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의 본질과 비본질이 그러하다면 과연 성도의 지향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일단 기독교의 교파나 교단은 세속화의 과정에서 빚어진 분열사로 파악해야지 그들이 내세우는 구원관, 신격화 대상, 정경, 교리의 차이로 인해 생겨난 불가피한 것이 아님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 역사적 추이를 살펴보더라도 J. 사이어가 말하는 세계관처럼 그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진정한 실재, 세계의 본질, 인간이란 존재, 사후 문제, 앎의 근거, 시비의 판단, 역사의 의미를 곱씹는 가운데 거듭난 자들이 여러 유형의 세계관들이 경쟁하는 구도에서 기독교 세계관이 어떻게 우월한지를 스스로 증명해내야 한다는 주문입니다. AD 66~70년 유대전쟁(사도행전 8:1)을 들여다보거나 구약성경 39권만을 인정한다며 예수 그리스도를 이단으로 규정한 만행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까스로 주후 90년 얌니아 주교회의에서 신약성경 27권을 확정하고, 285년 프톨레마이우스 때 70인역 성경(Septuagint)을 12지파 6명씩 72명이 72일간에 걸쳐 연구한 결과물이 극적으로 일치한 까닭입니다.
때가 차매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칙령으로 종교자유가 허용되었고,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하면서, 380년 테오도시우스의 데살로니가 칙령으로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지만, 395년 동서 로마가 분열하면서, 635년 네스토리우스파 교리가 중국에 전파된 사실이 서안(진나라 옛 수도 장안)의 ‘비림’에 남아있을 만큼, 781년 당나라 태종은 ‘대진경교(景敎)유행중국비’ 건립에 이어 기독교 선교 내용 및 교세를 기록했음에도, 1054년 이른바 필리오케(Filioque, 그리고 성자로부터) 논쟁이 불붙어, 1054년 동서교회는 분열되었고, 가톨릭교회는 성상 숭배, 화채설, 유아 영세를 주장한 반면 정교회는 성상 숭배를 거부하면서 급기야 1095~1291년에 걸쳐 십자군 1~8차 전쟁을 일으켜, 638년 이슬람 지배하에 있던 예루살렘 탈환극으로 치달아 4차부터 동서가 적대시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입니다. 그나마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95개조에 따라 개신교는 성경 중심, 이신칭의, 공재설 등을 택함에 따라, 1532년 칼뱅의 개혁운동으로 이어져 구원예정론, 직업 소명설을 기반으로 자본주의 태동의 토대 위에서 한국은 세계 10대 교회 중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비롯해 무려 7개를 보유했으나 이는 외형일 뿐 더는 하나님이 행하신 말씀의 역사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향기수목원 연못에서 자라는 연꽃
기독교인의 올바른 현실 인식이 문제해결의 교두보입니다. 일부에서 오해하고 있는 예정론은 신정론(神正論)에 근거해 자유의지를 구사하는 인생의 전 과정을 알고 계신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자기 의로 뭉친 슈바이처가 불신자이든 불세출의 아인슈타인이 불가지론자인든 무신론과 범신론(animism)은 그 뿌리가 같습니다. 거기서 유신진화론의 일종인 이신론, 자연신론, 토템사상이 나왔고, 제3의 성, 동성애, 수간을 운운하다가 사물 인터넷(IoT), 섹스 로봇, 동물권, AI, 환경파괴(기후위기), 출산율 저하로 인한 멸종을 부추겨 지구 종말을 자초한 형국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라는 말씀에 대한 답변은 극구 회피합니다. 자기네들의 빈약한 영적 허구성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는 사랑을 외친 안토니오 도미니스의 말을 상기할 때입니다.
신인식을 새롭게 하려면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죄이고 영적 죽음이라는 사실을 실시간 인지해야 합니다. 영혼을 가진 인간이야말로 영+혼+육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므로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중생한 다음 성화를 통해 믿음의 결과로 나타난 행실(신행일치)이 영화로워지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인간의 모든 활동은 근본적으로 “구령 사역”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아니면 채울 수 없는 절대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85호)에는 ‘박물관에 딸린 용산공원’이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