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은 언제나 차갑고 냉정한 공간으로 여겨진다. 판사는 법을 들고 서 있고, 변호사는 조문을 근거로 논리를 쌓는다. 그러나 지난주 종영한 드라마 <에스콰이어>의 최종회는 달랐다. 제목조차 낯설고 시적인 ‘사랑의 서약, 저 너머’였듯, 마지막 재판정은 법률 논리보다 더 깊은, 인간의 심장을 두드리는 물음을 던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란 무엇인가, 결혼이란 무엇인가’였다.
재판의 배경은 이러했다. 남편은 이혼을 청구했고, 아내는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우리는 흔히 이혼을 말할 때 ‘사랑이 식어서’라는 이유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달랐다. 남편은 재판정에서 고개를 숙이고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제 사랑이 아내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아서요.” 그 역설적인 고백은 재판정을 술렁이게 했다. 사랑 때문에 이혼을 원한다니, 이보다 더 모순적인 진술이 있을까.
아내의 변호를 맡은 효민 변호사는 단호했다. “사랑은 계약이 아닙니다. 하지만 결혼은 분명히 계약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계약 조항이 아니라, 그 계약을 가능하게 하는 진심입니다. 남편이 여전히 사랑한다면, 그것을 끝내는 것이 과연 배려일까요? 아니면 끝까지 함께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또 다른 이름 아닐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날 선 논리라기보다 울림 있는 기도로 들렸다.
이에 맞서 상대 변호인은 조문을 내세웠다. “혼인은 법적 계약입니다. 계약의 목적이 이미 상실되었을 때 그 존속을 강제하는 것은 법의 본뜻에 맞지 않습니다. 사랑이든 배려든, 그것은 감정일 뿐입니다.” 그 말은 철저히 법의 언어였지만, 어쩐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재판장은 잠시 눈을 감고 깊은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조용히 판결을 내렸다. “법은 사랑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법은 혼인의 존속 여부만을 다룰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혼인이 단순한 계약을 넘어 서로의 인생을 존중하고 지켜주겠다는 서약이라는 점입니다. 법은 서약이 깨졌는지를 묻지만, 사랑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당신들 스스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 말은 판결이라기보다, 살아온 세월을 돌아본 한 사람의 인생담처럼 들렸다.
방청석은 숨을 죽였고, 부부는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법정은 싸움의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을 배운 교실이 되어 있었다.
재판 후, 법정을 나선 효민은 석훈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저는 사랑이 증거가 아니라는 걸 배웠어요. 사랑은 증명하는 게 아니라, 지켜내는 거더군요.” 석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결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한 번의 서약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매일 새롭게 맺는 약속이죠. 매일 다시 쓰는 서약, 그게 결혼 아닐까요.” 두 사람의 대화는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였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했다.
사랑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상처 주며, 때로는 미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을 끌어안고 다시 시작하는 의지, 그것이 결혼의 진짜 얼굴일 것이다. 사랑을 서약한다고 해서 내일의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서약은 매일 다시 확인하고 지켜야 하는 불안정한 약속이다. 마치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 어제의 태양과 같으면서도 다르듯, 사랑의 서약도 하루하루 다시 빛을 받아야 한다.
재판장의 마지막 조언은 오래 남는다. “사랑의 서약은 법정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상의 작은 희생과 배려 속에서 이어집니다.” 이 한마디는 차갑던 법정을 따뜻하게 덮었다. 그것은 드라마의 대사가 아니라, 현실의 결혼 생활을 살아가는 모든 부부에게 보내는 편지 같았다.
<에스콰이어>의 마지막 회는 화려한 법정 공방보다 그 여운으로 기억될 것이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책임이고, 결혼은 제도가 아니라 매일 새롭게 선택하는 의지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서약,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드라마는 질문으로 끝났지만, 그 질문은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오늘도 사랑을 붙잡고 살아가는 이들,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 이들, 사랑을 믿고 결혼의 길을 걷는 이들 모두에게, 이 재판은 하나의 대답이 되었을 것이다. 사랑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결혼은 그 살아냄을 매일 새롭게 다짐하는 행위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사랑의 서약 너머,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