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제의 평택의 자연] 까탈 없는 꽃 위의 방랑자, 네발나비
먹이사슬 하위에 속하면서도 다양한 식물의 생존과 생물다양성 유지에 지대한 역할 맡아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어느 봄날, 조용히 피어난 풀꽃들 사이로 붉은빛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든다.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이 여행자는 꽃에서 꽃으로 옮겨 다니며 꽃꿀을 따고, 향기를 나르며, 생명을 이어간다. 어디에 머물지, 언제 날아오를지 알 수 없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풀꽃 세상은 한층 더 안정되고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나비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대개 배추흰나비, 노랑나비, 제비나비, 호랑나비 정도에서 멈추곤 한다. 암먹부전나비, 큰주홍부전나비, 갈구리나비, 청띠신선나비처럼 이름조차 생소한 종류는커녕, 너무도 익숙한 네발나비조차 쉽게 언급되지 않는다.
장소나 꽃의 종류에 크게 까탈스럽지 않고, 꽃가루를 몸에 묻혀 부지런히 활동하는 이들은 먹이사슬의 하위에 속하면서도 다양한 식물의 생존과 생물다양성 유지에 지대한 역할을 맡고 있다.
1. 꽃을 가리지 않는 네발나비
▲ 물가의 미국가막사리에서 꽃꿀을 빠는 네발나비(2024.10.17 배다리실개천)
진한 향기와 다양한 꽃 색은 물론이고 여름 내내 꽃을 이어 가는 붓들레아로부터 정원의 버들마편초, 에키네시아, 개쉬땅나무, 층꽃나무, 메리골드는 물론이고 주변 풀밭에서 꽃을 피우는 개망초, 고마리, 미국쑥부쟁이에 이르기까지 네발나비는 다양한 꽃을 찾아 꿀을 빠는 습성이 있다. 네발나비는 주변의 여느 곤충보다도 주변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2. 장소를 가리지 않는 네발나비
▲ 진위천 냇가에서 무리 지어 자라는 고마리를 찾은 네발나비(2008.9.12 진위천)
도심을 흐르는 통복천 냇가에서 덕목제 둑길과 덕동산 마을숲 가장자리 화단에 이르기까지, 네발나비는 넓게 퍼져 살며 오랫동안 만날 수 있고, 개체수도 많은 편이다. 사찰 주변 잡목림에서는 혹 청띠신선나비를, 진달래가 흔한 서운산에서는 애호랑나비를, 진위천 냇가에서는 꼬리명주나비를 제한적으로 만날 수 있지만, 네발나비는 늘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출현한다.
3. 경쟁을 피하려는 진화된 생존전략
▲ 이른 봄, 복자기 수액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있는 네발나비(2023.3.19 배다리실개천)
이강운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은 “알로, 애벌레로, 번데기로, 어른벌레로 각각 적응해 가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가려 사는 곤충 생활사는 서로 간의 쓸모없는 경쟁을 피하려는 진화된 생존 전략이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오랜 시간과 세월을 통해 우리 인간이 그러했듯이, 네발나비 또한 나름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성체로 겨울을 나며 주어진 자리를 지켜 나가고 있다.
4. 남방씨-알붐나비
▲ 뒷날개 중앙에 흰색의 C자 무늬가 있는 네발나비(2021.9.13 웃다리문화촌)
네발나비는 속명인 Polygonia가 다각형이란 어원을 가지고 있듯이 날개의 바깥 가장자리는 깊게 꺾이어 여러 각을 이루고 있다. 뒷날개 중앙에 백색의 C자(혹은 L자) 무늬가 있어 예전에는 ‘남방씨-알붐나비’라고 부르기도 했다. 성충은 연 3회 발생하는데, 6월과 7월 중순에 그리고 9월 이후에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가을형이 어른벌레로 겨울을 나게 된다.
