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 전문 필진인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이 조선왕실의 장태 문화를 상징하는 태실(胎室)에 대해 매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현재까지 위치가 확인된 왕의 태실은 총 24기로, 지난호에는 <사천 세종대왕 태실>에 대해 소개했다. 이번 연재에서는 <가봉비의 등장과 제도화>에 대해 설명한다. <편집자 말>
■ 성종대왕 태실을 기점으로 제도화된 가봉비
가봉태실*을 살펴보면 석물의 형식이 가봉비(귀롱대석+비신+이수)와 장태석물(난간석+상석+전석+중앙태석)로 구분된다. 여기서 난간석은 ‘주석+동자석+횡죽석’으로, 중앙태석은 ‘개첨석+중동석+사방석’으로 나뉜다. 그러나 처음부터 가봉태실이 이러한 석물 형식으로 제도화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금산 태조대왕 태실 ▶김천 정종대왕 태실 ▶성주 태종대왕 태실 ▶사천 세종대왕 태실 ▶예천 문종대왕 태실 ▶성주 단종대왕 태실 ▶사천 傳단종대왕 태실 ▶완주 예종대왕 태실 등은 최초 조성 당시 가봉비가 세워지지 않았다.
* 태실은 크게 왕자·왕녀의 태실인 아기씨 태실과 태주가 왕위에 오를 경우 별도의 석물과 표석을 설치했던 가봉태실로 구분된다. 가봉태실과 관련한 내용은 이미 앞선 연재인 ‘[김희태가 소개하는 조선왕실의 태실] 태실(胎室)이란 무엇인가?’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해당 연재를 참고하면 된다.
금산 태조대왕 태실의 가봉비
이렇게 말하면 ▶금산 태조대왕 태실 ▶사천 세종대왕 태실 ▶예천 문종대왕 태실에 가봉비가 있는데,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해당 가봉비들은 숙종과 영조 시기에 태실을 개수하면서 새롭게 설치된 것이다. 『태봉등록』 병인년(丙寅年, 1686)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태실의 가봉비는 ‘1584년(선조 17)’에 건립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가봉비의 후면의 명문을 통해 ‘1689년(숙종 15) 3월 29일’에 중건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최초 태조의 태실은 장태석물만 있는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성주 세조대왕 태실의 가봉비. 기록으로 설치가 확인된 최초의 가봉비다.
가봉비가 처음 설치된 사례는 성주 세조대왕 태실에서 찾을 수 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1462년(세조 8) 9월 14일, 예조에서 세조의 태실이 다른 왕자(대군, 군)의 태실과 가까이 있고 의물도 없으니 태실을 옮겨 의물을 설치할 것을 아뢰었다. 이에 세조는 태실을 옮기지 않고 의물도 설치하지 말도록 하며 대신 비(碑)만 세우게 했다. 이 때문에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에는 세조가 진양대군**으로 불리던 시절 조성된 아기씨 태실 앞쪽에 별도로 세운 가봉비가 남아 있는 것이다.
**세조의 군호는 ‘진평대군(1428)-진양대군(1433)-수양대군(1445)’으로 변화했다. 따라서 1438년(세종 20)에 설치된 태실비(아기비)의 전면에는 ‘진양대군’이라 새겨져 있다.
완주 예종대왕 태실의 가봉비. 현재 태실 석물은 전주 경기전 내에 있으며, ‘1578년(선조 11) 10월 초2일’에 건립되었으며, 이후 ‘1738년(정조 7) 8월 26일’에 개수했다.
이후의 왕인 예종의 태실은 가봉비의 후면 명문을 통해 ‘1578년(선조 11) 10월 초2일’에 건립한 사실과 이후 ‘1738년(정조 7) 8월 26일’에 개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비교·분석해 보면, 세조의 태실을 제외한 성종 이전까지는 가봉비가 설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이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어 눈길을 끄는데, 바로 『승정원일기』다. 해당 기록에 따르면 ‘1735년(영조 11) 윤 4월 15일’, 안태사(安胎使)로 풍기(豐基)에 다녀온 송인명이 영조에게 이미 표석이 없었으니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고 아뢰었고, 이에 영조는 표석이 없다면 마땅히 새로 세워야 한다고 하교했다. 즉, 영조 때 새롭게 설치하기 전까지 문종 태실에는 가봉비가 없었다는 의미다.
예천 문종대왕 태실의 가봉비. ‘1735년(영조 11) 9월 25일’에 처음 설치되었다.
사천 세종대왕 태실의 가봉비. ‘1734년(영조 10) 9월 초5일’에 처음 설치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앞서 소개한 사천의 세종과 傳단종의 태실에서도 확인된다. 『태봉등록』 갑인년(甲寅年, 1734)의 기록에 따르면, 곤양 땅에 있는 세종과 단종 태실의 표석이 이때 처음 세워졌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세종과 傳단종의 태실 역시 최초 조성 당시에는 가봉비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주 법림산에 조성된 단종 태실에서도 주석과 동자석, 전석 등은 확인되지만 가봉비의 흔적은 확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가봉태실의 형태는 조선 초기의 간소한 구조에서 점차 제도화된 형태로 발전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광주 성종대왕 태실의 가봉비. 현재 태실 석물은 창경궁 경내에 있다.
광주 성종대왕 태실의 가봉비의 후면. 4차례에 걸친 개수 기록이 새겨져 있다.
가봉비가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것은 광주 성종대왕 태실부터다. 성종의 가봉비 후면에 새겨진 내용을 보면, 최초 비가 세워진 시기는 ‘1471년(성종 2) 윤9월’이다. 이후 성종의 가봉비는 세 차례 더 개수되었는데, ▶1578년(선조 11) 5월 ▶1652년(효종 3) 10월 ▶1823년(순조 23) 5월이다. 따라서 성종 태실의 가봉비는 당대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종의 태실을 기준으로 가봉비는 장태석물과 함께 세워졌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가평 중종대왕 태실로, 훼손이 심한 가봉비 후면에는 ‘정(正)’이라는 글자가 확인된다. 이는 ‘정덕(正德)’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정덕은 명나라 황제 정덕제의 연호를 뜻한다. 따라서 중종 태실의 가봉비 역시 당대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가평 중종대왕 태실의 가봉비. 후면에 ‘정(正)’이 새겨져 있어, ‘정덕(正德)’ 즉, 중종 당대에 설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조선 초기의 가봉태실은 별도의 표석인 가봉비 없이 장태석물만 설치되었다. 그러다 성종대왕 태실부터는 가봉비가 본격적으로 제도화되었고, 이후 왕실 태실에는 ‘가봉비+장태석물’이라는 형식이 정착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석물의 변화뿐만 아니라 왕실의 위계와 예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자 태실 제도의 발전을 통해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 참고자료
『국역 태봉등록』, 2006, 국립문화재연구소
곽은정(역) 『승정원일기』, 2020, 한국고전번역원
김익현(역) 『세조실록』, 1978,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김희태, 『조선왕실의 태실』, 2021, 휴앤스토리
김희태, 『경기도의 태실』, 2021, 경기문화재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