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제의 평택의 자연] 배다리에서 담는 가을 이야기
물들어가는 나뭇잎 한 장에도 가을의 정서 깃들어… 배다리 어디에서나 작은 생명의 속삭임 들을 수 있어

매미의 울음소리가 잦아들면서 배다리 습지와 실개천, 마을숲은 한결 부드럽고 차분해진다. 햇살은 낮게 내려앉아 여뀌와 고마리, 사마귀풀의 꽃잎을 핑크빛으로 물들이고, 시원한 바람은 육질과의 열매를 익게 하여 달콤한 향기를 주변에 흩뿌린다.
아이들이 뛰놀던 산책로와 마을숲 주변에는 가을강아지풀이 고개를 떨구고,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하늘거린다. 애매미, 말매미, 참매미의 소리는 이미 땅속으로 이어졌고, 쉴 새 없이 바쁘기만 한 뱁새와 물까치, 그리고 직박구리는 익은 열매를 찾아 산책로와 마을숲을 들락거린다.
배다리 어디에서나 우리는 계절의 흐름을 더듬으며 작은 생명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풀 한 포기, 물들어가는 나뭇잎 한 장에도 가을의 서정이 깃들어 있고, 풀벌레와 산새들은 그 속에서 하루하루를 엮어 간다.
낭아초가 푸르게 하늘을 가르고, 실개천 가장자리에는 달뿌리풀이 든든히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아그배나무에는 물까치가 찾아와 가을 소식을 전한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배다리생태공원은 더욱 풍성한 이야기를 품어낸다.
1. 파란 하늘에 걸린 낭아초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분홍빛 꽃송이를 이어가는 낭아초(2025.9.21 배다리마을숲)
꽃이 ‘이리의 어금니’처럼 생겼다는 뜻을 지닌 낭아초(狼牙草)가 핑크빛 촛대 모양의 꽃을 올려 오래전부터 푸른부전나비를 불러들이고 있다. 여름에 피는 꽃이지만 곁가지에서도 계속 꽃을 피우기에,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분홍빛 꽃송이가 이어지고 있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아래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꽃은 가을에도 여전히 생동감을 품는다.
2. 실개천의 터줏대감 달뿌리풀
배다리 전역에서 키를 키우고 이삭을 내고 있는 달뿌리풀(2025.9.21 배다리실개천)
이즈음 실개천에서는 키가 작은 물가 식물보다 애기부들, 큰고랭이풀, 달뿌리풀 같은 키 큰 정수식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은 잎이 부드럽고 뿌리가 튼튼해 서로 연결된 채 냇가 바닥을 단단히 움켜잡고 있다. 특히 달뿌리풀은 중·상류에 주로 서식하는 수생식물로, 물 흐름이 느린 곳에 뿌리를 내리고 차츰 줄기를 하천 바닥으로 뻗어가며 마디마다 뿌리를 내려 하천을 덮어 간다.
3. 가을 햇살 위의 네발나비의 춤사위
가을 햇살을 가르며 날갯짓하다가 개미취를 찾은 네발나비(2024.9.26 배다리마을)
사데풀, 왕고들빼기, 미국가막사리와 함께 보랏빛이 감도는 개미취 꽃송이는 네발나비가 즐겨 찾는 곳이다. 가을 햇살을 가르며 날갯짓하다가 꿀을 찾아 잠시 머무는 모습 속에서 다리의 수를 세어 보고, 왜 ‘C알붐나비’라 불리는지를 찾아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네발나비와 꽃등에, 꿀벌을 반기는 개미취의 꽃은 쥐방울덩굴 서식지와 배다리마을에서 10월까지 이어진다.
4. 숲속의 가을 전령사, 아그배나무
열매에 꽃받침이 없어 구별되는 아그배나무 열매를 입에 문 물까치(2023.9.30 배다리산책로)
붉게 익은 아그배 열매 사이로 물까치가 재빠르게 몸을 숨기며 다가온다. 회색 깃과 긴 꼬리를 흔들며 열매를 쪼아 먹는 모습은 활기차고 경쾌하다. 배다리에서 만날 수 있는 산수유, 팥배나무, 꽃사과나무의 열매와 함께, 아그배나무의 열매는 산새들에게 겨울을 준비하는 귀중한 먹이가 된다. 배다리 숲에는 그렇게 생명의 순환이 이어진다.
