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2-03(토)

평택시사(平澤市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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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평택시사(平澤市史) 기사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나루·포구유적’ ②
    이포진, 수원부에서 남쪽으로 70리... 평택으로 통한다고 기록돼 통복개, 진위현 남쪽 30리 지점... 통복천 하류에 있었던 나루 ▲ 이포진(아래소청나루)이 있었던 동고리(2006) ◆ 안성천의 나루와 포구 1. 이포진(위치: 고덕면 동고1리) 이포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나온다. ‘수원부 남쪽 70리에 있으며 평택으로 통한다’고 돼 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 수원부 조에는 금물촌면에 있다고 기록됐고, 다른 읍지(邑誌)에는 평택현으로 넘어가는 나루였다고 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수원부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져 있으며 평택으로 통한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아래소청나루라고 해 국도38호를 지나 서평택으로 넘어가는 차량과 사람을 실어 날랐다. 이포진에서 배를 타면 안성천 건너 원봉나루나 곤지진, 진위천 건너 오성면 신리 삼동촌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이포진은 1930년 궁안교가 가설되고, 1938년 콘크리트 교량으로 교체되면서 역할이 줄었다가 일제 말 수로가 바뀌고 주변 지역이 간척되면서 사라졌다. ▲ 통복포터로 추정되는 화촌(2011) 2. 통복개(포, 위치: 통복동) 통복천 하류에 있었던 나루이다. 『대동지지』에 ‘진위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양성 가천역 하류로 평택으로 가는 길과 통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1770년경 편찬된 『팽성지』에는 ‘평택현 관아에서 북쪽으로 8리 지점에 있는데, 진위현과 수원부로 갈라지는 경계다’라고 했다. 통복포의 위치는 통복동 화촌으로 보인다. 화촌은 1974년 이전까지만 해도 경기만의 소금과 새우젓, 굴젓이 거래되던 포구였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9호)에서는 ‘안성천의 나루와 포구 - 삽교포’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12-02
  • 평택시史로 보는 ‘조선시대 수로 및 해로 교통유적’ ③
    경양포, 팽성읍 서부·현덕면 신흥포 연결한 수로교통로 옹포, 포면세·대동미 담당... 취급량은 총 16,989석 내외 ▲ 양성현의 해창 청북면 삼계리 옹포(2008) ◆ 직산현과 평택현의 해창(海倉) 경양포(위치: 팽성읍 노양1리 뱃터) 조선 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하양창은 폐지됐다. 태조 5년에 경양현도 폐현(廢縣)돼 직산현 경양면이 됐다. 직산현에 이속된 뒤 경양포에는 직산현의 해창으로 경양창이 설치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직산현 조에 “경양포(慶陽浦)는 경양현(慶陽縣)에 있는데 해포(海浦)이다”라고 했으나 경양창은 나중에 평택현의 세곡까지 관장하게 돼, 직산현과 평택현 두 고을의 해창이 됐다. 경양포는 팽성읍 서부지역과 현덕면 신왕리 신흥포를 연결한 수로교통로이기도 하다. 나루에는 사공이 상주했으며, 근대 이후에는 서평택 주민들이 열차를 이용할 경우 배를 타고 경양포로 건너와 평택역으로 이동했다. ◆ 양성현의 해창(海倉) 옹포(위치: 청북면 삼계2리 옹포) 옹포(瓮浦)는 고려시대 감미부곡이었고, 조선 초 양성현에 편입돼 감미동면으로 편제됐다. 19세기 전반 청구도(1834)에는 ‘저포’라고도 기록됐고, ‘독개’ 또는 ‘양성독개’라고도 불렀다. 옹포는 양성현의 해창이었다. ‘양성군읍지’에 따르면 옹포에서 담당하던 조세는 포면세(浦面稅)와 대동미(大同米)였고, 취급량은 총 16,989석 내외였다. 본래 이곳에 창고 4개가 있었다. 갑오개혁 뒤에 조세가 금납화되는 과정에서 2개로 줄었다. 옹포에서는 세곡(稅穀)뿐 아니라 포구상업도 활발했다. 나루에는 객주와 여각이 있었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경우궁에서 포세(浦稅)와 선세(船稅)를 징수했다. 일제강점기에 옹포 앞으로 장둑이 축조되고 동척농장들이 간척되면서 옹포는 소작료나 공출미를 반출하는 포구가 됐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벼 2백 섬을 실은 배들이 인천 도정공장으로부터 들어와서 벼를 실어갔다. 해방 후 장둑 아래까지 간척되면서 포구로의 기능을 상실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6호)에서는 ‘사창(司倉)’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11-11
  • 평택시史로 보는 ‘조선시대 수로 및 해로 교통유적’ ②
