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영합주의, 소위 포퓰리즘이 국가적 위기를 초래한 사례는 많다. 나찌즘, 파시즘이 그랬고 아르헨티나나 베네수엘라도 그렇다. 좌우를 막론하고 대중의 감정을 이용하여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시도는 단기적으로는 인기를 끌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사회를 위기로 몰고 간다.
정부의 의대증원 정책이 현재 의료대란 역풍을 맞은 채 진행되고 있다. 원래 의대 증원은 일정 부분 필요하다는 국민적 공감이 있었다. 응급실, 산부인과 외과 등 필수진료 전문의의 부족과 허약한 지방의료는 우리나라 의료체계의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다. ‘응급실 뺑뺑이’니 ‘소아과 오픈런’ 등도 사회적 화제가 되었다. 당연히 정책적 접근은 필수의료 비인기과 및 지방 의료 문제에 대한 정책 원칙이 우선되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갑자기 근거도 애매한 “의대정원 매년 2천 명 확대”를 발표하고 강공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아마 총선을 앞두고 고소득 의사직군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이용한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3천 명인 의대 입학생을 2천 명 늘려서 매년 5천 명씩 의사를 배출하겠다는 정부의 야심찬 계획은 심각한 난항에 부딪쳤다. 독선적이고 강압적인 정부 정책에 수련병원 전공의들이 대부분 사직했고, 의대생들이 수업을 거부함에 따라 이들은 전원 유급될 것으로 보인다. 의대 교수들까지 반기를 들었다. 성균관대, 아주대의 경우 기존 정원이 40명인데, 80명씩 증원하여 120명을 가르치겠다니 교수들도 황당할 뿐이겠다. 필수의료와 지방의료진에 대한 의료수가 문제나 의무 지방근무 등과 같은 민감한 문제를 외면한 채 의사 숫자 늘리기에만 열중하는 꼴이다. 결국 수도권 인기종목 병의원만 늘어날 게 뻔하다. 우리가 무에 그리 성형외과에 목매고 살았던가.
그런데 정작 심각한 국가적 문제가 생기고 있다. 의대증원의 심각한 부작용으로 ‘반도체 코리아’ 위상에 적신호가 켜졌다. 학령인구 감소로 2030년에는 대입 신입생이 30만 명으로 줄어든다. 이중 이과 비율이 60%라 가정하면 18만 명 중 5,000명이 의대를 가게 된다. 수능 1등급(4%, 7천명) 중 대부분이 의대를 가는 셈이다. 즉, 우리나라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과학기술 분야에는 최상위권 인재들이 가지 않는 비상사태를 예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말로는 과학입국을 외치지만 “소는 누가 키우나”. 달나라 인공위성은 누가 만들고, AI반도체는 누가 설계하고, 그토록 자랑하는 원전과 K방산업 연구는 누가 한단 말인가. 가뜩이나 인력난이 심각한데 의대 정원 증원 이슈까지 겹쳐 우수 인재를 확보하기가 더 어려워질 전망이다. 윤석열정부는 연구비유용 의혹 등 과학기술계 적폐청산을 빌미로 5조 원의 과학기술 R&D예산을 삭감한 바 있다. 이 여파로 대전 카이스트 졸업식장 대학원생 입틀막 사건을 착잡하게 바라본 기억도 생생하다.
K-반도체 인력수급이 비상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반도체 관련 전문인력 수요는 2031년 기준 30만 명에 달할 전망이다. 2021년 17만 명과 비교해 13만 명 늘어난 수치다. 반면 인력 배출 규모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매년 공급되는 인력이 직업계고 1,300명, 전문학사 1,400명, 학사 1,900명, 석·박사 430명 등 5,000여 명에 불과하다. 2031년에는 반도체 인력 공백이 5만4,000명 이상 발생할 것으로 전망(2024.6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보도자료)하고 있다.
이렇듯이 이과생들이 반도체 관련 학과를 기피하는 현상이 점차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삼성전자와 인력 공급 계약을 맺은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2024학년도 정시 최초 합격자 중 미등록 비율이 92%에 달했다. 모집 정원 25명 중 23명이 입학을 포기한 것이다. SK하이닉스 계약 학과인 고려대 반도체공학과도 마찬가지다. 등록 포기 비율이 50%로 전년(18.2%)보다 3배 가까이 급증(아주경제 2024.6.4. 재인용)했다.
이런 가운데 의대 정원 증원 이슈까지 불거진 것이다. 2025학년도 전국 의대 정원이 1,500명가량 늘면서 반도체를 포함한 이공계 전체가 인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전망이다.
반도체산업은 한국을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 이끈 주력산업이다. 또한 미래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할 핵심 분야이기도 하다. 최근 정부는 반도체 인재 육성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국내 주요 대학에 반도체학과 신설 및 정원을 대폭 늘리며 지원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의대 쏠림 현상 등의 이유로 반도체학과의 정원을 채우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세계 각국은 AI반도체산업의 육성과 지원에 사활을 걸고 있다. 정부는 정치적 이해관계나 득실을 떠나서 국가의 백년대계를 세우고 그에 맞는 로드맵을 준비해야 한다. 얄팍한 포퓰리즘으로는 안 된다. 의대증원 문제와 반도체 인재 양성을 제로섬게임으로 볼 필요는 없다. 미·중·일 등의 천문학적인 직접 지원에 비해 정부의 육성책은 민간금융 지원 편의 제공 등 실효성이 너무 떨어진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경기도 용인에 건설 중인 반도체클러스터의 경우도 인력수급과 전력공급 계획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실정이다. 의대 증원은 유례없이 강공드라이브인데 반도체산업 육성은 말만 뻔지르르하다 할까?
의대증원 문제가 어떻게 결말이 날지 예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떻게 되든 후유증이 깊고도 오래 갈 듯하다. 의대증원의 부작용으로 유탄을 맞고 있는 AI반도체산업 인력육성이 걱정되면서, 하루빨리 획기적인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길 바랄 뿐이다. 입틀막은 한 번으로 족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