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 전문 필진인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이 조선왕실의 장태 문화를 상징하는 태실(胎室)에 대해 매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현재까지 위치가 확인된 왕의 태실은 총 24기로, 지난호에는 <김천 직지사와 정종대왕 태실>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 연재에서는 <성주 태종대왕 태실과 태봉사>를 소개한다. <편집자 말>
■ 성주에 있는 태종대왕 태실지, 현재는 관련 흔적을 찾기 어렵다.
경상북도 성주군에 태종대왕의 태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태종의 태실은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산 65번지’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앞선 태조와 정종의 태실 사례처럼 태종의 태실 역시 애초부터 성주군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태종 태실지의 원경
태종의 태실이 있던 자리. 현재 분묘가 들어서 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1401년(태종 1년) 당시 민제(閔霽)가 함주(咸州, 현재의 함흥)에 있던 태종의 태를 경산부(京山府) 조곡산(祖谷山)으로 옮겨 태실을 조성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정조실록』에는 열성조의 태봉 위치에 대해 태종대왕의 태봉이 성산(星山) 조곡산에 있다는 내용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태종의 어태(御胎)를 안치한 것을 계기로 성주목으로 승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석물 수습 이전 태종 태실지. 분묘 조성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태실 난간석이 확인된다. <사진 = 성주군청 제공>
분묘 주변에 흩어져 있던 태실 석물. <사진 = 성주군청 제공>
태종 태실의 난간석. 분묘 조성 때 재활용된 것으로, 지난 2015년 성주군에서 수습해 별도의 수장고로 옮겨 보관 중이다. <사진 = 성주군청 제공>
이렇게 조성된 태종의 태실은 가운데 중앙태석이 있고, 난간석을 두른 형태인 가봉태실로 확인된다. 『태봉』에 따르면 1928년 8월 12~13일에 태종 태실이 봉출되어 이병석의 집에 임시로 봉안한 뒤 8월 14일에 봉출지를 매립했다. 이후 태실은 경성으로 옮겨져 임시로 마련된 봉안실에 보관되다가 1930년 4월 15일에 서삼릉으로 옮겨져 최종 봉안되었다. 현재 서삼릉에 있는 태종의 태실비 전면에는 ‘태종대왕태실’이라는 명문이, 후면에는 ‘□□□년오월자경북성주군성암면이봉’이 새겨져 있다.
서삼릉으로 옮겨진 태종 태실. 태실비의 전면에 ‘태종대왕태실’, 후면에 ‘□□□년오월자경북성주군성암면이봉’이 새겨져 있다.
한편, 현재 태종의 태실이 있던 자리는 분묘가 들어선 상태로, 과거 석물이 묘 주변에 흩어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 새마을사업의 추진 과정과 분묘를 조성하면서 사용되기도 했으며, 이후 성주군은 2015년 남아 있던 석물을 수습해 별도의 수장고로 옮겨 보관 중이다. 당시 수습된 석물은 ▶태함의 개석 ▶중앙태석 중 개첨석 ▶난간주석 ▶동자석 ▶횡죽석 ▶전석 등이다. 이를 『태봉』에 남아 있는 태종 태실의 석물 실측도와 비교했을 때, 중앙태석 중 사방석과 중동석이 유실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다행스러운 점은 태종 태실의 경우 실측된 도면이 남아 있어 원형 복원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경상도읍지』 「성주목읍지」에 따르면 조곡산에 태봉사(胎峰寺)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찰명과 위치로 미루어 태종 태실의 수호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 2012년 (재)대동문화재연구원이 진행한 지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대봉 1리 마을 남서편 골짜기 일대의 ‘절골’에서 분청자편, 백자편 등 자기편과 파상문이 시문된 기와편이 출토된 바 있어 이곳이 기록에 언급된 태봉사지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이처럼 태종 태실의 경우, 앞선 태조의 태실 사례와 유사한 면이 있다. 태실지에 분묘가 들어섰고 일부 석물이 훼손되었지만, 『태봉』에 실측도가 남아 있어 가봉태실비를 제외한 태실 석물의 원형 복원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재로서는 원위치에 태실을 복원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므로, 우선 수장고에 보관 중인 태실 석물을 남아 있는 기록과 대조하여 원형 복원을 우선시할 필요가 있다. 또한 상징성이 있는 장소에 복원된 태실 석물을 임시로 안치하고, 장기적으로 원위치로의 완전한 복원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태실 수호사찰인 태봉사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도 병행되어야 한다. 태봉사는 태종 태실과 별개로 볼 수 없는 성격의 장소다. 따라서 태종 태실의 근원적인 가치 회복을 위해서는 태봉사의 위치와 규모, 성격을 파악하는 등의 재조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태종 태실의 복원은 단순히 유적을 되살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남아 있는 기록과 실측 자료, 석물, 그리고 지역의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한 체계적인 접근은 중요한 모범 사례가 될 것이다.
※ 참고자료
한국고전번역원, 『신역 태종실록』, 조경임·임희자·구범진(공역), 202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정조실록』, 김구진(역), 1993
한국고전번역원, 『신증동국여지승람』, 이식(역), 1969
김희태, 『조선왕실의 태실』, 2021, 휴앤스토리
김희태, 『경기도의 태실』, 2021, 경기문화재단
『성주 태종·단종태실 학술(지표)조사 결과보고서』, 2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