    하양창, 주로 경기남부와 충청북부 일부 지역의 세곡 담당해 해창포, 봉남리-진위천-신장1동-당현리-좌교리 거쳐 세곡 운송 ▲ 하양창이 설치되었던 팽성읍 노양1리 경양포(2002) ◆ 고려 13조창 하양창(위치: 팽성읍 노양1리 뱃터) 고려시대 평택지역의 조창으로는 전국 13조창 중 하양창(河陽倉)이 있었다. 하양창은 팽성읍 노양1리 타이포(또는 편섭포)에 있었다. 조창이 설치된 것은 10세기 초 전국 12조창이 설치되면서다. 『고려사』에 하양창에 한척에 1,000섬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 6척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양창에서는 주로 경기남부와 충청북부 일부 지역의 세곡을 담당했다. 이곳의 세곡을 관리하고 운송하기 위해 외관록 20석을 받는 판관을 배속했고, 세곡의 징수와 관리 그리고 운송책임은 고을의 향리와 백성들로 구성된 뱃사공, 소공, 수수와 같은 조군(漕軍)들이 맡았다. 하양창의 중요성 때문에 노양리 일대를 경양현으로 승격시키고 조세운송과 염(鹽)장관을 겸하게 했다. 하양창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삼남의 해운이 끊기면서 역할이 중단됐고 조선조에는 폐지됐다. ▲ 진위현 해창이 있었던 고덕면 해창3리 창말(2007) ◆ 진위현의 해창(海倉) 해창포(위치: 고덕면 해창3리 창말) 해창3리 창말에 있던 진위현의 해창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해창포(海倉浦)는 현(懸) 남쪽 30리 지점에 있는데 소로(小路)가 수원과 평택 경계로 통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진위현에서는 읍치(邑治) 봉남리에서 진위천-신장1동-당현리-좌교리를 거쳐 해창포에 이르는 소로를 개설해 세곡 운송을 하게 했다. 해창 뱃터는 일제강점 초기 간척사업으로 구동안들이 조성되면서 사라졌고, 조창이 있던 곳에 뱃줄을 매던 팽나무와 창말이라는 지명이 전해온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5호)에서는 ‘직산현과 평택현의 해창(海倉) 경양포’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11-04
  • 평택시史로 보는 ‘조선시대 수로 및 해로 교통유적’ ①
    고려시대에는 하양창 설치... 조선시대에는 고을에 따라 해창과 사창 운영 ▲ 진위천 궁안교 부근(2006) ◆ 조운(漕運) 및 조운유적 조운(漕運)제도는 고려와 조선시대 각 지방에서 국가에 수납하는 세곡(稅穀)을 배를 이용해 서울의 경창(京倉)까지 운송하는 제도다. 이를 위해서 바다와 가까운 강변이나 해안에 조창을 설치했다. 조창의 기능은 지방의 조세를 수취해 보관하거나 선적(船積)해 서울의 경창까지 운송하는 역할이었다. 중앙정부에서는 해운판관이나 수운판관을 파견해 관리했고, 세곡의 수납과 운송을 위해 향리·초공·수수·잡인 등도 조창이 있는 진촌에 거주시켰다. 조운제도가 시작된 것은 고려 초 충주의 덕흥창을 비롯해 전국에 12개의 조창(漕倉)을 설치하면서부터다. 조창은 문종 때 황해도 장연에 안란창이 설치되면서 13조창으로 정비됐다. 고려시대의 조운제도는 13세기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 부실해졌다가 1376년 모든 세곡운송을 육운(陸運)으로 대체하면서 폐지됐다. 조선은 건국 후 과전법을 실시하면서 조운제도 복구에 노력했다. 15세기 초에는 황해도에서 남해안 섬진강 하구에 이르는 해안과 수로에 조창이 설치됐고 한양에는 경창이 세워졌다. 『경국대전』에 조선 초의 해운 및 수운창은 모두 9개였다. 서남해안에는 모두 4개의 조창이 설치됐다. 조운제도는 그 후 몇 차례의 변동을 겪으며 갑오개혁 때까지 유지됐다. 조세의 징수와 운송을 주관하는 관청은 호조, 주교사, 그리고 조선후기에는 선혜청이었고, 실무책임은 각 조창에 파견된 해운판관이 담당했다. 세곡의 운송 규정은 매우 엄격했다. 30척이 하나의 선단을 유지해야 하고, 역풍이 불어 휴박해야 할 때는 지방 수령은 관찰사와 호조에 보고한 뒤 임시감독관을 임명해 지켜야 했다. 또 선적량을 규정했는데 충청도와 전라도의 조운선은 800석, 경상도는 1,000석 이상을 싣지 못했고 이것을 어긴 경우 중벌을 받았다. 평택지역은 고려시대에는 하양창이 설치됐고, 조선시대는 경기도에 포함되면서 하양창이 폐지되고 고을에 따라 해창과 사창을 운영했다. 해창은 진위현의 해창이었던 해창포와 양성현의 해창이었던 옹포, 직산현과 평택현의 해창이었던 경양포가 있었다. 이밖에 수원부의 사창이었던 설창과 직산현의 사창이었던 안중창 등 각 고을의 사창이 있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4호)에서는 ‘고려 13조창 하양창’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10-28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④
    소사원, 삼남대로 구간의 마지막 원... 충청도에서 넘어오는 관문 역할 상원, 평택현 구간에 있었던 유일한 원... 안정리 서정자 마을로 추정 ▲ 삼남대로 소사원터(2012) ◆ 원(院) 1. 소사원(素沙院, 위치: 소사1동 원소사 마을) 소사동은 1914년 이전에는 양성군 (현) 구룡동면에 속했다. 삼남대로는 소사동 북쪽에서 당산을 넘어 소사원을 지나 소사교를 건넌 뒤 소사벌을 지나 곧장 남쪽으로 내려갔다. 소사원은 삼남대로 경기도 구간의 마지막 원이어서 충청도에서 넘어오는 관문(關門) 역할을 했고, 제8대로(충청수영로)의 분기점이기도 해서 원이 설치됐다. 조선후기에는 소사장이 개장됐고, 호서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의 공적을 기려 ‘대동법시행기념비’가 세워졌다. 소사원은 갑오개혁(1894) 때까지 존속됐다가 폐원된 것으로 보인다. 소사원이 폐원된 뒤에는 소사점이 운영됐으며, 소사장도 1920년대 초까지 유지됐다. 현재 소사원 터는 민가로 변했고 옆에는 소사동미륵이 있다. 2. 상원(上院, 위치: 팽성읍 안정리...추정) 조선시대 충청수영로 평택현 구간에 있었던 유일한 원(院)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현(縣) 서쪽 5리 지점에 있다’라 했지만, 18세기에 편찬된 사찬 ‘팽성지’에는 ‘관문 동쪽 5리 지점에 있는데 여지지에는 실려 있지만 현재는 없다’라 했다. 조선 중기까지는 운영되다가 18세기 초쯤 폐원된 것으로 보인다. 상원은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관문의 동쪽 5리 지점이라고 했으므로 안정리 서정자 마을(K-6미군기지 건설로 폐동됨) 쯤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3호)에서는 ‘조선시대 수로 및 해로 교통유적’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10-24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③
