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바 팍스 프레임에 빠진 전쟁 종식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제1차 대전의 1,500만 명도 모자라 제2차 대전에서는 5천만~1억 명의 희생자를 양산하고 말았다. 이는 이전의 인명 피해 추정치 합계를 훨씬 능가하는 수치다. 지레짐작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엄청난 대가를 치른 뒤에도 적잖은 국가들이 전쟁에 뛰어들고 있었다. 튀르키예, 불가리아, 루마니아에 이어 미국이 그랬다. 미국 경제가 영국을 앞지른 때는 1872년이었다. 1901년에는 독일이 영국을 추월했다. 1880~1914년 사이만 해도 영국 해군력은 세계 선두를 유지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곳은 그 무렵 일본의 약진이었다. 저자가 평한 비스마르크는 10세기 외교관 중 가장 비양심적이면서 가장 명석한 인물이었다. 한때나마 그가 독일인들에게 폭력성을 부추긴 일면은 음미할 만한 지점이다. 전쟁은 늘 과거와 미래를 핑계 삼아 현재를 저격할 따름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윌슨이 언급한 승리 없는 평화의 메시지에는 일리가 있다. 1차대전 후 국제연맹의 맹점을 보완하여 세계경찰을 자처한 미국의 위세는 아직은 대영제국의 추진력을 개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히틀러는 소련을 소환한 무력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모스크바가 아닌 베를린을 상정한 행보였다. 하지만 영국을 따돌리고 미국을 제치는 데는 135년 전 나폴레옹을 지워야 했다. 그의 천년 제국의 꿈은 500년 동안의 전화로 얼룩졌다. 이를 세계 정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히로히토를 항복하게 만든 핵폭탄이 터진 뒤였다. 미국 역시 바다를 지배한 결과였다. 한동안 미국은 유라시아를 넘볼 여지가 사라졌다. 장개석의 패전과 한국전쟁의 참화는 의외였다. 그 틈새를 비집고 일본이 되살아났다. 냉전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나토 같은 견제장치가 필요했다. 무기개발의 무한 경쟁은 상호확증파괴에 불과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치른 후유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구 종말을 앞당긴다는 위기감마저 감돌았다. 일찍이 월남전 이상의 소모전은 없었기 때문이다. 핵무기금지확산조약이라는 기득권은 자국을 지키려는 방편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죽음의 게임에 돌입한 상태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태초에 무엇이 있었을까? 다윈이 말한 진화도 변화를 수반한 유전 이전에 근원이 있어야만 성립하는 불완전 조건이다.
▲ 전쟁터에 평화를 알리는 상생의 종
진화생물학자인 도킨스가 설파한 이기적 유전자야말로 가설에 바탕을 둔 억설이다. 균형을 깨려는 움직임 자체가 원위치를 향한 갈망인 참이다. 다만 사회적 동물이 지닌 속성에 대한 지나친 억측은 금기다. 벌거벗은 유인원을 보고 자기 착각에 빠져서는 곤란하다. 직립보행은 본능의 발로이자 훈련의 성과에 속한다. 폭력성은 자제력을 발휘할 의식일지언정 문화적 산물은 아니다. 인간은 문화적 진화를 야기하는 두뇌 회전으로 세계를 정복해왔다는 게 저자의 논리다. 평화주의자들의 딜레마가 바로 그것이다. 상업의 역할을 강조하는 계몽주의적 시각도 있다. 18세기 이후 과학과 이성에 의한 공감대는 일회적 사안이 아니다. 그러나 핑커의 말과는 정반대로 국가에서 무력을 독점할 경우 발생할 현안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공감과 이성주의 등이 생산적 전쟁의 결과물이라는 데 반기를 든 셈이다. 굳이 인과론으로 접근하면 완력은 선명한 도구로되 현실은 전연 간단치 않다. 고르바초프의 출현이 통독을 이끈 경험칙으로 인정하지 않는 그림이어서다. 여기서 권력의 손익분기점을 따지는 일은 너무 나풀거리는 느낌이다.
2012.11.26. 월요일(일요일 밤 10:30~화요일 오전 10:20 사이)을 현대사에서 경이로운 날로 기억하는 건 왜일까? 그날은 뉴욕시에서 살해당한 자가 단 한 명도 없는 날이었다(통계상 기준: 1994년 이래 수집한 관련 데이터). 평균적으로 매일 14명이 죽는다는 걸 감안하면 용케 피해간 구간일 것이다. 저자가 펼친 전쟁사는 인류사 전반에 걸쳐 일관된 줄기를 유지했다. 크게 개인적, 군 역사적, 기술적, 진화론적 접근법을 제시해왔다. 하지만 수많은 전쟁을 두고 인류에게 이로웠다는 강변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시종 화성에서 온 남자가 금성에서 온 여자를 설득하려는 화술처럼 들린 적도 있었다. 내 의식세계는 줄곧 죽음을 불러온 재앙을 합리화할 수 없다는 흐름이었다. 1991년 페르시아만 전투를 치르고 아프가니스탄 침략을 거쳐 돌아온 대가는 9·11 테러였다. 동구권의 붕괴 앞에 자숙하지 않은 채 이제 더는 등소평의 중국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자만이었다. 사슬을 끊어내는 몫은 강대국에 달렸다. 비관과 낙관이 교차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미래 죽음의 게임은 팍스 테크놀로지의 양상을 띨 가능성이 높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58호)에는 ‘미서부 탐방기 - 미서부의 상징적 인상화’가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