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0-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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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조선왕실의 태실』, 『경기도의 태실』 저자

본지 전문 필진인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이 조선왕실의 장태 문화를 상징하는 태실(胎室)에 대해 매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현재까지 위치가 확인된 왕의 태실은 총 24기로, 지난호에는 <성주 태종대왕 태실과 태봉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 연재에서는 <사천 세종대왕 태실>을 소개한다. <편집자 말>


■ 제자리를 잃은 세종대왕 태실, 태실 석물의 복원과 근원적 가치 회복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해


세종대왕의 태실(이하 세종 태실)은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 27번지에 위치해 있었으나, 현재는 태조와 태종 태실의 사례처럼 태실이 있던 자리에 분묘가 들어선 상태다. 현재 태실 석물은 태실지가 있는 산 아래로 옮겨져 별도로 수습·보관되어 있으며,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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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세종대왕 태실지의 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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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진 세종 태실의 석물


세종 태실의 조성 과정을 살펴보면, 1418년(세종 즉위년)에 전 대제학 정이오(鄭以吾)를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로 임명하였다. 정이오는 그해 10월 25일에 태실산도(胎室山圖)를 바쳤는데, 이는 진주의 속현인 곤명(昆明)에 위치한 산이었다. 이후 세종의 태실은 현재의 위치로 봉안되는 과정을 거쳤으며, 『세종실록』을 통해 당시에는 돌난간이 아닌 나무 난간을 세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돌난간을 설치할 경우 지맥(地脈)을 손상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돌난간은 이후 개수 과정에서 새롭게 설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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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태실의 가봉태실비. 『태봉등록』의 기록을 통해 1734년에 처음 건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곤명현(昆明縣)에 세종의 태실이 조성되면서, 이후 곤명현은 남해현(南海縣)과 합쳐져 곤남군(昆南郡)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세종의 태실은 이후 개수를 거쳤는데,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세종대왕태실석난간수개의궤(世宗大王胎室石欄干修改儀軌)』와 『태봉등록(胎封謄錄)』이다. 이 가운데 『태봉등록』 갑인년(甲寅年, 1734)의 기록을 통해 곤양 땅에 있는 세종과 단종 태실의 표석(表石)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해당 표석은 가봉태실비(이하 가봉비)로, 이 기록을 통해 당시 처음 건립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최초로 세운 세종의 태실에는 가봉비가 없었다는 사실도 해당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남아 있는 세종 태실의 가봉비 후면에는 ‘숭정기원후일백칠년갑인구월초오일건(崇禎紀元後一百七年甲寅九月初五日建)’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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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으로 이봉된 세종의 태실, 태실비의 전면에 ‘세종대왕태실’, 후면에 ‘□□□년오월자경남사천군곤명면이봉’이 새겨져 있다.

 

한편, 세종의 태실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현재의 서삼릉으로 이봉되었으며, 이와 관련된 내용은 『태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해당 기록에 따르면 1928년 8월 27일에 세종 태실을 봉출한 뒤, 오후에 황영문의 집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또한, 남아 있던 석물은 사천군 곤명면에서 기념으로 영구 보존을 희망해 양도한 사실도 해당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의 태실은 8월 29일부터 30일까지 ‘은사리-진주역-경성역’을 거쳐 경성으로 옮겨졌으며, 1930년 4월 15일에 서삼릉 경내에 봉안되었다. 이렇게 서삼릉으로 옮겨진 세종의 태실비 전면에는 ‘세종대왕태실’, 후면에 ‘□□□년오월자경남사천군곤명면이봉’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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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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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손된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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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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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석


현재 세종 태실에 남아 있는 석물은 ▶주석 ▶전석 ▶상석 ▶가봉비 등이다. 반면 중앙태석의 경우, 1967년 한국미술사학회에서 발표한 『세종·단종대왕의 태실 조사』에 사진으로만 남아 있을 뿐, 그간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사천 세종대왕 태실지가 도지정 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1975년으로, 지정 당시에는 중앙태석이 없었다. 따라서 1967년~1975년 사이에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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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박물관에서 확인된 세종 태실의 중앙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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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한국미술사학회에서 발표한 <世宗·端宗大王의 胎室調査>에 실린 세종 태실의 중앙태석 사진


그러던 중 2024년 1월, 사라졌던 세종 태실의 중앙태석이 청주박물관 야외에서 전시 중인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해당 유물은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으로, 구체적인 입수 경로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 발견된 중앙태석은 과거 사진과 완전히 동일한 상태는 아니었다. 중앙태석을 구성하는 ▶개첨석 ▶중동석 ▶사방석 가운데 개첨석과 중동석만 남아 있고, 사방석은 없는 상태다. 그럼에도 중앙태석의 발견은 세종대왕 태실 석물의 온전한 복원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세종의 태실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다. 태실 자체에서 드러나는 생명관과 풍수지리를 비롯해 역사적 상징성과 세종대왕이라는 개인 브랜드까지 집약된 공간이다. 오랜 세월 동안 원래의 자리를 잃고 석물 또한 일부가 흩어졌지만, 최근 중앙태석의 발견은 세종 태실 복원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당장은 원위치 복원이 어려운 만큼, 남아 있는 석물과 관련 기록을 대조하여 석물의 원형 복원을 우선시할 필요가 있다. 이후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원위치로의 완전한 복원도 함께 준비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세종 태실이 지닌 근원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고, 후대에 올바른 역사 인식을 전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자료


『국역 태봉등록』, 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세종실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가원(역), 1968

『세종실록』,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재호(역), 1968

『世宗·端宗大王의 胎室調査』, 한국미술사학회, 1967

김희태, 『조선왕실의 태실』, 2021, 휴앤스토리 

김희태, 『경기도의 태실』, 2021,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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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가 소개하는 조선왕실의 태실] 사천 세종대왕 태실,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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