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0-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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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조선왕실의 태실』, 『경기도의 태실』 저자

본지 전문 필진인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이 조선왕실의 장태 문화를 상징하는 태실(胎室)에 대해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동안 왕릉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던 태실은 보존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복원과 연구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번호부터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말>

 

태실이 조성되면 이를 관리하고 수호하기 위한 일련의 행위도 함께 이루어졌다. 그런데 태실을 수호하는데 있어 사찰의 역할이 적지 않아 눈길을 끈다. 이때 사찰이 담당한 기능은 단순한 종교적 차원을 넘어 왕실의 생명관과 의례 체계에 깊이 관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찰의 역할은 태실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능원을 수호하기 위해 설치된 능침사(陵寢寺)나 왕실의 제향에 필요한 제수(祭需)를 조달한 조포사(造泡寺) 등에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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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봉선사(奉先寺). 광릉의 원찰인 봉선사에는 하마비와 봉선사 동종 등이 있다.

 

또한,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을 건립하거나 지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원찰(願刹, 원당)’이라고 한다. 조선왕릉 가운데 광릉(光陵,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원찰로 지정된 남양주 봉선사(奉先寺)는 대표적인 예로, 왕실의 사후 안녕을 기원하는 불교적 의례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원찰은 조선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삼국시대에도 그 전례를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신라 성덕왕(聖德王) 대에 창건된 봉덕사(奉德寺)는 태종대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의 명복을 빌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사찰로, 삼국유사성덕왕조에 그 창건 배경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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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신종.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경덕왕 때부터 주조를 시작해 혜공왕 때 완성된 성덕대왕신종이 최초 봉덕사에 있었다. 봉덕사는 태종무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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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흥사지(王興寺址).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건립한 원찰이다.

 

백제의 경우, 부여 왕흥사지(王興寺址)에서 출토된 사리기의 명문을 통해 577(정유년, 위덕왕 24)에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이 죽은 왕자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원찰로 확인되었다. 이는 불교가 왕실의 사후 복덕을 기원하는 제도적 장치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백제 왕릉급 고분인 부여 능산리 고분군 인근에서 확인된 능산리사지(陵山里寺址)의 경우, 출토된 석조사리감의 명문에 근거하여 성왕(聖王, 재위 523~554)의 원찰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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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파계사 원당봉산 표석

 

한편, 왕실과 관련된 사찰에서는 공통적으로 하마비(下馬碑)가 확인되는데, 이는 궁궐·종묘·성균관·향교·서원·유허지 등 왕실과 유교적 성격의 건축물 등에 주로 세워졌던 점을 고려할 때, 해당 사찰이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대구 파계사(把溪寺)를 들 수 있다. 파계사에서는 원통전에 봉안된 관음보살상의 복장에서 영조의 어의(御衣)가 출토된 바 있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하마비와 함께 원당봉산(願堂封山, 대구시 동구 중대동 산1) 표석등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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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법주사 봉교비(奉敎碑)

 

또한, 보은 법주사(法住寺)의 경우 영빈 이씨의 선희궁 원당(宣喜宮 願堂)과 순조대왕 태실이 있어 왕실의 원당사찰이자 태실수호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법주사에는 일반 사찰에서는 보기 어려운 봉교비(奉敎碑)가 세워져 있어 주목된다. 해당 비석에는 봉교 금유객제잡역 함풍원년삼월일입 비변사(奉敎 禁遊客除雜役 咸豊元年三月日立 備邊司)’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1851(철종 2) 3월에 비변사의 주도로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법주사 일대에서의 노는 행위를 금지하고, 승려들에게 부과되던 잡역을 면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태봉등록을 보면 왕과 왕비 태실의 경우 별도의 수직(守職)을 두어 태실을 수호하게 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체계적인 관리는 쉽지 않았는데, 이유는 도성에서 가까이에 있는 능원과 달리 태실은 주로 산의 정상이나 깊은 산속에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지적인 조건은 사찰이 태실을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 최적의 조건이 되었던 셈이다. 그렇기에 조정에서는 태실 주변의 사찰을 태실수호사찰로 지정하고 태실의 관리를 맡겼으며, 완문이나 교지를 내려 승려의 잡역을 면하게 하는 등의 조치를 내렸다.

 

조선왕실의 태실과 태실수호사찰


이러한 태실수호사찰의 주요 사례로 김천 직지사(直指寺)=정종대왕 태실 예천 명봉사(鳴鳳寺)=문종대왕 태실, 사도세자 태실 영천 은해사(銀海寺)=인종대왕 태실 부여 오덕사(五德寺)=선조대왕 태실 보은 법주사(法住寺)=순조대왕 태실 예천 용문사(龍門寺)=폐비 윤씨, 문효세자 태실 성주 선석사(禪石寺)=성주세종대왕자 태실 등이 있다. 물론 이외에도 기록이나 태봉도, 현장 등을 종합해 보면 태실수호사찰로 추정되는 사찰이 적지 않으나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폐사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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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직지사(直指寺). 대웅전 뒷봉우리에 정종대왕 태실이 있었다.

 

하나씩 살펴보면 김천 정종대왕 태실의 경우 직지사(直指寺) 대웅전 뒷봉우리에 태실이 조성되었는데, 세종실록』 「지지리에는 황악산에 어태를 안치했음을 적고 있으며, 정조실록에는 금산(金山)의 직지사(直持寺) 뒤에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일성록에는 직지사 승통(僧統)의 첩보(牒報) 내용이 나오는데, “본사(本寺)는 정종 공정대왕(定宗恭靖大王)의 태실(胎室)을 봉안하고 수호하는 사찰입니다.”라고 언급하고 있어 직지사가 정종대왕 태실의 수호사찰인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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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명봉사(鳴鳳寺). 문종대왕과 사도세자 태실의 수호사찰이다.