    백현원, 진위현 읍치에서 10리 지점 소재... 여행자들이 쉬어 갔던 곳 갈원, 진위현 읍치에서 20리 거리 설치... 삼남대로 평택 구간 대표적 원 ▲ 삼남대로 백현원이 있었던 송북동 염봉(2002) ◆ 원(院) 1. 백현원(白峴院, 위치: 송북동 동막마을 서북쪽 염봉재 중턱) 백현원은 삼남대로 소백치 중턱에 있었다. 이곳은 진위현의 읍치에서 10리 지점이었다. 백현원은 소백치와 대백치 사이에 있어서 여행자들이 쉬어 갔던 원이었다. 백현원에는 조선 세종 때의 명재상이었던 맹사성의 ‘공당문답’ 고사가 전해온다. 맹사성의 집은 아산시 배방면이어서 한양을 오가려면 충청수영로를 따라 올라오다가 소사원이나 갈원에서 삼남대로와 만나 백현원을 지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백현원은 19세기 이전에 폐원됐고, 대신 동막마을 입구 사거리에 우곡점이 개점돼 역할을 대신했다. 현재 백현원 터는 소백치(염봉재) 중턱에 있으며, 2002년 건설한 삼남로 확장공사에서도 비껴나 남아있다. ▲ 삼남대로 평택구간의 큰주막 칠원1동 갈원(2013) 2. 갈원(葛院, 위치: 칠원1동 주막거리) 갈원은 삼남대로 평택 구간의 가장 대표적인 원(院)이었다. 이곳은 대백치 너머에 있었고, 진위현의 읍치에서 20리 거리여서 원이 설치됐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라 역사적 사건에 연루되거나 전해오는 이야기도 많다. 유적으로는 이괄의 난 때 관군에게 패한 이괄이 숨어 있었다는 ‘이괄의 절터’가 있고 공주로 피난 가던 임금이 물맛에 감탄해 옥관자를 내렸다는 ‘옥관자정’이 있다. 1728년(영조 4)에 발생한 ‘무신 난’에는 갈원의 토호 김정현과 박영동이 주민들을 동원해 난에 참여하려다가 실패한 일도 있었다.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의 중심이어서 옥관자정 옆에 칠원1동 새마을운동공적비가 남아있고, 진위현령 이혜주의 송덕비도 함께 있다. 갈원은 19세기 전후 원(院)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민간 점막(店幕)들이 들어서면서 역할을 대신했다. 점막들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하나둘씩 사라졌고 현재는 상가건물이 들어섰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2호)에서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 소사원(素沙院)’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10-14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②
    이방원·장호원·백현원·갈원·소사원과 충청대로에 상원 등 6개 원 설치돼 ▲ 장호원이 설치됐던 진위면 신리(2006) ◆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근대 이전의 육로교통로에는 역(驛)과 원(院), 사설 주막 등의 시설이 있었다. 우물이나 대로와 관련된 구전설화 유적들도 중요하다. 조선 전기 평택지역에는 6개의 원과 2개의 역이 있었다. 6개의 원은 이방원·장호원·백현원·갈원·소사원 그리고 충청대로에 있었던 상원이며, 역은 청호역과 화천역이었다. ◆ 원(院) 1. 이방원(李方院, 위치: 진위면 갈곶리) 진위면 갈곶2리와 청호리 아랫청호마을 사이에 있었던 원(院)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진위현의 읍치(邑治)였던 봉남리에서 10리 거리에 있었다고 기록됐다. 1843년 ‘진위현읍지’에는 ‘승람에는 실려 있으나 없어진 지 오래돼 터만 남았다’고 해 19세기 이전에 폐원(閉院)된 것으로 보인다. 2. 장호원(長湖院, 위치: 진위면 신리) 진위면 신리에 있었던 원(院)으로 진위현의 읍치에서 2리 지점에 있었다. 조선 전기 삼남대로는 진위면 갈곶리 산직촌에서 봉남리를 거쳐 신리로 연결됐는데, 장호원은 진위천 건너 첫 번째 원이었다.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추정할 때 신리 동쪽 원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전기 장호원 옆에 ‘인침담’이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온양을 다녀오는 맹사성을 문안하려다 실수한 진위·양성·평택고을 수령들이 관인(官印)을 연못에 빠뜨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장호원은 19세기 이전 폐원된 것으로 보이며, 인침담은 19세기 후반 개간사업으로 사라졌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1호)에서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 백현원(白峴院)’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10-07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①
