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0-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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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조선왕실의 태실』, 『경기도의 태실』 저자

조선왕실의 태실(胎室)은 왕의 자녀가 태어날 경우 조성되었으며, 태주가 왕위에 오르면 별도의 가봉(加封) 절차가 이루어졌다. 


가봉 절차는 아기씨 태실의 조성 과정과 큰 차이가 없었다. 

 

우선 조정에서 가봉의 필요성에 대해 주청이 올라오고, 이에 대한 윤허가 떨어지면 관상감에서 삼망단자(三望單子)를 올려 길일을 추천했으며, 왕이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방식으로 재가가 이루어졌다. 

 

이후 가봉에 필요한 석재와 인력을 동원해 태실의 가봉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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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 순조대왕 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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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 명종대왕 태실의 장태 석물. 난간석 안쪽에 중앙태석이 자리한 모습이다.


기존 아기씨 태실은 일반적인 묘의 형태와 큰 차이가 없었으나, 가봉 태실은 추가적인 석물이 설치되어 마치 왕릉의 축소판과 같은 모습을 띠었다. 가봉 태실의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태함이 있는 곳 위에 전석과 상석을 깔고, 전석 위에 석난간(주석+동자석+횡죽석)을 두르는 방식이었다. 안쪽에는 중앙태석(개첨석+중동석+사방석)이 배치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장태 석물의 앞쪽에 가봉 태실비(귀롱대석+비신+이수)가 세워졌다. 이처럼 가봉 태실은 아기씨 태실과 달리 석재 사용이 많았기에, 가봉에 필요한 석재를 확보하고 옮기는 일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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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평 중종대왕 태실. 가봉 이후 가평현에서 군으로 승격되었다.


석재의 이동에는 많은 인력이 소요되었으며, 당시 모든 작업이 인력에 의존했던 시대적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실제 『태봉등록』이나 실록 등의 기록을 보면 가봉이 연기된 사례가 확인되기도 한다. 특히, 태실을 가봉하는 데 있어 농번기를 피해 진행하는 것은 불문율에 가까웠으며, 천재지변이나 흉년, 역병 등이 발생했을 경우에도 가봉이나 개수가 연기되기도 했다. 한편, 가봉이 이루어지면 해당 지역의 승격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1399년(정종 1) 정종의 태실을 금산(金山, 현 경북 김천)에 조성한 후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1507년(중종 2) 가평에 있던 중종의 태실을 가봉한 후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었다.


■ 백성들과 지식인들이 바라본 태실은?


이처럼 문화적인 관점에서 태실은 우리만의 고유하고 독창적인 장태 문화라고 할 수 있지만, 태실에 대한 인식이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사는 마을에 태실이 조성되면, 태실 공사에 동원되는 부역 문제는 물론이고, 이후 태실을 보호하기 위한 경계가 설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계의 안과 바깥쪽에서 출입이나 벌채까지 금지되었기 때문에 지금으로 비유하면 일종의 그린벨트가 형성되는 셈이었다.


또한 태실을 조성할 때 백성들의 집이나 전답이 포함될 경우,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나야 했다. 지금으로 비유하면 재산권의 침해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부분으로, 이런 점에서 백성들에게 태실은 반드시 긍정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제 『중종실록』을 보면 장령(掌令) 권벌(權橃)이 경산(慶山) 땅에 인종의 태실을 조성할 때 근처에서 묵었는데, 그곳에 집이나 전답을 가지고 있던 백성들이 모두 울부짖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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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은 순조대왕 태실 금표(禁標). 후면에 서(西)가 새겨져 있어 서쪽 경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조선 사회에 대한 정치·사회적 불만이 태실 훼손 사건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1575년(선조 8)에 백성들이 서산에 있는 명종 태실의 돌난간을 깨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실화로 인해 태실이 훼손되는 사례도 있었다. 조정에서는 태실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면, 관리의 소홀함을 이유로 지방관을 파직시키는 등 엄격한 조치를 취했다. 반면 태실을 지킨 이들에게는 포상이 주어졌다. 1643년(인조 21) 실화로 인해 세종대왕자 태실이 훼손될 위기에 처했을 때 불을 끄는 데 앞장선 승려 나헌과 승려 6명에게 인조는 베 1필과 쌀 2말을 포상으로 지급하고, 승역(僧役)을 감면해준 후 수직(守職)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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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 현암리 태봉 귀부. 최초 선조의 태실 공사가 이루어진 곳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태실에 대한 폐단은 관리와 지식인들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이러한 비판을 더욱 촉발한 사건이 선조의 태실 조성 과정이었다. 선조(宣祖, 재위 1567~1608)는 방계 출신이었기에 태실 조성이 되지 않았고, 잠저(潛邸)의 정원 북쪽 소나무 숲에 태를 묻었다. 그러다 왕위에 오른 후 강원도 춘천에 가봉 태실을 조성하게 되는데, 문제는 태실 공사가 끝날 무렵 해당 자리가 과거에 태를 묻었던 자리인 것이 확인되어 논란이 되었다. 당시 이를 알고도 공사를 진행했던 관찰사 구사맹이 파직되었고, 결국 깨끗한 자리를 골라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임천(林川)에 태실을 조성했다. 임천은 현재의 부여군으로, 부여에 선조대왕 태실이 있게 된 배경이다. 『현종개수실록』에서는 당시 사관이 태실의 폐단을 언급하며 “… 성상에서부터 왕자와 공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봉이 있었으니, 이러한 우리나라 풍속의 폐단에 대해서 식견 있는 자들은 병통으로 여겼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수정실록』에는 “당시 굶주린 백성들이 돌을 운반하는 데 동원되어 성태(聖胎, 선조대왕 태실) 하나를 묻는데 그 피해가 3개 도시에 미쳤으므로 식자들이 개탄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 또한,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이 흉년에 민생이 도탄 중에 있는 때를 당하여 대신과 대간들이 임금을 도와 백성을 구제하는 데 급급하지 아니하고, 바르지 못한 말에 미혹해서 여러 번 성태(聖胎)를 옮겨서 3도의 민력(民力)을 다하고도 구휼하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산릉의 자리를 가려서 정하는 것이 태를 묻는 것보다 중한데도 오히려 고장(古藏)을 피하지 않고 남의 분묘(墳墓)까지 파내는데, 태를 묻는 데는 오히려 옛 자리를 피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또 국내의 산은 다만 정한 수가 있고 역대는 무궁하니 한 번 쓴 곳은 다시 쓰지 못한다면 다른 나라에 구할 것인가. 그것을 계속할 도리가 없음이 명백하다.” - 『연려실기술』 별집 제2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장태(藏胎) 중  


