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0-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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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조선왕실의 태실』, 『경기도의 태실』 저자

태(胎)를 소중히 여기는 문화는 우리만이 아닌 여러 나라에서 확인되는데, 중앙아시아에서는 소그드인들이 남긴 오수아리를 주목해야 한다. 오수아리는 우리의 태항아리와 유사한 개념으로,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는 항아리에 태를 넣는 반면 오수아리의 경우 화장한 뼈를 묻었다는 점이다.


몽골에서도 태 처리 의례가 전해지는데, 몽골인들은 탯줄이 떨어진 장소를 고향으로 인식했다. 재미있는 건 과거 몽골인들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면 태어난 곳을 찾아 몸을 구르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토노트 타히흐(Toonot taikh)’라 부르고 있다.


일본의 경우 태를 묻은 뒤 그 자리에 표식을 세우는 방식의 장태 문화가 확인되는데, 이를 포의총(胞衣塚, えなづか)이라 부르고 있다. 그 형태가 비교적 일관된 조선왕실의 태실과 달리 포의총은 저마다 형태가 각기 다른데, 아래 사진의 닌토쿠 천황과 고카쿠 천황을 비교해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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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닌토쿠 천황 포의총 ⓒ 전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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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고카쿠 천황 포의총 ⓒ 전인혁

 

다만, 심현용(2021)은 포의총이 장태 문화의 일종인 것은 분명하지만 조선의 태실과는 조성 과정과 제도의 관점에서 차이가 있어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문화의 개념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본 바 있다. 또한, 조선의 가봉태실과 일본 근세 다이묘 묘의 석조물이 구조상의 공통점을 보인다는 점에서 근세 다이묘 묘의 석조물 조성에 태실이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태를 소중히 여기는 문화는 우리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태실을 우리나라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독특한 장태 문화라고 이야기하는 건 다른 나라에는 없는 문화적, 제도적 발전의 양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또한,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태경(胎經)의 설이 시작된 것은 신라(新羅)·고려(高麗) 사이이고 중국에 예로부터 있었던 일은 아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당대에 태실이 중국에는 없는 조선만의 독특한 장태 문화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문화적 관점에서 태실은 소위 명당으로 대표되는 길지에 조성했는데, 이는 당대의 철학인 풍수지리가 반영된 결과이다. 조선의 경우 국장(國葬)에 있어 길지(吉地)를 고르는 것에 진심이었고, 관상감(觀象監)의 주요 역할이기도 했다. 이러한 당시의 인식을 보여주는 내용이 바로 아래의 『문종실록』의 기록이다.


“《태장경胎藏經》에 이르기를, ‘대체 하늘이 만물(萬物)을 낳는데 사람으로서 귀하게 여기며, 사람이 날 때는 태(胎)로 인하여 장성(長成)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현우(賢愚)와 성쇠(盛衰)가 모두 태(胎)에 매여 있으니 태란 것은 신중히 하지 않을 수가 없다.” - 『문종실록』 권3, 1450년(문종 즉위년) 9월 8일 중


이를 통해 태실은 단순히 태를 묻는 행위가 아니라 태주의 생명력과 나라의 국운과도 연결 지을 만큼 중요하게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 위에 태실은 조선왕실의 궁중의례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태실의 역사


