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의 상봉(相逢)은 말 그대로 ‘서로 마주함’이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얼굴을 마주함만이 아니기에, 상봉의 순간은 언제나 가슴 두근거리고 눈가가 촉촉해진다. 특히 오랜 시간, 혹은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서로를 그리며 기다린 뒤에 이루어지는 상봉이라면, 그 감동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미군 해외파병을 마치고 가족과 상봉하는 병사의 모습, 오랫동안 떨어졌던 아이를 안고 우는 부모의 모습 등 영상이 올라올 때면 울컥하는 건 많은 이들의 경험일 것이다. 필자도 나의 기억 속 극적 상봉의 장면들이 있다.
군 입대 후 첫 휴가 때, 지금의 아내가 맨발로 대문 밖으로 뛰어나오던 그 순간, 원통부대 근무 당시, 고향 절친이 진부령으로 전출 온 후 면회를 와서 무작정 달려가 만났을 때 느낀 가슴 벅참은 결코 잊지 못한다.
지난주, 미국 내 삼성·롯데 합동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비자 문제로 구금되었다가 근로자들이 8일 만에 석방되어 전세기로 돌아왔다. 근로자들이 인천공항에서 가족의 품에 안겼을 때의 장면은 온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모든 상봉의 순간에는 이런 탄성과 눈물, 감격과 기쁨이 뒤엉켜 있었다.
상봉이 특히 우리 마음을 울리는 까닭은, 돌아오는 이가 있고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희망이고 안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상봉하지 못한 많은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혹은 상봉한 순간이 축복이 되었을지라도 상봉 이전의 기다림과 상실의 무게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최근 세계 곳곳에서 있었던 상봉은 큰 울림을 주었다. 실례로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분쟁이 길어진 가운데, 가자지구의 이브라힘(Ibrahim)과 마흐무드(Mahmoud) 두 형제가 15개월 동안 헤어져 지냈다. 이번 정전 합의로 이동이 허용되면서, 이브라힘은 남부에서 북쪽 자발리아(Jabalia)로 돌아왔고, 마흐무드는 그곳에서 기다렸다. 두 형제는 파괴된 그들의 집터 앞에서 서로를 끌어안으며 “영혼이 가슴으로 돌아온 것 같다(I felt like the soul returned to the chest)”라고 말할 만큼 깊은 감정을 나누었다.
이처럼 감동적인 장면들은 단지 뉴스거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 삶을 설계하고, 어떤 가치에 무게를 두고 있는가의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상적인 상봉을 보다 안정되게 가능하게 하는 몇 가지 제안이 있다.
근본적으로, 비자나 체류 자격 문제가 가족 상봉을 막는 경우가 많다. 정부는 해외 근로자의 비자 문제에 대해 선제적이고 투명한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또한 긴급 상황에 대처하는 민첩함이 절실하다. 자연재해, 병원 치료, 억류·구금 등의 긴급한 상황에서는 신속히 가족에게 연락하고, 귀국 또는 복귀 과정을 돕는 제도가 필요하다.
상봉 전후의 불안, 상실감, 긴장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가족 간 영상 통화, 편지, 심리상담 등이 더욱 활발히 제공되면 좋지 않겠는가.
대규모 경제 정책이나 미래 산업 계획만큼 “가족이 서로 돌아오는 일상”이 유지되는 사회가 중요하다. 지도자들과 입법자들이 정치와 정책의 중심에 이런 일상의 소망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가족의 상봉은 너무나도 평범한 소원이다. 그러나 그 평범함이야말로 기적에 가깝다. 오늘도 누군가는 ‘문이 열리기를, 누군가 돌아오기를, 누군가의 웃음을 다시 보고 싶다’고 기다린다. 우리 모두의 살림살이, 사회의 기반이 그런 기다림 속에서 조금 더 부드럽고 인간적으로 다져지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