    조선전기 6개의 원과 2개의 역... 육로교통로에는 사설 주막 등 시설 ▲ 팽성읍 추팔1리 역말(2008) ◆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근대 이전의 육로교통로에는 역(驛)과 원(院), 사설 주막 등의 시설이 있었다. 우물이나 대로와 관련된 구전설화 유적들도 중요하다. 조선전기 평택지역에는 6개의 원과 2개의 역이 있었다. 6개의 원은 이방원·장호원·백현원·갈원·소사원 그리고 충청대로에 있었던 상원이며, 역은 청호역과 화천역이었다. ◆ 역(驛) 1. 청호역(위치: 오산시 원동 역말) 수원부 동화도에 속했다가 세조 때 경기좌도 찰방(察訪)에 속한 역(驛)이 됐다. 행정구역으로는 본래 수원부에 속했지만 1424년(세종 6)에 진위현으로 이속했다. 하지만 진위현은 민호(民戶)가 적은 고을인데 청호역을 떼어 맡아 사신접대의 비용과 폐해가 크다고 해서 세종 20년 수원부에 다시 이속했다. 조선후기의 고지도에는 청호주막이라고 기록돼 역의 기능이 약화되고 점막으로서 역할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화천역(위치: 팽성읍 추팔1리 역말) 화천역은 충청수영로의 첫 번째 역(驛)이었다. 1462년(세조실록 8)의 기록에는 화천역은 금정역 등과 함께 시흥역승의 관할을 받았다가 성환찰방으로 옮겼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평택현의 읍치(邑治)에서 동쪽으로 5리에 있었고 조선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와 『팽성지』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역의 위치는 팽성읍 추팔1리 동쪽으로 비정되며, 마을 안에는 마장(馬場) 터로 추정되는 곳과 우물 2개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50호)에서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 - 원(院)’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9-30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유천동’ 지명 유래
    조선후기 진위현 지역... 냇가에 버드나무 많아 ‘버드내’라고 불러 ▲ 유천2동 본유천(2010) ◆ 유천동(柳川洞) 조선후기 진위현 병파면과 양성현 영통면 지역이었다. 1914년 상유천리·하유천리·양성군 구룡면 소사리·동역리 일부를 통합해 병남면 유천리라고 했다. 유천리라는 지명은 냇가에 버드나무가 많아 ‘버드내’라고 했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1. 양성버드내: 유천1동의 자연마을. 1914년 이전에는 양성군에 속해 유래됐다. 삼남대로가 지나는 길목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안성천 변에서 사금을 많이 채취해 ‘사그막 동네’라고도 불렀다. 2. 진위버드내: 유천2동의 자연마을. 진위현에 속해 유래됐다. ‘본유천’ 또는 ‘버드내’라고도 부른다. 3. 직산말: 유천3동의 자연마을. 조선후기 직산현에 속해 유래됐다. 4. 새말: 유천3동에서 가장 큰 마을. 5. 황룡동: 유천3동의 자연마을. 6. 유천교: 국도 1호선 유천동 부근 안성천을 건너는 콘크리트 다리. ‘흰다리’라고도 불렀다. 7. 안터: 유천1동과 2동 사이에 있었던 마을. 버드나무가 100여 그루 있었지만 화재가 빈번하면서 폐동됐다. 8. 앞뜨미·뜨뜨미: 유천1동의 자연마을 이름. 9. 십한구덩이: 유천1동 동쪽 400m 지점에 있는 물웅덩이. 10. 새마답: 유천1동 하천 변의 지명. 풀과 갈대가 많아서 쇠풀을 뜯기가 좋았다. 11. 사천배기: 유천1동에서 2동으로 넘어 가는 굴다리 부근 지명. 커다란 말 무덤이 있었다. 청일전쟁 때 전사한 일본군 4천 1백 명의 무덤 또는 옛날 말을 타고 싸우다가 전사한 장군의 무덤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9호)에서는 ‘평택지역 육로교통 유적’이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9-23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월곡동’ 지명 유래
    조선후기 양성현 반곡면 지역... 1914년 원구리에 관동 통합해 ▲ 망월대가 있었던 월곡1동 월구리(2012) ◆ 월곡동(月谷洞) 조선후기 양성현 반곡면 지역. 1914년 원구리에 관동을 통합해 안성군 원곡면 월곡리라고 했다. 월곡1동 뒤에 망월대(望月臺)가 있어 유래됐다. 1. 달곡: 월곡동의 우리말 이름. ‘달구리’라고도 한다. 2. 관동(官洞): 월곡2동의 자연마을. 옛날 관아가 있어 관동, 귀한 사람들이 살았다고 해서 ‘귀골’, ‘구골’이라고도 불렀다. 마을 안에 골밭·향교동·옥터골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3. 새터말: 새로 형성된 마을. 4. 망우재: 월곡1동 뒷산으로 망월대가 있어 ‘망운대’ 또는 ‘망우재’라고 했다. 5. 백운산: 월곡동과 안성시 양성면 반제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큰산고개’라고도 한다. 정월 초하루에 월곡1동 마을에서 해돋이 행사를 한다. 6. 전의 이씨 효부 정문: 월곡1동 월구리와 2동 관동 사이에 있는 조한기의 처 전의 이씨 효부 정문. 1705년에 정려됐다. 7. 아래골: 월곡2동 마을 앞의 골짜기. 8. 요골: 월곡2동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그릇을 굽는 가마가 있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8호)에서는 ‘평택시 청룡동(靑龍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9-16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죽백동’ 지명 유래
