 환경정화봉사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 지난 6월 개최한 회장 이·취임식 기념사진 - 목련로타리클럽 회원들을 소개해 주십시오. 회장인 저를 비롯해 부회장에는 김희경·김윤경·원효순, 차기회장 신지은, 트레이너 서원숙, 총무 문성심, 부총무 윤혜정, 재무 김지원, 감사 이미애·강미선, 사찰 이현실 회원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조직별로는 클럽관리 위원장 이지수, 멤버십 위원장 윤정운, 공공이미지 위원장 유인숙, 봉사프로젝트 위원장 정춘자, 로타리재단 위원장 정지연, 신세대위원회 위원장 이현미, 국제봉사 위원장 박경아, 고액기부 위원장 이순녀, 인터렉트 위원장 양경화 회원이 조직별로 위원장을 맡아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로타리의 비전 선언문에서 나와 있듯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다 함께 힘을 합하여 지구촌과 지역사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창조적 변화를 끊임없이 실천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을 모으겠습니다. ▲ 효원주간보호센터 생필품 전달 - 앞으로 어떠한 봉사활동들을 진행해 나갈 것인지?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과 청소년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이어갈 것이며, 회원들과 함께 소외계층을 위한 물품 나눔 및 재능기부도 함께 진행해 갈 계획입니다. 또한 정기적으로 진행해 온 독거노인 물품 전달과 환경정화사업에도 노력을 기울일 것이며, 동방재활원 간식봉사 및 야곱의집 아동을 위한 정기적인 미용 재능기부 봉사를 진행해 나갈 것입니다. ▲ 관명장학금을 전달하는 김해연 회장 - 시민에게 한 말씀 저를 비롯한 회원들 모두가 국제로타리 봉사단체의 일원으로 작은 봉사를 실천하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봉사란 꼭 여유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움직이면서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해 모두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소외된 주위 이웃들에게 작은 나눔의 뿌듯함과 도움의 손길을 통해 따뜻함을 느끼는 평택목련로타리클럽이 될 수 있도록 회원들과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 행복홀씨입양사업 환경정화 봉사활동 특히 행정적으로 지원이 이뤄지지 않아 생활이 힘들거나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지내고 있는 이웃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계획하고 있으며, 미래 세대의 주인인 아동과 청소년들의 장학사업에도 많은 신경을 쓸 계획입니다. 저를 비롯한 목련로타리클럽 회원들은 봉사를 함으로써 가정과 사회에서 보람을 찾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지역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평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지금 보다 더 살기 좋은 평택시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사랑을 나눌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김다솔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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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원효길과 괴태곶에 묻힌 기억들” 괴태곶을 밝힌 봉수대 (중)

맨 처음 풀이한 문장은 “북쪽으로 양성(陽城) 괴태길(槐台吉)에 응한다”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미처 몰랐던 괴태곶은 봉수대였다. 바닷가 마을 서쪽에 우뚝 솟은 괴태길산(槐台吉山)에 세워져 바다 쪽으로는 충청도 면천의 봉수대하고 가깝고, 동남쪽으로는 직산의 망해산(경양산) 봉수대와 연락이 닿았으며, 북쪽으로는 수원의 흥천산 봉수대에 호응하여 기능을 다했던 곳이거늘, 지금은 안타깝게도 주한미군 주둔부대에 갇혀 마음대로 마주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이후 16세기 들어 기강이 해이해지기는 했으나 아무튼 인근 주민으로 구성한 봉수군 50명이 10일마다 교대로 근무하거나 세분한 오거법(五炬法)을 통해 사방팔방으로 12시간 내에 서울의 남산(목멱산) 봉수대를 향해 위급한 상황을 알리던 시스템만은 대단한 응집력을 보일 만큼 괴태곶 봉수대는 충청도와 경기도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경국대전>에 적시한 규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무 일이 없으면 1거요, 적선이 바다에 나타나면 2거요, 점점 해안에 가까이 다가오면 3거요, 우리 병선과 접전을 벌이면 4거요, 적군이 우리 땅에 상륙하면 5거라는 대처법이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은 괴태곶이 고려 때는 국영목장이었단다. 