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가 카자흐스탄(Kazakhstan, 남한 면적의 27배, 인구 2천만, 1인당 GDP 14,500달러)이란 나라에 대해 궁금해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두루 돌아본 발칸반도에 이어 코카서스를 돌고 나니 그렇다면 내친김에 실크로드를 가로지르는 이른바 ‘~스탄’(~의 땅)이 붙은 국가들에 관해서도 점차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밤하늘 기창에서 굽어본 알마티 시가지. 카자흐 민족의 땅에 안착한 일행이 찾은 호텔은 수준급이었고, 네 시간의 시차로 인해 새벽녘 단잠을 설치긴 했어도 아침 식사는 비교적 괜찮았다. 다만 현지 가이드를 왕초보에게 맡기는 바람에 어설픈 토막해설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보조 가이드를 하다가 하필이면 이번부터 인솔책임을 떠맡는 통에 기본기 자체가 태부족한 상태. 자신을 자국어(러시아어, 카자흐어 겸용)와 한국어를 비교 연구하려는 언어학자라고 소개하여 몇 가지 물어보니 이제 막 학부를 졸업했다기에 어문학 교육자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아연실색한 사실은 여태껏 시간이 없어 K-드라마 한 편 본 적이 없다니 이를 정녕 문화 차이로 돌릴 수 있으랴.
출근 차량을 피해 알마티(Almaty, 인구 약 200만) 시내를 벗어나면서 보니 이렇다 할만한 건물은 눈에 띄지 않고 요로에 도로확장이 한창이어서 주위는 산만한 느낌이었다. 명색이 한 나라의 특별시로 지정된 데다가 1925~1994년까지 70년간 수도였으면 나름 위세를 갖추었겠거니 했던 기대는 이튿날 이곳을 떠날 때에서야 부분적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차창에 비친 풍경은 그간 들은 바대로 생기를 잃은 모양새의 연속. 주택가는 특유의 형태미를 찾기 어려웠고 도시계획 전반이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인상을 못내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농촌의 풍광은 나은가. 흐릿한 산야에서 보듯이 턱없이 부족한 강수량 탓이겠으나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작물들이 싱싱할 리 만무했거니와 방치한 토지라고 해서 자연보호가 잘 되어있지도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간간이 보이는 흙탕물 줄기. 저 물속에는 농사에 알맞은 각종 양분이 녹아있으렷다. 이들이 읊어온 시들은 김소월의 서정성을 빼닮았다는데 러시아 지배 시절부터 사과의 도시라고 불리던 산지 과일마저 왜 이다지 푸석푸석한지 갈수록 의문이 드는 대목이었다.
카자흐스탄의 자랑인 톈산 침블락 설산 중턱
알마티에서 세 시간 만에 도착한 차린계곡. 이들은 여기를 카자흐스탄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 부른단다. 그러나 협곡(canyon) 형태의 특이지형을 본 적이 없다면 모를까 이런 걸 두고 천하의 그랜드캐니언과 비교한 건 그야말로 한도를 넘는 표현(over)에 속한다. 차라리 특징 없는 밋밋한 풀밭일망정 제법 굵은 띠를 이루며 자라난 관상용 양귀비 군락이 필자 눈에는 훨씬 강렬했다. 다만 어느 여행자가 남긴 후기에서처럼 한 시간여를 직접 걸어가면서 그 옛날 지각이나 지층의 변화상을 생생히 목도한 바는 큰 소득. 흙먼지 흩날리는 좁다란 길목에서 어찌 보면 일부에서 튀르키예 카파도키아를 떠올리게도 했지만, 한편으론 광야 한가운데 서 있는 떨기나무류 앙상한 가지에 꽃망울들이 맺힌 모습이어서 쉬이 접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 길목에서 낯선 이들과 어울려 땀 흘린 트래킹은 분명 태곳적 어느 시점에 머문 느낌이었다고 회상할 듯하다. 이윽고 반환점에 다다라 메마른 협곡을 적시는 강물에 손을 씻은 뒤 멀리 설산을 배경 삼아 소중한 추억을 남기고 소형트럭에 올라탈 때까지 잠시 가진 휴식은 꿀맛이었다.
이식박물관에 전시한 유물은 극히 소박했다. 역사를 온전히 보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으나 선조들의 희미한 흔적을 조금이라도 건진 건 카자흐 민족의 마지막 자존심이리라. 막간을 이용해 질뇨니(녹색시장이란 뜻) 바자르에 들러 고려인들의 먹거리를 살펴본 뒤, 판필로바 28인을 기리는 공원 내에 설치된 세계 제2차대전의 승전 기념비를 거쳐 러시아정교회인 젠코바 성당관람은 의미가 있었다. 그 목조건물 경내에 피어난 작은 꽃송이만큼 정갈한 외관을 뒤로하고 곧바로 올라간 곳은 카자흐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텐산산맥의 중턱. 일자리 창출인 듯 일행을 택시에 태우고 1,100m까지 가더니 거기서부터 케이블카로 갈아타고 2,600m에서 내려 다시 해발 3,200m 산자락에 올라서니 침블락 스키장이었다. 경관이 가히 스위스 버금간다는데 고산증은 없었고 아직도 만년설에 덮인 나라여서 사방으로 설산이 보였다. 인파로 붐비는 걸 보면 명실공히 카자흐스탄 제일 관광지임이 틀림없거니와, 오르내리는 동안 심하게 긁힌 창문에도 불구하고 이만치 선명한 사진을 남긴 적은 일찍이 없었다.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79호)에는 ‘중앙아시아 기행 - 키르기스스탄은 자연보호 중’이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