■ 「태봉윤음(胎峰綸音)」과 태실 조성의 변화


이러한 태실의 조성과 관련한 중요한 분기점이 1758년(영조 34)에 있었는데, 이때 영조는 승지에게 구술을 받아 적게 하는 방식으로 「태봉윤음(胎峰綸音)」을 하교했다. 태봉윤음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태실의 폐단과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함으로, 영조는 “지금은 한 태(胎)를 묻는 데에 문득 한 고을을 이용하니, 그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즉, 태실이 너무 많은 땅을 차지하는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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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영조는 태실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 해당 태실을 주목했다.


그러면서 영조는 세조대왕의 태실을 언급하며, 옮기지 않고 돌만 세운 것을 아름답고 거룩한 것이라 칭송했다. 이때 영조는 태실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대안으로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의 사례를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에는 세종대왕의 왕자 18명의 태실이 집장되어 있는데, 실제 영조가 개선 방향을 내놓은 것을 보면 이후로는 새로운 태실을 따로 만들지 않고, 기존에 있던 태실 근처(2,3(步) 거리)에 추가로 만들도록 했다. 또한, 왕실 자녀들의 태실도 한 곳에 모아서 관리하도록 했다.


영조가 이렇게 「태봉윤음」을 하교한 건 태실의 폐단을 줄이면서, 백성들에게 미치는 피해와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실제 영조 이후 태실의 조성은 영주 의소세손 태실, 예천 문효세자 태실, 영월 철종 원자 융준 태실처럼 원자나 세자의 태실만 외부에 조성했다. 그 외의 태실은 영조의 수교(受敎)에 따라 창덕궁 내원(內苑, 후원)에 묻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숙선옹주(淑善翁主)의 태실이다. 1793년(정조 17)에 정조는 숙선옹주의 태를 창덕궁 주합루(宙合樓)의 북쪽 돌계단 아래에 묻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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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주합루(宙合樓). 정조는 주합루의 북쪽 돌계단 아래에 숙선옹주의 태를 묻게 했다.


한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 중인 「창덕궁 태봉도면(1929)」에는 영친왕, 덕혜옹주, 그리고 고종의 제8왕자 태실이 창덕궁 내원에 조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태실은 각각 정유태봉(丁酉胎封, 영친왕), 임자태봉(壬子胎封, 덕혜옹주), 갑인태봉(甲寅胎封, 고종 제8왕자)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동안 이 태실들은 서삼릉으로 옮겨졌으며, 현재 창덕궁 후원에서는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이처럼 태실은 조선왕실의 중요한 의례적 공간이지만 동시에 백성들에게는 여러 부담을 주기도 했다. 이러한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영조는 「태봉윤음」을 하교하며, 무분별하게 태실을 조성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후 창덕궁 내원에 태실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백성들에게 미치는 피해를 줄이고자 했다. 이는 문화적·제도적 관점에서 태실에 접근하는 것 이전에 백성들에게 태실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결국 시대의 변화와 백성들의 인식에 따라 태실의 조성 방식이 개선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이는 조선왕실의 태실 문화가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에 주목되는 지점이다.


※ 참고자료 


김익현(역) 『연려실기술』, 1967, 한국고전번역원

정연탁(역) 『중종실록』, 1980, 한국고전번역원

양홍렬(역) 『선조수정실록』, 1989, 한국고전번역원

박헌순(역) 『현종수정실록』, 1992, 한국고전번역원

김익현(역) 『영조실록』, 1992,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김희태, 『조선왕실의 태실』, 2021, 휴앤스토리 

김희태, 『경기도의 태실』, 2021,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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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가 소개하는 조선왕실의 태실] 태실(胎室)의 역사와 인식 변화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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