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마르조바(안녕)”에 이어 “마드로바(감사)”로 여는 나른한 오후. 부지런히 내달려 진발리 인공호수가 내려다뵈는 아나누리 성채에 당도했다. 칙칙한 회당 내부야 보면 볼수록 오십 보 백 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고 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 중인 아줌마 부대만 보고서 냅다 올라간 성벽 체험은 하마터면 큰일을 치를 뻔했다. 막상 난간조차 없는 데를 기어 올라가니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금세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이었는데, 설상가상 한 사람 겨우 지나갈 만한 비좁은 길목에 퇴로마저 막혀있어 둔한 몸을 돌려 갔던 길로 되돌아 내려올 때까지 우리 부부는 내내 서로의 새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제야 탁 트인 시야에 들어온 주변 산수화. 과연 물의 나라다웠다. 기껏 트빌리시(상주인구 120만 남짓)를 벗어났다며 이만치 상큼한 기분이 될 줄이야! 불과 하루해도 못다 채운 체류 기간을 두고도 총인구의 1/3가량이 모여 살다 보니 가당찮은 착시현상이 벌어진 참이 아닌가. 기실 기독교 철학으로 최종학위를 마친 처지에서 어쩌면 숨 가쁘게 쏟아내는 해설자의 말잔치로부터 해방감을 맛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산세가 빼어난 구다우리를 출발하여 조지아와 러시아의 우정을 다짐하는 기념물을 딛고 조망한 악마의 협곡은 흡사 그 옛날 선녀가 몸을 씻은 금강산계곡처럼 보였다. 우리 부부의 눈길은 어느새 주먹 크기 사파이어를 빼닮은 둠벙에 꽂혀있었다. 사방에 초점을 둔 사진을 남긴 뒤 카즈베기로 이동하는 길. 구불구불한 산간도로에는 러시아로 향하는 트럭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세계사 전반을 관통한 전천후 해설가의 막힘없는 명강의. 하지만 직전에 꽂힌 동영상에서 미처 헤어나오지 못한 탓인지 그동안 귀담아듣던 기독교 이면사마저 귀에 잘 들어오질 않았다. 카즈베기에서 곧장 사륜구동 차량으로 올라간 해발 2,170m 언덕. 저만치 아득히 뵈는 산정은 자그마치 5,047m나 되는 고점이라서 사철 만년설이 쌓여있을 수밖에 없겠다. 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교회는 트레킹을 즐기는 이들의 쉼터라고 해도 될성부르다. 14세기에 지어져 국가적 재난을 당할 때마다 귀중한 유물을 지켜온 공력이 크다는데, 촬영을 금지한 실내보다는 냉큼 밖으로 나와 떼로 몰려다니는 산중턱의 운무를 카메라 화면에 담는 편이 유용하리라.
▲ 조지아를 지탱한 놀라운 자연환경
조지아 대자연의 특징은 일단 거대한 산자락을 뒤덮은 초록빛에 다초점을 맞출 수 있다. 가도 가도 끊이지 않는 대초원의 향연. 조지아인들이 국운을 걸고 지켜내야 할 국부의 우선순위는 자연유산인 셈이다. 시나브로 짙푸른 경치에 빠져들다 보면 비몽사몽이 되어 풀을 뜯는 양무리가 영락없이 구더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소 떼가 바쁜 길손의 앞을 가로막을 수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짐승처럼 본분에 충실한 존재가 또 있을까?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들은 탐욕에 골병이 들고 급기야는 기후위기를 불러 오늘날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간간이 골짜기를 할퀴고 지나간 자국은 주로 두 가지 원인으로 진단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해마다 빗물에 오염된 빙하가 녹아내리는 바람에 경사면이 점점 약해져 벌어진 경우요, 다른 하나는 산기슭에 무리하게 길을 내다가 지반이 쓸려 내려오는 경우가 그것. 사안이 이만큼 중대함에도 중국 건설업체를 끌어들여 산맥을 파헤치고 겨울나기 터널을 마구잡이로 설치하다니, 필자는 이를 구린내 나는 돈줄이 암세포를 키우는 연고로 파악하고 있다.
조지아 정교회 투어의 대미를 장식한 곳은 두 군데. 먼저 들른 곳은 므츠헤타 언덕에 있는 즈바리 수도원(일명 성스러운 십자가상의 교회)이었다. 산바람이 어찌나 드센지 온몸이 흔들릴 정도. 요새로 쓰인 성벽이 빗물에 휩쓸린 자국도 보수가 시급한 지점이다. 그 아래로 내려와 4세기 초 건립된 스베티즈호벨리(생명을 주는 기둥이란 뜻) 성당을 돌아봤다. 때마침 선남선녀의 결혼식이 한창. 방금 식을 마친 쌍은 추억을 담기에 바쁘다. 우리네가 본받을 만한 간소하고 엄숙한 예식의 현장. 느긋이 건축미가 빼어난 건물 내부를 살펴본 뒤 고대 이베리아 왕국의 길거리를 두루 걸어봄도 유의미했다. 둘 다 므츠바리강과 아라그비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세웠다는 점과 양 건축물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것도 공유할 대목. 찌는 듯한 무더위는 여기서도 기승을 부렸다. 트빌리시로 돌아와 둘러본 도심의 주거 여건은 그리 윤택해 보이진 않았다. 문득 자유의 광장에 있다는 게오르기우스 황금상이며, 그 앞 공원에 있는 푸시킨의 흉상이 궁금했다. 이로써 조지아의 진면목을 일부는 마주한 참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47호)에는 ‘코카서스 기행 - 아르메니아의 수더분한 고유미’가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