목자(牧子) 4명이 한 조가 되어 암말 100필과 수말 15필을 길러 매년 망아지 85마리를 불려야 했다면 생산성 또한 괜찮은 편이렷다. 그토록 수원 홍원목장으로 암수 48마리와 사료용 풀을 6,000 묶음씩이나 꼬박꼬박 바쳤지만 자자손손 신량역천(身良役賤)의 굴레에 묶여 목마군(牧馬軍)의 신분을 대물림하면서 연례행사처럼 가렴주구(苛斂誅求)를 당했던 민초들의 일상사를 듣노라면 서글프기 짝이 없다. 출번(出番)과 퇴번(退番)의 편의를 고려해 인근 주민 가운데서 차출한 것까지야 십분 이해할 일이로되 사시사철 그 일에 매여 있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식솔의 생계를 위해 최소한의 먹을거리라도 제때 제공했느냐는 문제가 당연지사 현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에 작성한 목장통계표를 보고서도 선뜻 양성에서 유일한 목장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은 건 그래서다. 세월이 흐른 뒤 성종 때 괴태곶 목장은 소 101마리를 키우는 작은 목장이 된단다. 조선팔도의 분포도를 보니 유난히 해안과 도서지방을 중심으로 경기, 전라 남부, 경상 남부, 제주도에 많이 있었다. 괴태곶 목장 안에 군사방어시설물인 진보(鎭堡)를 둔 조치는 어찌 보면 그럴 법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자연스럽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군량미를 충당한다는 명목하에 차츰 둔전(屯田)으로 둔갑하면서 16세기 이후 목장은 이름만 남게 된다. 성종 때 4만여 필에 이르던 말은 중종 때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그마저 쓸만한 말들은 없었다니 을씨년스런 풍경화가 저절로 그려진다. 하지만 여태 민가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사료들을 샅샅이 찾아낸 다음 전문가의 철저한 검증을 거쳐 일대를 그 당시처럼 복원해낸다면 그야말로 대관령목장에 버금가는 장관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든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징세를 둘러싸고 조정과 갈등이 심했던 것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급기야 1900년 주민들의 집단 청원이 불거졌고, 이듬해 괴태곶 농민들과 봉세 관리 간에 충돌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무자비한 공권력 앞에 무력한 백성들의 삶이야 궁색한 입말을 보태 무엇하랴만, 다들 버겁고 궁핍했던 과거사를 소환하면 늘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릴 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주목한 건 ‘곶(串)’이라는 글자의 어원이다. 언제인가 거기서 파생한 ’고잔‘이란 낱말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잔은 바다 쪽으로 좁고 길게 돌출(사전적으로 ’곶‘이 ’곧‘에서 변화했다는 주장이 있음)한 육지의 끄트머리를 가리키는 ‘곶’의 ‘안’이라는 말(연음)로써 ‘평택섶길 중 소금뱃길’을 걸을 때 건너편에 보이는 땅이었다. 남양만과 아산만의 바닷물을 아울러 바라볼 수 있어 ‘광판대기’라고 부른다는 입말도 정겹거니와 인천과 안산의 ‘고잔동(古棧洞)’이라는 지명이 어쩌면 ‘옛날 마룻바닥’ 같은 모양새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다음 백과의 지식을 빌리자면, 유독 서해안에 ‘곶’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고 하여 비교적 사용빈도가 높은 곳을 보니 갈곶(갈고지), 돌곶(돌고지), 배곶(배고지) 등이 있는데, 갈곶 또는 갈고지(갈구지)라 불리던 마을은 갈곶이(葛串里), 갈곶리(乫串里), 갈화리(葛花里) 등의 이름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단다. 언뜻 뇌리를 스치는 곳만 해도 ‘몽금포타령’에 나오는 ‘장산곶’은 아예 다가갈 수조차 없으니 하릴없다고 치더라도, 달처럼 생겼다는 시흥의 ‘월곶동(月串洞)’이나 해돋이로 이름난 포항의 ‘호미곶’에는 조만간 애틋한 추억을 쌓으며 사는 아내와 함께 가보고 싶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2호)에는 “원효길과 괴태곶에 묻힌 기억들 - 토론장을 달군 질문들”이 이어집니다.

