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0-04(토)
 


김희태 소장.jpg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조선왕실의 태실』, 『경기도의 태실』 저자

본지 전문 필진인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이 조선왕실의 장태 문화를 상징하는 태실(胎室)에 대해 독자들에게 월 2회씩 소개하고 있다. 태실은 아기의 태를 길지에 묻는 풍습으로, 왕실에서는 태를 태주의 생애와 국운과 연결 지을 만큼 중요하게 인식했으며, 신중하게 보관했다. 하지만 태실은 일제강점기 때 원형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현재 온전하게 남은 태실을 찾기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동안 왕릉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던 태실은 보존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복원과 연구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편집자 말>


전국에 산재한 조선 왕실의 태실을 다니다 보면, 태실과 함께 세워진 여러 표석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러한 표석들은 태실의 조성과 보호, 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볼 필요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금표(禁標), 화소(火巢),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하나씩 살펴보면, 우선 금표(禁標)는 한자의 뜻처럼 특정 행위를 금지하는 표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다양한 목적을 가진 금표들이 확인되고 있으며, 『한국의 금표(2023)』의 분류에 의하면 왕릉이나 태실, 왕실 관련 인물·장소 등에 세워진 금표를 왕실 금표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태실의 조성과 금표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김희태 태실1.JPG

▲ 보은 순조대왕 태실의 금표. 후면에 ‘서(西)’가 새겨져 있다.

 

『태봉등록』에 따르면 신분에 따라 태실의 규모가 달랐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등급지의 경우 왕의 태실로, 금표의 범위는 사방 300보였다. 또한, 태실의 가봉과 태실을 관리할 별도의 수직(守職)이 있었다. 반면, 2등급지의 경우 왕비 소생의 대군 태실로, 금표의 범위는 사방 200보였다. 3등급지의 경우 왕비 소생의 공주와 후궁 소생의 군과 옹주 태실로, 금표의 범위는 사방 100보였다.

 

김희태 태실2.JPG

▲ 영월 철종 원자 융준 태실의 금표. 후면에 ‘함풍구년이월일(咸豊九年二月日)’이 새겨져 있다.


태실을 수호하기 위해 사방의 경계가 되는 지점에 금표를 세운 것을 기록을 통해 확인되나 현재 금표석의 실물이 남아 있는 사례는 보은 순조대왕 태실과 영월 철종 원자 융준 태실 등 두 곳밖에 없다. 이 가운데 순조 태실의 금표 후면에는 ‘서(西)’가 새겨져 있어, 서쪽의 경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반면, 융준 태실의 금표 후면에는 ‘함풍구년이월일(咸豊九年二月日)’이 새겨져 있어, 1859년(철종 10) 2월에 표석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해당 표석은 『승정원일기』와 『원자아기씨안태등록』과의 교차분석을 통해 1859년 2월 25일에 강원도 원주부 주천면 복결산(伏結山) 아래 조성된 것과 태주가 융준(隆俊)인 것이 확인된다.

 

김희태 태실3.JPG

▲ 보은 순조대왕 태실의 화소. 법주사 경내에 있으며 전면에는 하마비가 새겨져 있다.

 

김희태 태실4.JPG

▲ 홍성 순종대왕 태실의 화소. 현재 해당 화소 표석은 보호를 위해 홍주성역사관으로 옮겨졌다.


화소(火巢)는 능원이 조성될 때 경계가 되는 지점에 설치되었으며, 일정 구간 내 나무와 잡풀을 제거한 공간을 의미한다. 멀리서 보면 성의 해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불이 능원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화 대책의 일환이자 일종의 완충지대라고 할 수 있다. 태실에서도 화소가 확인되며, 현재 남아 있는 화소 표석은 보은 법주사 경내에 있는 순조대왕 태실의 화소와 홍성 순종대왕 태실의 화소 두 곳뿐이다. 기록에 따르면 태실 이외의 능원에도 화소 표석을 설치한 사례가 있으나, 현재까지 실물이 확인된 것은 두 태실의 화소 표석뿐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와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으며, 관련 연구에 있어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김희태 태실5.JPG

▲ 충주 경종대왕 태실의 하마비

 

김희태 태실6.JPG

▲ 포천 익종대왕 태실의 하마비


마지막으로 태실과 함께 세워진 표석 중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하마비는 궁궐, 왕릉, 향교, 서원, 유허지 등 왕실과 유교적 건축물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표석이다. 이러한 하마비는 의외로 사찰에서도 종종 확인되는데, 이 경우 해당 사찰이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예를 들어 대구 파계사(把溪寺)의 경우 왕실의 원당사찰(願堂寺刹)이기에 하마비와 원당봉산(願堂封山) 표석 등이 세워졌다.

 

김희태 태실7.JPG

▲ 영천 은해사 경내에 있는 하마비. 대소인하마비(大小人下馬碑)가 새겨져 있다.

 

김희태 태실8.JPG

▲ 보은 법주사 경내에 있는 하마비. 후면에 화소가 새겨져 있다.


보통 하마비의 전면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혹은 ‘하마(下馬)’ 등이 새겨져 있다. 즉, 신분을 막론하고 이곳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장소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태실에 하마비가 설치된 방식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태실 자체에 하마비가 세워진 경우로, 충주 경종대왕 태실과 포천 익종대왕 태실을 들 수 있다. 두 번째는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에 하마비가 세워진 경우로,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해사)과 보은 순조대왕 태실(법주사)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조선왕실의 태실은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성한 장소로, 금표와 화소, 하마비 등은 태실을 수호하고, 장소가 가지는 존엄성을 드러내기 위한 표식인 셈이다. 또한, 이러한 표석들은 태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로, 태실 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참고자료

 

국립문화재연구소, 『태봉등록』, 2019

김희태, 『한국의 금표』, 2023, 휴앤스토리

김희태, 『조선왕실의 태실』, 2021, 휴앤스토리 

김희태, 『경기도의 태실』, 2021, 경기문화재단


태그

전체댓글 0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김희태가 소개하는 조선왕실의 태실] 태실(胎室)의 수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표석을 찾아보자!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