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제의 평택의 자연] 배다리의 가을, 풀벌레들의 노래
어린 시절 메뚜기를 잡아 놀던 기억, 대나무 집에 여치를 넣어 소리를 즐기던 추억은 우리 삶의 소중한 정서
배다리 산책로를 걸으면 풀숲마다 작은 음악회가 열린다. 저마다 다른 소리로 계절을 장식하는 주인공은 바로 여치, 베짱이, 긴꼬리, 귀뚜라미 등이다. 대다수 풀벌레, 특히 수컷은 암컷을 부르기 위해 소리를 내는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귀뚜라미는 앞날개의 톱날같이 생긴 줄을 마찰편에 비비면서 소리를 내고, 날개에 있는 넓은 막을 진동시켜 소리를 증폭한다.
사람들은 흔히 벼메뚜기와 섬서구메뚜기를 작물을 갉아 먹는 해충으로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풀을 뜯어 먹으며 다른 생명에게 에너지를 전달하는 소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새와 개구리, 뱀, 거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먹이가 되고, 먹은 풀을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 토양을 살리기도 한다.
어린 시절 논두렁에서 메뚜기를 잡아 놀던 기억, 대나무 집에 여치를 넣어 소리를 즐기던 추억은 세대를 이어온 우리 삶의 소중한 정서이기도 하다. 이번 글에서는 벼메뚜기, 섬서구메뚜기, 방아깨비를 비롯해 여치, 베짱이, 왕귀뚜라미, 방울벌레 등 배다리에서 만날 수 있는 풀벌레를 소개하려 한다. 그들이 전해주는 생태계의 메시지와 사람과 나눈 오랜 인연을 함께 느껴보자.
1. 익숙한 울음소리의 ‘왕귀뚜라미’
울음소리로 가을밤의 정취를 짙게 만들어 주는 왕귀뚜라미(2017.9.9. 덕동산마을숲)
말매미 울음이 잠잠해지고 귀뚜라미 소리가 낮게 드리우면 아침저녁으로 소매 긴 옷을 챙겨 입는다. ‘차르르르’ 울려 퍼지는 왕귀뚜라미의 깊고 낮은 울음소리는 가을밤의 정취를 더욱 짙게 만들며, 시와 노래 속에서는 외로움과 그리움, 고향의 향수로 표현되곤 한다. 가을 저녁 풀숲에 서면 시원한 바람 소리와 함께 그 울음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2. 가을밤의 현악기 ‘긴꼬리의 노래’
독특한 울음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끄는 긴꼬리(2010.9.12. 진위천 풀밭)
“리리리릿-리리리릿…”, 풀숲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긴꼬리의 울음은 맑고 가늘며 마치 가야금 줄을 튕기는 듯 여운이 길다. 작은 몸집에 비해 늘어진 꼬리를 지녀 ‘긴꼬리’라 불리며, 특별한 선율의 소리로 다른 풀벌레들과 구별된다. 낮보다 한밤중에 더욱 선명하게 울어 가을밤의 정취를 한층 깊게 해준다. 긴꼬리의 남다른 소리는 쓸쓸함보다 잔잔한 위로와 격려의 음악처럼 다가온다.
3. 맑은 방울 소리 ‘방울벌레’
청아하고 맑은 방울 소리를 내는 정서곤충, 방울벌레(2009.7.21. 비전동)
“리~잉, 리~잉, 리~잉.” 작은 몸집에서 청아하고 맑은 방울 소리를 낸다고 해서 ‘방울벌레’라는 이름이 붙었다. 암컷을 부를 때 날개를 직각에 가깝게 세워 우는 것이 특징이며, 오른쪽 날개의 작은 돌기와 왼쪽 날개의 마찰편을 비벼 소리를 낸다. 수컷은 날개돋이한 지 오래되지 않아 짝짓기를 위해 뒷날개를 떼어 버리는 습성이 있다.
4. 노래하는 게으름뱅이, ‘베짱이’
날개 길이가 몸보다 훨씬 긴 베짱이(2025.8.4. 배다리마을숲)
초록색의 널찍한 풀잎처럼 몸이 크고 통통한 여치의 몸통 길이는 날개 길이를 넘지 않지만, 베짱이는 날개 길이가 몸보다 훨씬 길다. ‘베짱이’라는 이름은 “스이익, 쩍~” 하는 울음소리가 베 짤 때 베틀 움직이는 소리와 비슷해 붙었으며, 그들의 울음소리는 풍류와 여유를 상징하기도 한다. 가을은 이렇게 다양한 곤충의 소리로 사람의 삶에 이야기를 보탠다.