[세상사는 이야기] “원효길과 괴태곶에 묻힌 기억들” 원효를 둘러싼 이야기 (상)

연일 소논문의 각주를 채우느라 뜨거워진 머리도 식힐 겸 오랜만에 찾은 아산만은 주말치고는 한산했다. 지긋지긋한 코로나바이러스의 심술을 탓해야 할지 짓궂은 팬데믹의 손장난을 나무라야 할지 우리 사회는 아직 갈피를 못 잡는 거 같아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게다가 살인적인 고물가 때문인지 바지락 칼국수마저 내심 바라던 맛이 아니었다. 서둘러 도착한 주차장에서 미리 훑어본 자료집. “평택 역사 특강”에 붙은 두 가지 제목을 보니, 본 토론자 역시 ‘원효대사’에 관한 호기심과 더불어 그간 궁금했던 ‘괴태곶’에 얽힌 지난날의 궤적이 어렴풋이나마 떠오르는 듯하다. 아주 먼 옛날이니 삼국시대는 건너뛰더라도 높고 고운 나라 고려(高麗)로 거슬러 올라가 평택지역을 관할했다는 양성현이 수원에 속했다가 조선조에 들어서는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했다는 사료보다는, 18세기 수도암(修道庵)이 괴태곶 봉수대 아래 있었다는 고서의 풀이가 먼저 한눈에 들어온 이유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흐른 19세기 양성읍지에도 수도사(修道寺)는 그대로 있었고, 보시다시피 하루해가 멀다 하고 격변하는 오늘날에도 이같이 건재하다. 원효대사에 대한 현대인들의 상식선에서 돋보이는 대목은 화쟁사상(和諍思想)이다. 바야흐로 대선 정국을 맞이한 대한민국이 앞다퉈 본받을 만한 덕목이 아닌가 한다. 다만 네 번째 항목에는 깊이 들여다볼 지점이 보인다. 물론 여말 이승휴의 <帝王韻紀>나 선초 고서경과 김지의 <大明律直解> 등의 기록을 간과한 바는 아니로되 설총이 이두(吏讀)를 만들었다는 설에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해독이 어려운 한문에 문장의 순서까지 영어를 빼닮아 우리말 어순이 절실하던 참에 평민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수단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렇고, 이두라는 뒷말의 독음을 보아도 신라 때보다 훨씬 전부터 쓰이던 구결(口訣)의 토(吐)와 같은 어원인 ‘讀(두)’을 차용한 것으로 보아 주로 품외 서리(胥吏)들이 쓰던 글자이므로, 설총은 이두의 창안자라기보다는 난분분하던 표기 체계를 집대성한 자로 보는 편이 보다 합리적이라는 의견이다. 이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한국어 요소를 담은 변체한문)을 비롯한 최근 발견되는 고고학적 목간(木簡)을 참고하더라도 설총의 시대에 비해 6세기 정도 앞당겨진 시점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만만치 않다. 흥미로운 대목은 조선말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원효와 의상의 관계다. 백승종 교수가 제시한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에는 당시 이규경이 쓴 ‘원효와 의상에 대한 변증설’이 실릴 정도였다는데, 내막인즉슨 ‘의상은 원효의 아들로서 익히 알려진 설총의 아우’란다. 따라서 무학대사가 지은 청구비결(讖謠, 일종의 예언으로 ‘정감록’에 있음)에 나오는 대로 의상이 원효의 제자라는 말은 착오가 된다. 신기한 건 그 형인 설총은 동방의 儒宗이 되고 동생인 의상은 동토의 僧祖가 되었다는 기술보다는, 여태껏 학자들은 왜 원효와 의상을 부자로 인정하지 않느냐에 있다. 꼭 이규경의 점잖은 문제 제기가 아니더라도 호사가들은 이른바 ‘씨나 배’의 문제로 상상의 나래를 펴지 않았을까? 이수광의 <芝峯類說>을 펼치면 항간에 혹여 요석공주 말고 다른 연인이 있었다는 추측성 소문이 가능할뿐더러, 김걸이 지은 <海東文獻錄>의 釋家類에 동조하여 의상의 속성이 김(金) 씨라면 만의 하나 아버지가 다른 분일 수도 있지 않나 해서다. 어쨌거나 어느 날 불쑥 나타날지 모를 고문서에서 두 분에 대한 인상착의가 단 한 줄이라도 숨어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에서 나온 개인적 바람일지언정 불경스럽거나 지나친 억측인 걸 모를 리 없다는 점을 차제에 밝혀둔다. 