 

예천 명봉사(鳴鳳寺)에는 문종대왕 태실과 경모궁 태실(사도세자 태실)이 있는데, 명봉사와 두 태실의 관계는 장조태봉도에 잘 묘사되어 있다. 정조실록을 보면 문종의 태실이 풍기(豐基)의 명봉사(鳴鳳寺) 뒤에 있다고 적고 있으며, 일성록에는 순조 때 승려 장신(奬信) 등이 올린 상언에서도 본사(本寺)는 바로 문종대왕(文宗大王)과 경모궁(景慕宮)의 태실(胎室)을 수호하는 사찰입니다.”라고 언급하고 있어 명봉사가 두 태실의 수호사찰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경모궁 태실(사도세자 태실)의 경우 세자의 태실로는 유일하게 가봉이 이루어진 사례로, 이와 관련한 주목해볼 금석문이 명봉리 경모궁 태실 감역 각석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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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은해사(銀海寺). 인종대왕 태실의 수호사찰이다.

 

인종대왕 태실은 태실봉의 정상에 있는데, 정조실록에는 영천(永川)의 공산(公山, 팔공산)에 있다고 적고 있다. 인종 태실의 수호사찰은 은해사(銀海寺), 이를 보여주는 흔적이 은해사에 남아 있는 하마비와 영천군수 이인원(李寅元, 1782~1849)의 불망비다. 해당 불망비에는 은해사가 인종의 태실수호사찰임을 밝히고 있다. 다만, 백흥암(百興庵) 진영각에 있는 순영제음(巡營題音)’ 현판과 여기에 기록된 완문을 통해 은해사의 부속 암자인 백흥암이 실제 관리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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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오덕사(五德寺). 선조대왕 태실의 수호사찰이다.

 

선조대왕 태실의 수호사찰은 오덕사(五德寺), 승정원일기를 보면 1727(영조 3) 127일에 함릉군(咸陵君) 이극(李極)이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주요 내용은 오덕사가 복성군(福城君)의 원당이자 선조의 태실을 수호하는 재궁(齋宮)인 사실과 당시 오덕사가 쇠락하여 태봉을 수호하기 어렵기에 오덕사를 예조에 포함, 승려들로 하여금 수호를 책임지게 하도록 요청하는 내용이다. 현재 오덕사에는 선조의 태봉에서 옮겨진 가봉태실비가 경내로 옮겨져 있으며, 선조의 어필을 봉안한 어필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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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법주사(法住寺). 순조대왕 태실의 수호사찰이다.

 

순조대왕의 태실 수호사찰은 법주사(法住寺), 이는 1851(철종 2) 예조에서 발급된 보은군속리산법주사판하완문절목을 통해 확인된다. 또한, 순조태봉도를 보면 순조의 태봉을 중심으로 수호사찰인 법주사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앞서 소개한 봉교비도 법주사가 왕실의 원당사찰이자 태실수호사찰이기 때문에 건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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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용문사(龍門寺). 대장전(大藏殿) 뒤로 보이는 봉우리에 문효세자 태실이 있다.

 

예천 용문사(龍門寺)는 문효세자 태실의 수호사찰로, 일성록을 보면 서호수(徐浩修)가 올린 장계를 통해 문효세자의 태실을 봉안한 뒤 수호하는 역할을 용문사의 승려들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용문사에는 폐비 윤씨의 태실이 있어, 위치상 용문사가 태실수호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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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선석사(禪石寺). 사찰 이름의 유래가 된 바위와 뒤로 보이는 대웅전

 

마지막으로 성주 선석사(禪石寺)는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의 수호사찰로, 일성록을 보면 1788(정조 12) 818일에 성주(星州) 사람 송오석(宋五錫)의 말을 인용해 선석사(禪石寺)에 태실(胎室)을 창건할 때 수호(守護)할 목적으로 60결을 급복(給復)하고 크고 작은 지역(紙役) 등의 잡역을 영구히 탈급(頉給)해 주어 폐단 없이 거행해 왔다.”라고 적고 있어 선석사가 태실수호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조선왕실의 태실을 수호한 사찰의 존재는 불교, 유교, 풍수지리 등 상이한 사상들이 조선 사회 내에서 상호작용하며 공존한 문화적 양상을 반영한다. 특히, 태실은 왕실의 생명관과 불교적 신앙이 결합된 상징적인 공간으로, 조선의 종교·사상적 복합성을 드러내고 있다. 숭유억불 기조에도 불구하고, 사찰이 왕실과 관련된 의례적 기능을 수행하며 존속할 수 있었던 사실은 조선 사회의 종교적 관용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국립문화재연구소, 태봉등록, 2019

한국고전번역원, 승정원일기, 이윤희(), 2013

한국고전번역원, 일성록, 이강욱(), | 2003

한국고전번역원, 일성록, 홍기은(), 2005

한국고전번역원, 일성록, 김장경(), 2016

한국고전번역원, 일성록, 신하령(), 2022

김희태, 한국의 금표, 2023, 휴앤스토리

김희태, 조선왕실의 태실, 2021, 휴앤스토리

김희태, 경기도의 태실, 2021, 경기문화재단

2022 태봉·태실의 세계유산 가치성 연구자료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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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가 소개하는 조선왕실의 태실] 사찰이 태실(胎室)을 수호했던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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