    조선후기 양성현 반곡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침교리·내촌 통합 ▲ 죽백1동 방아다리(2010) ◆ 죽백동(竹柏洞) 조선후기 양성현 반곡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침교리, 내촌을 통합해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라 했다. 1983년 평택시로 편입됐다. 죽백3동이 삼남대로가 지나가는 고개여서 ‘재빼기’라고 했다가 음이 비슷한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유래됐다. 1. 방아다리: 죽백1동의 마을이름으로 ‘침교砧橋’라고도 쓴다. 마을 앞 청룡천에 방아공이로 다리를 놓았다 해서 유래됐다. 2. 내촌: 방아다리의 안쪽에 형성된 마을로 ‘안골’이라고도 부른다. 3. 재빼기: 죽백3동의 마을. 삼남대로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에 해당돼 ‘재빼기’ 또는 ‘북백’이라고 했다. ▲ 죽백1동 배과수원(2012) 4. 대문재: 재빼기 입구에 해당한다. 옛날에는 하마비가 있어서 말에서 내려 걸어서 넘어갔다고 한다. 5. 산장너머: 방아다리 서쪽 마을로 산장모퉁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산장이 있었다. 6. 속뜸: 방아다리 안쪽마을로 ‘속두모퉁이’라고도 한다. 7. 강당말: 죽백초등학교 주변 마을. 글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다. 8. 수여지: 강당말 앞쪽의 논. 모를 심고도 물이 남아서 유래됐다. 9. 꽃밭재: 강당말에서 용이동 신흥마을로 넘어가는 낮은 고개. 10. 골품고개: 내촌에서 재빼기로 넘어가는 고개. 11. 삼태봉: 내촌 뒷산으로 모양이 삼태기처럼 생겼다. 12. 가내: 삼남대로가 지나는 길목으로 통복천 냇가에 위치해 ‘가내’라고 했다. 근대 전후에는 가내주막이 있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7호)에서는 ‘평택시 월곡동(月谷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9-02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용이동’ 지명 유래
    조선후기 양성현 구룡동면... 1914년 현촌, 양성군 도일면 신흥 통합 ▲ 택지개발로 사라진 용이동 현촌마을(2008) ◆ 용이동(龍耳洞) 조선후기 양성현 구룡동면 지역이었다. 백운산에서 뻗어 내린 산맥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동쪽은 용머리 형상으로 안성군 공도면 용두리를 이루고, 서쪽은 용(龍)의 귀(耳) 언저리에 해당된다고 해서 용이(龍耳)라고 했다. 1914년 현촌과 양성군 도일면의 신흥을 통합해 용이리라고 했다. 1983년 평택군 평택읍에 편입됐다. 1. 구룡동(九龍洞): 백운산으로부터 산맥이 동남향으로 뻗어내려 느름골·배오개골·신선골·오른가리골·미나올골·옥골·소사물골·자바사리골 등 아홉 골짜기를 도는데 아홉 마리의 용이 용트림을 하는 형국이라 해서 유래됐다. 조선후기 양성현 구룡동면의 중심마을이다. 2. 현촌(玄村): 본래 달성 서씨가 거주해 서촌이라고 하다가 연주 현씨가 대성(大姓)을 이루면서 현촌으로 바뀌었다. 2012년 용죽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폐동됐다. 3. 신흥(新興): 조선후기 양성현 도일면에 속했다. 본래는 마을 남동쪽 쑥밧갓(평안교회 일대)에 마을이 있었지만 도둑이 많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4. 왕자봉(방): 구룡동 뒤쪽의 산봉우리. 옛날 왕이 지나가다가 쉬어갔다고 해서 유래됐다. 5. 신흥리고개: 고룽동에서 신흥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6. 오룡굴: 현촌 동쪽의 골짜기. 오룡가리라고도 했다. 7. 선가자리: 배다리저수지 위쪽으로 옛날 배가 들어왔던 나루터. 8. 배오개: 신흥마을 서북쪽에 길게 형성된 골짜기.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6호)에서는 ‘평택시 죽백동(竹柏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8-26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소사동’ 지명 유래
    조선후기 양성현 구룡동면 지역... 1983년 평택군 평택읍에 편입 ▲ 삼남대로 소사원이 있었던 소사1동 원소사마을(2013) ◆ 소사동(素沙洞) 조선후기 양성현 구룡동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소사리에 송전·자기촌·동역리·서재곡을 통합해 안성군 공도면 소사리(동)라 했다. 1983년 평택군 평택읍에 편입됐다. 소사素沙라는 지명은 소사벌이 흰모래밭이었기 때문에 유래됐다. 1. 원소사: 소사1동의 자연마을. 경기도의 관문이었던 소사원이 있었고, 소사동대동법시행기념비와 소사장이 있었다. 2. 서재곡: 소사2동의 자연마을. ‘서지골’ 또는 ‘쇠죽골’이라고도 부른다. 양성현의 사창육고 가운데 하나로 조선시대 세곡을 싣고 합정동 창말의 조창으로 가던 도중에 소에게 여물을 먹였던 데서 유래됐다. 3. 동역말: 소사동의 옛마을. 현재는 마을 터만 남았다. 4. 송전: 소사3동의 자연마을. 소나무가 우거져 ‘솔밭말’이라고도 한다. 동방학교가 있다. 5. 자기촌: 솔밭말 옆 마을. 6. 소사벌: 소사동 남쪽 소사천에서 안성천 사이의 벌판 이름. 평택평야의 곡창지대이면서 들판 가운데로 삼남대로가 지나갔다. 7. 소사벌대첩: 조선 1597년(선조 30) 9월 5일에 소사벌에서 있었던 명나라 군대와 왜군 사이의 전투. 정유재란으로 재침한 왜군이 진주성과 남원성을 함락하고 삼남대로를 따라 북상하다가 해생·우백영牛伯英·양등산楊登山·파귀頗貴가 이끄는 명나라 기병에게 대패한 전투. 8. 소사원: 조선시대 삼남대로가 지나가는 소사1동에 설치한 국영 주막. 조선후기에 폐원됐다. 9. 소사천: 안성천의 지류로 소사동 남쪽을 흘러가는 하천. 10. 대동법시행기념비: 조선 효종 때 호서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金堉(1580-1658)의 공덕을 기려 충청도 백성들이 세운 시혜비. 본래 소사원 옆에 있던 것을 1970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11. 당산: 소사1동 뒷산. 할아버지 당목과 할머니당인 미륵당이 있다. 12. 북내리고개: 소사1동 위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13. 소사동미륵: 소사1동 옛 소사원 옆에 있는 마을미륵. 14. 소사장(터): 조선후기에 형성된 장시. 매월 5일과 10일에 개시開市하다가 평택장과 개시일이 겹치면서 1920년대 폐장됐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5호)에서는 ‘평택시 용이동(龍耳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8-19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신대동’ 지명 유래