매우 조심스럽게 짚어볼 대목은 의상과 원효가 택한 길이 달라진 것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로되, 원효 큰스님이 오밤중에 해골물을 마시고 깨우침을 얻었다는 설이야말로 역사성이나 사실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세인들의 귀를 솔깃하게 이끄는 일은 색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데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살을 붙여 가꾸는 협업을 두고 하는 말이다. 경주 분황사에 원효의 진상을 안치했다는 설총의 효심은 당대 미라를 만드는 기술이 있었다면 어느 쪽을 택했을까? 일본인들이 원효를 위시해 퇴계 이황에 이르기까지 우리네 조상을 흠모한 연유는 무지몽매한 그들에게 백제의 선진적인 문화에다 유학을 전파한 아직기와 왕인 박사의 공이 크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천자문뿐만 아니라 논어 등 경전까지 배운 왜인들이었건만 어제오늘 경제 좀 일궜다고 저토록 최소한의 은혜조차 모른 채 매사 오만방자한 행태를 보노라면 왠지 스승이 제자를 잘못 가르친 것 같아 이제껏 걸어온 길을 새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1호)에는 “원효길과 괴태곶에 묻힌 기억들 - 괴태곶을 밝힌 봉수대”가 이어집니다.

[세상사는 이야기] “큰스님들이 걸었던 옛길” 학술토론을 환기함 (하)

늘 남편을 위해 기도하는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토요일인지라 목적지로 향하는 길은 다소 붐비는 편. 다행히 심하게 밀리지는 않아 여유롭게 행사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시 자동차 안에서 대기하다가 간단한 요기와 볼일을 마친 뒤 ’원효대사깨달음체험관‘에 입장. 학술대회가 갖는 비중에 걸맞게 상당히 북적였다. 물론 코로나 사태의 엄중함에 따라 방역수칙은 지키려고 애썼으나 예상을 웃도는 참가자들로 인해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 식전 행사에서 선보인 우아한 춤사위를 뒤로하고 개회식이 끝나자마자 네 분의 발제가 진중하게 이어졌다. 그런데 오늘 학술대회의 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 건 지정 토론이었다. 열심히 준비한 만큼 풍성한 문답들이 오갔기 때문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자못 집요했을뿐더러 비록 자체 내 중간 평가라고는 하더라도 대내외에 널리 알려진 여느 학술대회 못지않을 만큼 알차게 진행된 점에 대해서는 뿌듯한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듯하다. 특별히 멀리 강원도 속초에서 달려와 종합토론에 적극적으로 임해주신 열렬 참여자가 있었는데 워낙 학문의 깊이가 돋보여 뭇 시선을 끌었다는 점을 밝힌다. 아울러 오랫동안 대회 준비와 뒷받침에 혼신의 힘을 쏟아부은 손길들에게 이 지면을 통해서나마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더불어 날카로운 질문들과 깊이 있는 탐구에 대한 진심 어린 치하와 치열한 질정이 있었고, 아직 시원한 해답은 얻지 못한 지점에 관해서는 후속 연구물을 통해 수정하고 보완하기로 다짐한 일도 묵직한 소득이다. 참고로 질의에 나선 지정 토론자가 일부에 집중된 현상을 감안해 개별 사안에 따른 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그중 유의미한 문답을 골라보면, 안성천과 진위천까지 소금뱃길이 있었다는 점에서 당은포를 평택항 근처로 비정(比定)하는 근거는? 세기의 장사꾼 오페르트가 평택항에 출몰했다는 설과 1980년대 평택제철 무산에 대한 견해는? 큰스님들과 학구열은 정비례하는가? 열반경, 유마경, 금강경, 라마다경 등 불경들의 차이점은? 전반부를 망실한 왕오천축국전에 쓰인 어휘들과 혜초의 바닷길을 논구한 치적에 비추어 진위행궁의 행방을 연구할 의향은? 원형 설화의 구조 탐색에 관한 의미 부여는? 석조비로나자불의 출현과 교학적 해석을 연계한 불교 작품들이 보이는 인생무상의 주제의식은? 길에 대한 상징적 의미 설정과 문화와 경관독해의 개념을 특정한 의도는? 서양의 형태이론과 장소이론의 상하위 관계는? 지역사회의 이면을 해부하고 가감 없는 실태 파악을 위한 특단의 해법은 없는가? 원효길 조성의 발상 전환과 옛길을 재현하려는 필요충분조건은? 명목뿐인 평택섶길의 현실적인 활성화 방안은? 당은포는 유라시아의 길목으로서 문명사적으로 어떤 문화를 수용하고 전파했으며, 그 유적들과 유물들은 있는가? 