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좌탑 또는 우탑 백승종 세상읽기.jpg

백승종 역사학자, 금요포럼 자문위원

퇴계 이황은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그런 그도 34세가 되어서야 문과 시험에 급제(1534, 중종 29)했다. 그만큼 어려운 시험이 바로 문과였다. 그러나 시험에 합격한 뒤에도 이황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처가 안동권씨 집안이 정암 조광조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황의 장인 권질로 말하면, 기묘사화(1519)에 희생된 정언 권전(權磌)의 친형이었다. 그로 인해 중종과 명조 시대의 권력층은 이황을 꺼렸다. 설상가상으로, 이황은 당대의 세력가였던 김안로가 만나자고 제안하였으나 이를 거절해 미움을 샀다. 나중에, 이황의 친형 이해(李瀣, 1496-1550, 호는 溫溪)는 김안로의 모함에 걸려 유배를 갔다가 객사하고 말았다.

 

혼탁한 세상에 퇴계 이황은 어울리지 않았다. 일찍이 그의 모친 박씨는 높은 벼슬에 나아가지 말라. 세상이 너를 용납하지 않을까 두렵다.(언행록, 2)” 말하였다고 전한다. 어머니는 미리 앞을 내다보았던 것일까. 이미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 춘천박씨는 아들 이황이 어떤 사람인 줄을 정확히 판단하였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를수록 이황은 학자로서 명성이 자자해졌다. 그러자 그에게 높고 귀한 관직이 거듭 주어졌다. 그러나 이황의 뜻은 처음부터 부귀공명을 벗어나 있었다. 43세 되던 1543(중종38), 그는 호남의 친구 김인후를 전송하면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부귀영화란 내게 뜬구름과 같은 것이라오.” 권력과 재물을 탐하는 것이 자랑이 되는 요즘 풍속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이었다.

 

결국에 이황은 50세가 되자 조정에서 깨끗이 물러나, 고향 안동의 퇴계 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로도 그의 발걸음이 몇 차례 서울에 이르렀으나, 그것은 어쩌지 못해서 한 일이었다. 그의 마음은 늘 전원에 있었다.

 

1570(선조3), 70세가 된 이황은 몸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느꼈다. 그는 조용히 세상 떠날 준비를 하나씩 마쳤다. 영면하기 엿새 전, 그는 그동안 여러 사람에게 빌린 책을 모두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나흘 전에는 제자들과 영원한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그동안 잘못된 견해로 제군들을 종일토록 가르쳤구나.(언행록, 5)” 저세상으로 떠날 날이 되자 이황은 평소에 아끼던 매화 화분에 물을 듬뿍 주게 하더니, 얼마 뒤에는 꼿꼿이 앉은 채로 그대로 운명했다.(언행록, 5)

 

배움이 없는 안동의 백성과 종들도 이 대학자의 서거를 애도하였다. 심지어 여러 날 동안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고 전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사대부만 해도 3백 명이나 모였다. 퇴계 이황은 과연 한 시대의 아버지요, 한 세상의 우뚝한 사표(師表)였다.

 

사람은 백번 된다라는 말이 있다. 어떻게 기르느냐에 따라 사람의 언행이며 성정은 몇 번이고 바뀐다는 뜻이다. 어딘가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아이라도, 부모와 사회가 포기하지 말고 정성껏 잘 기르면 효험이 있을 것이라는 위로의 말이 아닐까 한다. 그와는 정반대로,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도 있다. 바뀌지 않는 것이 사람의 천성이라는 것인데, 그만큼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기는 어렵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군자 표변이라는 말도 <논어>에 보인다. 군자는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면 대번에 완전히 고친다는 것이다. 그만큼 내적 자각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언행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든 사람이 제대로 자라나기란 무척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위인이란 무엇이겠는가. 허물이랄까 제 잘못을 고치는 이가 바로 위대한 사람이다. 언젠가 읽은 글에서, 율곡 이이가 제자들에게 한 말이 생각난다. 그에 따르면, 퇴계 이황이 젊은 시절에는 축색(蓄色)’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요즘 말로, 이황은 성애(性愛)를 지나치게 밝혔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뒤에는 완전히 표변하여 도덕군자가 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평소에 퇴계 이황의 글을 흠모하여 거듭하여 읽고 배우려고 애쓴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글은 담백하면서도 빈틈이 없고 사려 깊어 보인다. 그야말로 만인의 사표라는 오래된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큰 인물이, 바로 퇴계 이황이다. 그런데 어머니 박씨부인은 이미 아들이 어렸을 적부터 그 아이가 장차 개결(介潔)한 학자로 자라날 줄 짐작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지극한 정성이 있었기에 이황 어린이의 앞날을 정확히 예감한 것이 아니었을까. 며칠 전은 어버이날이었다. 나는 과연 부모님에게 얼마나 성가시고 부족한 아이였을지, 그리고 또 자식들에게는 얼마나 무성의하고 부족한 아비인지를 곰곰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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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의 세상읽기] 부모님은 자녀를 가장 잘 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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