    조선시대 진위현 성남면 지역... 안성천 갯가에 형성되어 ‘신대’로 표기 ▲ 평택시 신대2동 새터마을(2012) ◆ 신대동(新垈洞) 조선시대 진위현 성남면 지역이었다. 안성천 갯가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어서 ‘새터’라고 했던 것을 ‘신대(新垈)’로 표기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성남면 고잔리, 신대리, 오타면 삽교리를 통합해 신대리(동)라고 했다. 1. 새터(말): 신대리의 중심마을. 조선후기 안성천 갯가에 새로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원신대라고도 한다. 2. 삽교: 신대교를 가설하기 전에는 섶다리를 놓고 도일천을 건너다녀서 유래됐다. 옛날에 포구가 있었다. 3. 고잔: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시절 곶(串)이 형성된 곳에 포구와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마을에 고잔포가 있었다. 4. 고잔교: 고잔마을 입구에 1958년에 가설한 다리. 5. 서바탱이: 번개들 서쪽 끝에 새로 형성된 마을. ‘신설촌(新設村)’ 또는 ‘석바랑’이라고도 부른다. 평택상공회의소 등이 있다. 6. 신대레포츠공원: 2002년 개장한 35,000㎡ 넓이의 레포츠공원. 축구장·야구장·테니스장·궁도장·어린이놀이터 등이 갖춰져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4호)에서는 ‘평택시 소사동(素沙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8-15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지제동’ 지명 유래
    조선후기 진위현 성남면... 1914년 지제리·울성리·영신리 일부 통합 ▲ 평택시 지제동에 위치한 평택지제역 ◆ 지제동(芝制洞) 조선후기 진위현 성남면이었다. 1914년 성남면 지제리·울성리, 오타면 울성리, 여방면 영신리 각 일부를 통합해 지제리라 했다. 고갯마루에 마을이 형성돼 ‘뒤재’라고 했던 것을 음이 변해 지제가 됐다고 한다. 1. 구대(舊垈): 지제동의 자연마을. 500여 년 전 단양 우씨가 터를 잡았고 나중에 연안 차씨가 입향해 마을을 이루었다. 2. 당현: 구대에서 여염리 방면으로 넘어가는 산마루에 서낭당이 있어 당고개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당현이라고 함. 당재말이라고도 하며 지제동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3. 우물말: 당현의 자연마을. 공동우물이 있다. 4. 북우물: 당현 북쪽의 우물가에 형성된 마을. 계곡 사이에서 건수가 나오는 우물이 있어 허드렛물로 사용했다. 5. 울성: 성종의 14남 웅천군파와 15남 양원군파가 개척한 전주 이씨 동족마을이다. 고덕면 방축리성과 태미산성의 울안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6. 새터: 구대마을 북동쪽에 형성된 마을. 7. 태미산: 당현과 울성 사이에 있는 산. 도일천 방면으로 불룩하게 솟았고 고려시대에 산 성이 있었다고 한다. 8. 울성저수지 : 울성마을 뒤쪽에 있는 저수지. 옛 문헌에는 도일천 변에도 울성보가 있었 다고 한다. 9. 봉골저수지: 당현마을 북쪽 골짜기에 있는 저수지. 2013년 삼성전자 평택사업장 안에 포함됐다. 10. 지제역 : 2006년에 개통한 서울-천안(신창) 간 노선 전철역.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3호)에서는 ‘평택시 신대동(新垈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8-02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군문동’ 지명 유래
    갑오개혁 뒤 진위군에 속해... 1914년 간포리 합쳐 군문리라 불러 ▲ 군문포 포구마을 군문1동(2013) ◆ 군문동(軍門洞)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평택현에 속했다가 갑오개혁 뒤 진위군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간포리를 합쳐 군문리라 했다. 1. 군문포: 군문교 아래에 있었던 포구. 1894년 이전까지는 ‘군물포’라고 했다가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사가 주둔하면서 군문포가 됐다.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평택현 군물진리였고, 갑오개혁 뒤 진위군 병파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진위군 병남면 군문동이 됐다. 근대전후에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건너가는 안성천 나루였고, 근대 이후 평택역이 설치되면서 군문교가 놓이고 국도 45호선이 가설되면서 평택장과 아산만 일대의 소금과 해산물을 연결하는 통로가 됐다. 2. 간포: ‘샛개’라고도 한다. 군문1동에서 유천동으로 건너하는 지하차도 부근에 있던 포구마을인데 수해를 입어 주민들은 이동하고 마을은 폐동됐다. 3. 군문교: 일제강점기 초 국도 45호선이 가설되면서 목교(木橋)로 놓였다가 1930년 평택지역 최초의 콘크리트 다리로 바꿨다. 본래 평택교라고 했으며 해방 후 군문교로 바꿨다. 4. 망근다리: 안성천을 건너는 경부선 철교.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대의 망군대(망루)가 있던 곳에 철교가 놓이면서 ‘망군다리’라고 했던 것을 음이 변해 망근다리가 됐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2호)에서는 ‘평택시 동삭동(東朔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7-22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세교동’ 지명 유래