당나라는 탈라스(Talas)전투에서 진 뒤 <육상실크로드>가 막힌 것을 동아시아의 비약이라고 했는데 논리적인 연결고리는? 소무덤과 아까운 내 인생 되돌아보기라는 프로그램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나? 현각스님이 혜민을 향해 ‘도둑놈, 지옥으로 가는 기생’이라고 한 비난은 어찌 보며, 한국 불교계에 대한 생각은? 명성과 진실이 부딪칠 때 원효의 가르침은? 다수의 한국인들은 자기만 생각하는 개인들인데 역사를 공부하면 시민의식이 고취되는가? 사유지에 속한 돌미륵입상이 문화유산의 가치가 있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오도성지와 대진포구에 대한 명확한 정황들을 적시하면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상권이 해인사판 고려대장경 속에 명확히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돈황 막고굴에서 처음 빛을 본 게 아니었다는 사실과 일본 종교학자 오타니 고즈이가 신라인 혜초의 것이라고 밝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물론 대부분의 질의와 응답은 논문 안에 녹아있었다. 그밖에 원효의 해골물에 얽힌 역사적 사실 여부 등 미처 제기하지 못한 질문거리도 여럿 있거니와 차마 입을 떼지 못한 사항도 다수 있었음을 상기해 둔다. 다시금 모두(冒頭)를 소환하면, 정해진 순서를 기다리면서 체험관 내부를 둘러보니 원효스님의 일대기를 정갈하게 정리해 놓았다. 막간을 이용해 다녀온 화장실의 민낯도 그만하면 합격점. 그윽한 차를 마시는 동안 만난 반가운 얼굴들과 나눈 눈인사는 가벼웠으나 저녁 잔치 자리를 메운 화제들은 평소 흘러넘치는 나의 관심사만큼이나 퍽 흥미롭고 다채로웠다. 모쪼록 평택 불교사암연합회에서 주관한 첫 학술대회 토론에 참여한 일원으로서 앞으로 더욱 뜻깊은 연중행사로 발전해 나가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0호)에는 “원효길과 괴태곶에 묻힌 기억들 - 원효를 둘러싼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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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결과 알립니다] 2021 제11회 평택전국밴드경연대회

[대회 결과 알립니다] 제11회 평택전국밴드경연대회 & 평택록페스티벌이 7월 10일~11일 양일간 평택시 남부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특설무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대회에는 전국에서 총 176팀이 예선에 참가했으며, 14팀이 본선에 진출해 경연을 가졌습니다. 이번 대회에는 ▶이건태(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전 송골매, 전 들국화, 전 윤수일밴드 드러머) ▶최태완(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다섯손가락 키보디스트, 두원공과대학교 교수) ▶원영조(국제예술대학교 전임교수,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 석사) ▶임근재(기타리스트, 전 국제대 실용음악과 객원교수) ▶전영준(파리 국립고등음악원 작곡과 졸업, 두둔 라바토리 음악감독 및 리더) 씨가 심사를 맡았습니다. ■ 2021 제11회 평택전국밴드경연대회 경연 결과 ▶대상: 터치드 ▶금상: 바투 ▶은상: 밴드 데일 ▶동상: 하모니 오브 패러독스 ▶최우수 보컬상: 그림(곽정○) ▶최우수 연주상: 바투 기타리스트(이○) ※ 제11회 평택전국밴드경연대회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신 뮤지션들과 대회에 참가해주신 뮤지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는 뮤지션들이 평택에서 더 행복할 수 있는 대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21년 7월 11일 평택전국밴드경연대회&록페스티벌 조직위원장 서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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