민간에서도 태를 소중히 여겼는데, 다만 그 방법에 있어 불에 태우는 소태(火胎)와 강이나 바다에 던지는 수중기태(水中棄胎), 땅에 묻는 매태(埋胎) 등으로 태를 처리했다. 또한, 안동 퇴계태실(退溪胎室)과 약봉태실(藥峯胎室)에서 볼 수 있듯 태어난 집(공간)을 태실로 부른 사례도 있어 왕실에서 의미하는 태실과는 의미가 다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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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퇴계태실(退溪胎室).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앞선 『선조수정실록』 기록에서 볼 수 있듯 태실의 기원을 신라에서 찾고 있다. 물론 전승의 형태로 그보다 앞선 시기의 태실로 전하는 장소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서의 고증이 어렵기에 신뢰할 수 있는 자료의 출처와 현장을 통해 그 기원을 찾는다면 그 첫머리를 김유신의 태실로 삼을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태실이 현 충북 진천에 있으며, 태실이 있는 산의 이름이 태령산(胎靈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유신의 태실이 진천에 있는 이유는 그의 아버지인 김서현이 만노군(萬弩郡)의 태수로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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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천 김유신 태실. 태실이 있어 태령산(胎靈山)이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태실은 『고려사』를 통해 고려 시대에도 다수 조성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고려의 과거시험 중 잡업과 지리업(地理業) 과목에 태장경(台藏經)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려 때도 장태 문화가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고려의 태실은 사료에서는 확인되지만, 구체적인 실물은 고려 인종 태실을 제외하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반면, 조선왕실의 태실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태봉등록』과 관련 의궤 등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성 과정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있다. 또한, 태실의 실물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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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 태조대왕 태실. 태조의 태실을 조성하기 위해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권중화(權仲和)를 파견해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에서 길지를 찾았다. 진동현은 태종 때 진산군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왕실의 태실은 건국(1392년)을 기준으로, 태조의 태실은 진산(珍山) 만인산(萬仞山)에, 정종의 태실은 금산(金山) 직지사(直持寺)에, 태종의 태실은 성산(星山) 조곡산(祖谷山)에 가봉태실을 조성했다. 『태종실록』을 보면 여흥부원군 민제(閔霽)가 함주(咸州, 현재의 함흥)로 가서 태종의 태를 성산 조곡산으로 옮겨 가봉태실을 조성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즉, 태조와 정종, 태종의 경우 조선 건국 이전에 태어났기에 최초 민간의 방식으로 태를 처리했다가 훗날 조선이 건국되면서 그 태를 길지로 옮겨 태실을 조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때의 태 처리 방식은 매태(埋胎)로 보이는데, 가령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선조의 태가 잠저의 정원 북쪽 소나무 숲 사이에서 발견했다는 기록을 통해 유추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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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 사도세자 태실. 세자의 태실로는 유일하게 가봉이 이루어진 사례다.

 

기본적으로 태실은 아기씨 태실과 가봉태실로 구분되는데, 가봉태실의 경우 통상 왕의 태실로 인식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왕비의 태실도 조성이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영주 소헌왕후 태실과 예천 폐비 윤씨 태실이 있다. 이후로는 왕비의 태실이 조성된 기록이나 현장은 확인되지 않으며, 세자의 태실로 유일하게 가봉이 이루어진 예천 사도세자 태실을 제외하면 ‘가봉태실=왕’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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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단종의 원손 시절 태실 1기와 세종대왕의 아들 18명의 태실 등 총 19기의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이른 시기의 왕자 태실은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로, 이곳에는 세종대왕의 왕자 18명의 태실이 집장되어 있다. 또한, 왕녀의 태실은 성종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되었다. 『태봉등록』을 보면 태실은 신분에 따라 규모가 달랐음을 알 수 있는데, 1등급지는 왕의 태실로, 금표(禁標)의 범위가 사방 300보였다. 특히, 태실을 조성할 때 세자나 원자처럼 훗날 왕위에 오를 신분일 경우 가봉을 염두에 두고 조성했다. 반면, 2등급지의 경우 왕비 소생의 대군 태실로, 금표의 범위는 사방 200보다. 3등급지는 왕비 소생의 공주나 후궁 소생의 군과 옹주의 태실로, 금표의 범위는 사방 100보였다.


한편, 왕위 계승이 예정되지 않았던 인물이 왕이 된 경우 다른 길지로 옮겨 가봉태실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태실을 새롭게 마련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선조의 경우, 왕위에 오른 후 잠저에 묻혀 있던 태를 찾아 부여군 충화면 오덕리에 가봉태실을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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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선조대왕 태실지 주변에 남아 있는 파괴된 귀롱대석

 

반면, 세조는 태실을 옮기자는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그 자리에 비석만 세우도록 지시했다. 또한, 철종과 고종처럼 태실이 조성되지 않은 사례도 확인된다. 이러한 사례들은 태실이 단순히 태를 묻는 공간이 아니라,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였음을 보여준다.


※ 참고문헌 

김희태, 『조선왕실의 태실』, 2021, 휴앤스토리 

김희태, 『경기도의 태실』, 2021, 경기문화재단 

『2023가봉태실국제학술대회: 생명 탄생 문화의 상징, 조선의 가봉태실』 자료집, 2023

『2024가봉태실국제학술대회: 조선왕조 태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비교연구』 자료집,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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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태가 소개하는 조선왕실의 태실] 태실(胎室)의 역사와 인식 변화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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