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0-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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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우 가족행복학교 대표, 평택성결교회 원로목사

우리에겐 여전히 온전한 자유가 그립다. 나를 구속하는 각자의 환경이 그럴 수 있다. 오래된 떨쳐내지 못한 나쁜 습관이 그렇다. 혹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오래된 친구일 수 있다. 더한 것은 편견에 빠진 이념일 수도 있다.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탈북자들이 말하는 그 세계는 상상을 불허한다. 일상에서부터 강제수용소에서까지 박탈당한 자유는 단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남한 사회에서 누리는 자유는 믿기지 않은 상상이 실현된 세계라고 했다. 자유가 이처럼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라 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브루탈리스트>를 보았다. 자유에 대해 전 생애에 걸쳐 이렇게 극명하게 표현한 건축가가 있을까 생각하게 했다. 이 영화는 한 개인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상영시간이 215분이나 되어서 중간에 15분간의 인터미션으로 휴식 시간이 주어진다. 


<브루탈리스트>는 브래디 코베이 감독이 연출한 2024년 개봉한 드라마 영화이다. 이 작품은 헝가리 출신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의 미국 이민 후 30년에 걸친 삶과 예술적 여정을 그린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 건너와 건축가로서의 꿈을 추구하지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며 다양한 도전에 직면한다. 


우연한 기회에 주인공 라즐로는 재벌가의 개인 서재를 모던하게 새로 인테리어 작업을 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인연을 맺게 된다. 재벌은 펜실베이니아주를 상징하는 거대한 문화공간을 만들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이 일에 라즐로를 선택한다. 그는 문화공간 중심에 상징적인 건물로 개신교 예배 공간과 부속 건물을 디자인하고 건축하면서 브루탈리즘(Brutalism)을 사용했다. 


브루탈리즘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유행한 건축 양식으로, 단순하고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특징으로 한다. 이 양식은 재료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며,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기능성을 강조한다. 특히, 노출된 콘크리트 표면과 기하학적인 형태를 통해 강한 시각적 인상을 준다. 


브루탈리즘 건축에 대한 세계 건축계의 평가는 다양하다. 일부는 그 거친 미학과 기능주의를 높이 평가하며, 현대 건축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운동으로 본다. 반면, 다른 이들은 차가운 이미지와 인간적인 스케일의 부재로 인해 비판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브루탈리즘 건축물이 재평가되며, 역사적 가치와 독특한 미학으로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제81회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하였으며,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10개 부문에 후보로 지명되어 있다. 


영화를 보면서 강렬한 인상은 건축가로서 예술적 표현을 위한 고뇌를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유대교 종교를 가지고 회당의식에 주기적으로 참석하면서 한 편으로는 아내와의 갈등과 마약, 색욕 등으로 돌출하는 행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인간의 한계라고 할까. 그러면서도 나치스에 의해 유대인 수용소에서 겪었던 억압에서 온 자유를 향한 갈망이 건축에 그대로 반영되어 걸작을 만들었다. 


2000년 6월, 필자가 시무했던 교회 건축 당시 건축물 일부를 노출 콘크리트로 시공했었다. 그런데 판넬을 제거하고 보니 콘크리트 벽면이 깨끗하게 나오지 않았다. 결국 건축 설계자와 상의하여 노출 콘크리트 부분에 회색으로 도색을 했다. 그때 이 건축 기법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경험했다. 


영화에서 보았던 실제 건축물은 노출 부분이 얼마나 정밀하고 깨끗했던지? 경탄했다. 가장 현대적으로 설계된 종탑 천장의 십자가 여백으로 들어오는 빛이 십자가 형태 그대로 예배실 강단에 하늘의 영광처럼 내려앉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현상인가? 


마치 <아마데우스>라는 영화에서 모차르트 같은 악동이며 괴짜 같은 천재 음악가가 그처럼 발랄하고 낭만과 자유스러운 음악을 작곡하면서 한 편으로는 엄숙하고 경건하며 장엄한 성가곡을 작곡할 수 있었는지 관객들에게 딜레마와 경탄에 빠지게 했던 기억이 났었다. 


인간은 자유를 갈망하지만 자유를 누리는 순간부터 다시 방종의 길로 접어드는 연약한 존재이다. 이 두 간극에서 갈등하며 상상하기 어려운 극치의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는 건가. 극심한 억압과 차별, 고통과 흑암의 터널을 통과하지 않은 자는 감히 그를 정죄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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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우 칼럼] 자유를 향한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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