    진위군 병남면 지역... 통복천 건너는 작은 다리 있어 ‘세교’, ‘잔다리’ ▲ 전통마을과 아파트가 공존하는 세교동(2009) ◆ 세교동(細橋洞) 진위군 병남면 지역으로 통복천을 건너는 작은 다리가 있어 ‘세교’ 또는 ‘잔다리’라고 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은실리를 통합해 병남면 세교리라 했다. 1. 안잔다리: 잔다리의 중심마을. 잔다리에서도 안쪽에 위치해 안잔다리 또는 윗동네라고 불렀다. 2. 벌잔다리: 잔다리에서 동쪽 벌판 쪽으로 나앉은 마을. 아래잔다리 또는 아랫동네라고도 불렀다. 1990년대 초 세교지구 택지개발공사로 폐동됐다. 3. 새말: 통복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 막일하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형성한 마을. 1990년대 초 세교지구 택지개발로 폐동됐다. 4. 신촌: 경동보일러 건너편 마을. 일제강점기에는 뽕나무밭이었다가 한국전쟁 때 피난민정착사업소가 만들어지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5. 은실: 중앙초등학교 일대 마을. 6. 큰은실: 은실마을에서 큰 마을. 7. 작은은실: 중앙초등학교 좌측 모퉁이 마을. 돌산 아래에 마을이 형성돼 ‘산아래’라고도 부른다. 은실에서 작은 마을이었다. 8. 은곡: 은실 안쪽 움푹 패인 계곡. ‘음곡’이라고도 한다. 금녕 김씨가 처음 입향한 곳이다. 9. 동산아래: ‘산밑창’이라고도 부른다. 상공회의소 뒤편에 있는 마을로 작은 구릉 아래에 마을이 형성됐다. 10. 봉학골: 1980년대 초 옹기굽던 정석헌 씨가 택지를 조성하고 주민들을 입주시키면서 형성된 마을. 11. 신흥: 봉학골 천주교 공동묘지에 자리 잡은 마을. 처음에는 천주교 교우촌으로 개발되다가 1990년대 초 낙촌지역이 택지개발 되면서 나머지 주민들이 이주해 형성한 마을. 12. 번개방죽: 안잔다리에 있었던 방죽. 모내기를 할 때 잔다리 일대에 물을 공급했다. 13. 당산: 은실마을 뒤쪽의 산. 은실마을 제당이 있으며 밭농사지대로 개발됐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1호)에서는 ‘평택시 군문동(軍門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7-15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합정동’ 지명 유래
    조선후기 진위현 병파면 지역... 1914년 합정리·조산리·야미리 통합 ▲ 합정주공아파트에서 바라 본 합정동 일대(2009) ◆ 합정동(蛤井洞) 조선후기 진위현 병파면 지역이었다. 1914년 합정리·조산리·야미리·양성군 구룡동면 창리·서제곡·야미리 각 일부를 통합해 합정리(동)라고 했다. 굿모닝병원·소사벌레포츠타운·청소년문화센터·롯데마트 평택점·평택고등학교 등이 있다. 1. 조개터: 합정동의 본래 이름. 소사천과 백랑천이 가까이 흘러 바닷물이 드나들 때는 말조개, 부전조개(재첩)를 잡았다고 해서 유래됐다. ‘합기(蛤基)’ 또는 ‘합정’이라고도 부른다. 2. 통미: 합정동 주공3단지아파트 북쪽 마을. 1905년 경부선철도 건설과 관련된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고 그 뒤 다양한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3. 배미: ‘야미(夜味)’라고도 부른다. 하천방향으로 돌출된 조산자락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루가 있는 마을에서 유래됐다는 주장도 있다. 4. 됫박산: 합정동 주공3단지 안에 있었던 해발 10.2m 높이의 산. 됫박산 마을과 마을제당이 있었지만 1990년경 아파트공사로 사라졌다. 5. 창말: 롯데마트와 합정감리교회 자리에 있었던 마을. 조선후기 양성현의 사창육고 가운데 하나가 있었다. 6. 소금장고개: 조개터에서 조산을 넘어가는 고개. 소금장수들이 넘나들었다고 한다. 7. 조산: 소사벌레포츠타운과 배미 사이에 있는 산 8. 소사벌레포츠타운: 1978년 조개터와 배미 사이 평택종합운동장으로 신설된 스포츠타운. 종합운동장·축구장·농구장·수영장·인라인스케이트장 등을 갖추고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40호)에서는 ‘평택시 세교동(細橋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7-08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비전동’ 지명 유래