5. 돌미나리를 찾아낸 산호랑나비
떨어지는 물보라를 배경으로 산란을 위해 날아든 산호랑나비(2024.9.22 배다리실개천)
붉고 화려한 날개를 가진 산호랑나비가 물보라 치는 실개천 위로 가볍게 날아들었다. 검은 줄무늬가 선명한 노란 날개는 햇살을 받아 한층 더 빛나고, 잠시 먹이식물인 미나리 잎에 내려앉아 집중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실개천에서 떨어지는 물보라와 어우러진 흰여뀌, 여뀌바늘, 물달개비 등의 물풀과 대비되는 나비의 춤은 실개천의 가을 정취를 한층 더한다.
6.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배다리마을 화단에서 붉어지기를 기다리는 대추나무 열매(2025.9.21 배다리마을)
맑은 가을 하늘 아래, 대추나무 가지마다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매달린 대추는 가을 햇살을 머금어 더욱 윤기가 난다. 대추 열매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고, 더더욱 저 혼자 둥글어질 리도 없다. 장석주 시인의 글처럼, 그 안에는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그리고 무서리 내리는 몇 밤에 땡볕 두어 달이 지나야 할 것이다.
7. 가을강아지풀과 코스모스
가을 아침에 이슬에 젖은 가을강아지풀과 코스모스(2025.9.21 배다리산책로)
새벽이슬에 부드러운 이삭을 늘어뜨린 강아지풀 하나에도 가을이 숨어 있다. 함께 이슬을 맞았지만, 그 옆으로 연분홍빛 코스모스가 가볍게 흔들리며 길손을 반긴다. 7월에서 8월에 이삭을 올리는 강아지풀보다 한 달 정도 늦게 꽃을 내지만, 가을 초입에 꽃을 내는 코스모스와 함께 마을이나 공원길 어디서나 가을의 정취를 잘 나타낸다.
8. 배다리 전역에서 익숙한 풍경
식용 또는 약용으로 민초들에게 친근했던 왕고들빼기(2024.9.25 배다리마을)
새벽에 풀약을 치기 전 잎을 뜯는 농부 이야기, 논·밭에서 새참을 기다리며 뜯어놓은 쌈채 이야기,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쌉싸름한 맛과 영양을 지닌 왕고들빼기 요리 이야기 등 다양한 스토리를 지닌 왕고들빼기가 배다리마을과 생태공원 전역에서 옅은 노란색 꽃을 이어가고 있다. 왕고들빼기 뿌리 또한 건조 후 약재나 건강식으로 활용된다.
9. 부추밭의 네발나비들
큰 무리를 지어 부추꽃에 모인 네발나비(2024.9.24 배다리마을)
배다리마을 텃밭에 부추가 한창 꽃을 피우면서 꿀벌과 꽃등에, 나비 등 마을 곤충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나비의 월동 중 성체(어른벌레)로 겨울을 나는 네발나비가 무리를 지어 허기진 배를 넉넉하게 채운다. ‘한 쌍의 숨겨진 앞다리’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내면과 감정, 또는 숨겨진 재능에 관한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일들이 순간 스쳐 지나간다.
10. 마을숲의 고요 속에 잠든 배추흰나비
날개를 접고 숲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배추흰나비(2024.9.18 배다리마을숲)
옛날 어르신들은 “빨간 나비가 날아다니면 아직 봄이 안 온 것이고, 흰 나비가 날아야 진짜 봄이 온 것”이라 하셨다. 성체로 혹독한 겨울을 난 네발나비, 뿔나비, 큰멋쟁이나비보다는 번데기로 겨울을 난 배추흰나비 혹은 노랑나비가 날아야 진짜 봄이라 했는데, 마을숲에서 배추흰나비가 낮 동안 들판을 누비던 가벼운 날갯짓은 잠시 멈추고 편안한 쉼을 즐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