5. 발이 네 개인 네발나비과 나비
▲ 앞발 두 개는 퇴화하고 여섯 개 중 네 개만 남은 네발나비(2021.9.25 웃다리문화촌)
네발나빗과의 나비들은 중형에서 대형의 나비로 종류가 많은 편이며, 네발나비라는 이름은 실제로는 다리가 여섯 개지만 앞다리 한 쌍이 퇴화하여 겉보기엔 네 발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에는 뱀눈나비아과, 네발나비아과, 왕나비아과, 뿔나비아과 등 4아과 90여 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뿔나비, 흰줄표범나비, 애기세줄나비, 작은멋쟁이나비, 부처나비 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6. 엄마·아빠는 잡식 애벌레는 편식
▲ 애벌레의 먹이식물인 환삼덩굴을 찾은 네발나비(2024.10.17 배다리저수지)
나비는 애벌레와 성충 단계에서 먹이식물이 다르다. 애벌레는 정해진 식물의 잎을 먹고, 성충은 꽃꿀이나 수액을 빨아먹는다. 네발나빗과의 거꾸로여덟팔나비는 쐐기풀과 식물, 뿔나비는 느릅나뭇과 식물, 흰줄표범나비가 제비꽃류를 애벌레의 먹이식물로 하지만 네발나비의 애벌레는 주변에 흔한 삼과의 환삼덩굴에 고정되어 있다.
7. 에키네시아 꽃과 네발나비
▲ 호랑이 눈을 닮은 인디언의 허브 에키네시아를 찾은 네발나비(2021.7.5 웃다리문화촌)
북아메리카가 고향인 에키네시아(Echinacea)는 국화과에 속하는 식물로 꽃이 크고 꿀이 풍부해서 여러 곤충이 즐겨 찾아오는 식물이다. 특히 왕나비, 흰줄표범나비, 암끝검은나비 등의 네발나빗과 친구들이 흰색, 분홍색, 노란색, 자주색 등의 선명한 색상의 꽃잎에 많이 모인다. 에키네시아는 꽃 안쪽의 꽃잎이 없는 관상화가 두드러지게 돌출해 루드베키아와 구별된다.
8. 땅두릅의 꽃과 네발나비
▲ 독활(땅두릅)의 꽃꿀을 찾아 날아든 네발나비(2020.9.19 웃다리문화촌)
봄에만 먹을 수 있는 산나물에 참두릅과 개두릅, 땅두릅이 있다. 참두릅과 개두릅은 가시가 있는 나무에서 순을 따지만, 땅두릅은 땅에서 자라는 새순을 잘라먹는 것으로 가시가 없고 잔털이 보이며 굵게 자라나는 게 특징이다. 쌉싸름한 맛이 적고 식감이 더욱 아삭한 특징이 있어 고급 산나물로 대접을 받는 땅두릅(독활)의 꽃꿀을 네발나비가 알고 먼저 찾아온다.
9. 가을 층꽃에 끌리는 네발나비
▲ 선명한 보랏빛의 층꽃에 자신도 모르게 끌려온 네발나비(2021.9.23 웃다리문화촌)
가을 앞자락의 고마리로부터 미국쑥부쟁이, 미국가막사리, 사데풀, 개미취, 뚱딴지, 산국에 이르기까지 가을에 만나는 네발나비의 관심은 여느 때와는 달리 애벌레의 먹이식물인 환삼덩굴에서 크게 멀어져 있다. 주 관심사는 성체로 겨울을 나기 위한 에너지 즉 꽃에서 꽃꿀이나 무기양분에 관심사가 모여 있다. 특히 가을이 깊어지면서부터는 큰 무리를 지어 꽃꿀 잔치를 펼치기도 한다.
10. 가을 개미취에 취한 네발나비
▲ 마을 길 화단의 개미취 향기에 이끌려 날아든 네발나비(2024.9.29 배다리마을)
가을 햇살에 부드럽게 빛나는 개미취의 연보랏빛 꽃향기에 끌려 수많은 곤충이 가벼운 날개짓으로 모여든다. 활동할 수 있는 낮의 길이는 짧아지고, 주변 온도에 몸을 맡겨야 하는 네발나비이지만 서늘한 가을바람 속에서도 큰 무리를 지어 꽃을 내는 사데풀과 미국쑥부쟁이는 물론이고 줄기 끝에서 빽빽하게 꽃을 내는 개미취에도 쉼 없이 찾아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