5. 가을 풀숲의 현악기 연주자 ‘긴꼬리쌕새기’
한국산 쌕새기 중 암컷의 산란관이 가장 긴 긴꼬리 쌕새기(2003.9.19. 비전동)
긴꼬리쌕새기는 한국산 쌕새기 중 암컷의 산란관이 가장 길어 몸길이와 거의 비슷한 메뚜기류 곤충으로, 그 울음은 마치 작은 바이올린 소리처럼 섬세하고 맑다. 크지 않은 몸집이지만 소리는 의외로 멀리 퍼져 고요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깊은 울림을 남긴다. 배다리의 가을은 다양한 풀벌레들의 소리와 함께 이 작은 연주자의 노랫소리로 더욱 풍성해진다.
6. 몸이 가늘고 연약한 ‘실베짱이’
몸이 가늘고 여리여리한 실베짱이(2024.7.16. 배다리마을숲)
메뚜기목 여칫과에 속하는 베짱이류 중 실베짱이는 몸이 가늘고 연약한 종을 지칭한다. 배다리 풀숲에서 만날 수 있는 친구로는 실베짱이 외에도 줄베짱이와 검은다리실베짱이가 있다. “츠르르르릇!” 실베짱이 또한 가을 숲을 대표하는 풀벌레로, 잎새 위에 앉아 맑고 긴 노래로 계절의 깊이를 더한다.
7. 아이들의 오랜 친구, 벼메뚜기
추수의 계절에 쉽게 만날 수 있는 벼메뚜기(2013.10.13. 진위면 마산리)
벼메뚜기를 비롯한 메뚜기류의 소리는 귀뚜라미나 베짱이류와는 조금 다른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이들은 짝에게 구애할 때 ‘울음소리’라기보다는 단순한 ‘소리’를 내며, 주로 뒷다리의 마디에 있는 톱니 모양의 작은 돌기를 날개에 문질러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수확의 계절이 주는 기쁨과 함께 자연과 인간의 오랜 동행을 상징한다.
8. 수컷이 암컷 등에 업혀 다니는 ‘섬서구메뚜기’
몸이 길쭉한 역삼각형 모양의 섬서구메뚜기(2019.9.23. 월곡동)
아이들에게 방아깨비로 잘못 불리곤 하는 섬서구메뚜기는 방아깨비보다 몸집이 작고 뒷다리가 짧으며, 몸이 길쭉한 역삼각형 모양이라는 점에서 방아깨비와 구분된다. 또한, 섬서구메뚜기는 수컷이 암컷보다 훨씬 작아 짝짓기 후에도 암컷 등에 업혀 다니는 특성이 있어 아이들에게 “엄마 메뚜기가 아기를 업고 다닌다.”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9. 방아를 찧는 풀벌레 ‘방아깨비’
아이들에게는 잡는 재미가 있어 친숙한 방아깨비(2023.8.25. 배다리산책로)
방아깨비라는 이름은 뒷다리를 잡았을 때, 마치 방아를 찧듯 몸을 위아래로 끄덕이는 행동에서 유래했다. 이 행동은 방아깨비가 탈출하려는 몸부림으로, 뒷다리에 강한 힘이 있어 조금만 힘을 주어도 곧바로 도망갈 수 있게 하는 방어기제 중 하나다. 아이들에게는 잡는 재미가 있어 친숙하며,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풀벌레다.
10. 등 쪽의 줄무늬가 특징인 ‘줄베짱이’
실베짱이에 비해 포식성이 강한 줄베짱이(2008.10.8. 덕동산마을숲)
줄베짱이와 실베짱이는 외형적으로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주로 녹색이나 옅은 갈색 몸에 더듬이 부근까지 연결되는 등 쪽의 줄무늬가 있어 쉽게 구별된다. 또한, 줄베짱이는 꽃잎이나 꽃가루, 풀잎 등을 먹는 초식성 실베짱이와 달리 다른 곤충이나 애벌레를 잡아먹는 포식성이 강한 곤충이다. 등 쪽 줄무늬는 수컷이 갈색, 암컷이 황백색을 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