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 전문 필진인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이 조선왕실의 장태 문화를 상징하는 태실(胎室)에 대해 매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지난호에는 <조선의 건국과 왕의 태실, 금산 태조대왕 태실>에 대해 알아보았다. 현재까지 위치가 확인된 왕의 태실은 총 24기 가운데 이번 연재에서는 <김천 직지사와 정종대왕 태실>을 소개한다. <편집자 말>
■ 김천 직지사에 있던 정종 태실지, 일제강점기 당시 서삼릉으로 이봉된 이후 훼손된 채 방치돼
조선의 두 번째 왕인 정종(定宗)의 태실은 김천 직지사 대웅전 뒤쪽 봉우리, 즉 북봉에 위치해 있다. 정종*은 즉위 후인 1399년(정종 1)에 여흥백(驪興伯) 민제(閔霽)를 하삼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보내어 안태(安胎)할 땅을 찾게 하였다.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정종의 태실 역시 태조와 태종의 사례처럼 최초 근거지였던 동북면에 매태 방식으로 조성되었으며, 즉위 후에는 전례에 따라 가봉태실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 유의할 점은 숙종 이전까지 정종은 묘호가 없었으며,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그를 공정왕(恭靖王)으로 표기하였다. 1681년(숙종 7)에 이르러서야 정종의 묘호가 올려졌으며, 이에 따라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공정왕으로, 『정조실록』에는 정종으로 각각 다르게 표기된 것이다.)
김천 정종대왕 태실지. 일제강점기 당시 서삼릉으로 태실이 이봉되면서, 지금은 훼손된 채 방치되고 있는 모습이다.
『정종실록』에는 태실지를 찾고 어태를 안치하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민제를 하삼도로 파견한 시기는 1월 19일이며, 그해 4월 5일에는 중추원사 조진(趙珍)을 김산현(金山縣)으로 파견하여 어태를 안치하였다. 이후 김산현은 김산군(金山郡)으로 승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태실이 현의 서쪽 10리에 있는 황악산(黃岳山)에 안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정조실록』에는 정종대왕의 태봉이 금산(金山)** 직지사(直持寺) 뒤에 있다고 적혀 있다.
(** 김천시의 전신인 ‘金山’의 표기와 관련해 『정종실록』은 김산, 『정조실록』 금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우전석. 태실 관련 석물이 흩어진 채 방치되어 있다.
연엽주석. 난간석을 이루는 석물이다.
횡죽석. 파괴된 채 일부만 남아 있는 모습이다.
현재 정종의 태실지는 일제강점기 당시 태실이 이봉된 이후 훼손된 채 방치되어 있다. 태실지 주변에는 난간석을 이루는 연엽주석과 우전석 등의 석물이 흩어져 있으며, 중앙태석은 직지사 경내로 옮겨져 원형이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직지사지』 「금산직지사중기」에 따르면 정종대왕 태실을 중심으로 태실수호봉산이 지정되었고, 하마비와 금표 등이 세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 현재 이들 표석은 남아 있지 않다.
직지사 경내에 남아 있는 중앙태석. 개첨석과 중동석, 사방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직지사 성보 박물관의 야외에 전시된 연엽주석
태실석물중수정공욱제불망비(胎室石物重修鄭公旭濟不忘碑)
『일성록』에 따르면 1799년(정조 23)에 직지사 승통의 첩보가 언급되며, 직지사가 정종공정대왕의 태실을 봉안하고 수호하는 사찰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쇠락한 직지사를 일으키기 위해 유점사의 사례를 참고하여 승첩 100장을 하사한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특히, 정종 태실은 다른 태실 유적에서는 보기 어려운 개수와 관련된 불망비가 있어 주목된다. 직지사 성보박물관 야외에 위치한 ‘태실석물중수정공욱제불망비(胎室石物重修鄭公旭濟不忘碑)’는 태실을 중수할 때 금전적으로 기여한 정욱제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확인된다.
김천 직지사. 정종대왕 태실의 수호사찰로, 『직지사지』 「금산직지사중기」에 따르면 태실수호봉산으로 지정된 사실과 하마비, 금표 등이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정종의 태실지와 직지사 경내에 흩어진 태실 석물은 가봉태실비와 동자석 정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잘 남아 있는 편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태실이 있던 원위치가 훼손되기는 했지만, 민묘나 시설물이 들어선 것은 아니기에 복원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원형 회복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앞서 태조의 태실 사례에서도 언급했듯, 태실의 근원적 가치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서삼릉으로 옮겨진 정종대왕 태실. 전면에 ‘정종대왕태실’이, 후면에 ‘□□□년 오월 자경북김천군대항면이봉’이 새겨져 있다.
한편, 1930년 4월 15일, 일제강점기 시기 정종 태실이 서삼릉으로 이봉되었으며, 비석 전면에는 ‘정종대왕태실(定宗大王胎室)’이, 후면에는 ‘□□□년 오월 자경북김천군대항면이봉’이 새겨져 있다. 김천 직지사와 정종대왕 태실은 태실 조성에 있어 풍수지리와 불교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태실이 지닌 상징성과 역사적 의미를 고려할 때 그 본래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정종 태실을 비롯한 왕의 태실을 복원하는 것은 단순히 문화유산의 원형을 복원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러한 복원을 통해 우리 역사에 대한 정체성을 되새기고, 태실 유적의 근원적 가치를 회복함으로써 향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넓은 시각을 가지고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 참고자료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정종실록』, 이식(역), 1974
한국고전번역원, 『정종실록』, 박한라·구범진(공역), 202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정조실록』, 김구진(역), 1993
한국고전번역원, 『일성록』, 김장경(역), 2016
김희태, 『조선왕실의 태실』, 2021, 휴앤스토리
김희태, 『경기도의 태실』, 2021, 경기문화재단
『2022 태봉·태실의 세계유산 가치성 연구』 자료집, 2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