    조선 후기 큰길가에 비석이 있어 ‘비석거리’, ‘비전’이라 부르면서 유래 ▲ 동삭동 아파트 밀집지역(2021.10.01.) ◆ 비전동(碑前洞) 비전1동·동삭동·죽백동·청룡동·월곡동·동삭동 일부 지역과 비전2동 소사동·용이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며, 비전1·2동을 관할하는 법정동이다. 조선시대 진위현 병파면 지역이었고, 1914년 병남면으로 통합됐다. 조선후기 큰길가에 비석이 있어 ‘비석거리’ 또는 ‘비전(碑前)’이라고 부르면서 유래됐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 때 어인남리·산직촌·양성군 구룡동면 창리·서재곡의 일부를 병합해 병남면 비전리라 했다. 1986년 평택시로 승격되면서 비전동이 됐고, 도시 발전에 따라 비전1·2동으로 분할됐다. 1. 어인남리: 비전2동 관할의 자연마을. 덕동산 동쪽에 위치했으며 조선후기에는 ‘남리(南里)’라고 불렀고 지금은 ‘어인남리’ 또는 ‘어린내미’라고 부른다. 양성 이씨와 순흥 안씨가 많이 거주하며 일제강점기 계인조합이 조직돼 ‘계인’이라고도 부른다. 2. 자란(紫蘭): 비전1동 관할의 자연마을. 본래 원곡방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어서 ‘재랭이’, ‘당재’라고 부르다가 2000년 경 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자란’으로 고쳤다. 무속인들이 많이 거주해 ‘당골’이라고도 한다. 3. 은성(銀城): 자란마을 고갯마루의 이름. 평택천주교회 평택성당 뒤에 1,300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은행정’ 또는 ‘은성’이라고 했다. 4. 산직촌(山直村): 소사벌택지지구 안에 있었던 자연마을. 주변지역에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인 과수농장을 중심으로 배 과수농업이 발달해 ‘이곡(梨谷)’ 또는 ‘배나무골’이라고도 불렀다. 2008년 전후 소사벌택지지구 조성으로 폐동됐다. 5. 문화촌(文化村): 한국 전쟁 뒤 피난민들이 정착해 피난민촌이라고 부르다가 문화촌으로 바꿔 불렀다. 문화촌 남동쪽 지역은 1960년대 전후 전라도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전라도촌’이라고 구분해 불렀다. 6. 상신작로(上新作路): 평택여중사거리에서 한전 평택지사 사이 도로변에 형성된 마을. 옛국도 38호선 변 신작로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7. 하신작로: 옛 국도 38호선 평택여중 사거리에서 성동초등학교 사이의 신작로에 형성된 마을. 8. 낙촌: 삼각산 뒤쪽에 형성된 마을. ‘낭떠러지기’라고도 부른다. 본래 천주교인들이 운영하는 옹기점이 있었고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다가 1990년 택지개발에 따라 단독주택단지가 조성됐다. 9. 삼각산: 자란마을 뒷산. ‘자란산’ 또는 ‘재랭이산’으로도 부른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자란마을의 제당이 있었다. 10. 덕동산: 1978년 4월 충혼탑이 건립돼 ‘충혼산’ 또는 ‘탑산’이라고 부르다가 1986년 평택시 승격을 기념해 산 정상에 덕동루를 세우면서 ‘덕동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1. 매봉: 신한중고등학교 뒷산. ‘응봉산’이라고도 한다. 일제가 작성한 조선고적조사 자료에는 ‘용봉산’ 또는 ‘매봉산’이라고도 기록됐다. 기우단이 있어 신성하게 여겼다. 12. 배다리저수지: 소사벌택지지구 안에 있는 저수지. 13. 부처지골: 덕동산 동북쪽 골짜기. 전통사찰 명법사가 있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39호)에서는 ‘평택시 합정동(蛤井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7-01
  • 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시 평택동’ 지명 유래
    구 평택시 번화가로 평택역·상가·식당 밀집... 각종 관광 위락시설 집중돼 ▲ 평택역과 시가지 드론 촬영(2021.1.18) ◆ 평택동(平澤洞) 경부선 평택역 앞에 형성된 평택리가 시작이다. 평택리는 한국전쟁 이후 시가지 중심이 철로 동쪽으로 옮긴 뒤 중부출장소는 평택1·2·3리, 서부출장소는 4·5·6·7리를 관할하게 했다. 1986년 평택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1·2·3리는 평택동이 됐고, 4·5·6·7리는 서부동이 됐다. 평택동은 구 평택시의 번화가로 평택역과 공공기관, 상가와 식당들이 밀집했고, 각종 관광 위락시설이 집중돼 있었다. 1. 평택역: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설치된 기차역. 한국전쟁 때 유엔군의 폭격으로 크게 파괴돼 종전 뒤 철로 동쪽(평택동)으로 옮겼다. 2009년 민자역사가 건축되고 역 구내에 AK플라자 평택점(애경백화점)이 입주했다. 2. 새시장: 평택읍 시절 평택1리 지역. 1963년 평택읍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통복시장 이전을 추진하기 위해 새시장 조성공사를 시작했다가 중단한 마을이다. 지금은 식당들이 밀집하고 평택지역 대표음식인 폐계닭을 판매하는 식당들이 많아서 먹자골목 또는 폐계닭골목으로 부른다. 3. 명동골목: 평택읍시절 평택2리 지역. 1953년경 시가지의 중심이 철도 동쪽으로 옮긴 뒤 식당과 술집·상가들이 밀집한 최고의 번화가다. 4. JC공원: 평택이 한국청년회의소(한국JC)의 발상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됐다. 한국JC는 주한미제5공군 정훈장교 메닝스포츠우드 중위에게 소개받은 평택지역 12명의 젊은이들이 서정빈을 중심으로 1951년 12월 23일 발기인 모임을 가졌다. 1952년 2월 ‘평택청년애향사업회’가 조직됐고 점차 확산이 돼 ‘한국청년회의소’가 설립됐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38호)에서는 ‘평택시 비전동(碑前洞)’ 지명 유래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 평택시사(平澤市史)
    202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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