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초적인 경험으로서의 고통은 의심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자고로 고통은 사람 곁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제 모든 지식과 감각을 의심할 수는 있어도 고통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고통을 당함으로 인식되는 자신은 생각을 통해 확인하는 자신보다 훨씬 더 의심 없이 다가오는 건 사실입니다. 가장 원초적인 고통의 경험은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경험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쾌락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그것은 끝없는 반복의 느낌을 요구합니다. 반면에 고통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맛보는 해방감은 기쁨을 배가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다른 것들과는 달리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동안 더는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 전방위적으로 갖가지 고통을 줄이기 위한 범정부적인 노력은 유의미합니다. 다만 공리주의처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선으로 여기고, 대다수의 고통을 부추기는 결사체를 악의 요소로 취급합니다. 따라서 고통의 유무에 따라 선악을 판별하는 기준선을 설정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부정의 근원으로서의 고통은 무엇일까요? 죽음이 인간의 한계를 객관적으로 설정하기에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인식하게 만듭니다. 누구든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고통 앞에서는 더욱 저항적인 행동으로 사람을 만드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물론 앉아서 당하는 무기력함을 목도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혈기가 남아있는 한 지금의 상태로 가만두지는 않습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한 행동일수록 조건반사적이고 즉각적이며 때로는 반성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고통이 없다면 영원히 사유 활동을 시작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고통을 문제거리의 뿌리요, 모든 부정의 핵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그런 선입견은 오히려 극심한 고통을 통해서 부정이 생겨나고 깊은 늪으로 빠져든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모든 평가는 주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헣다고 선악을 구별하는 객관적이고 최종적인 기준이 불필요하다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대단히 지성적이고 가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해서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 튼실히 열린 과일은 땀흘린 보람
주관적 경험으로서의 고통을 두고 항간에서 남의 암덩어리가 내 종기보다 못하다고들 합니다. 은밀히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통일수록 쉬이 갈음하기 어렵다는 비유입니다. 사회적으로 공유하지 못하는 고통을 마냥 방치하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아픈 사람 옆에 가면 무조건 그의 말을 들어주며 가만히 머물다가 돌어오는 게 상책입니다. 그러나 후설은 지향성의 특징을 가리켜 지각하는 행위와 상상의 날개로 설명합니다. 사랑과 미움에는 무엇이 그렇게 만들며, 욕구는 무엇이 욕구가 되냐는 반문입니다. 실제 자연인은 무엇을 의식할 때 의식하는 행위를 동반합니다. 사랑이나 욕망보다 한 걸음 더 나간 게 고통이라는 주장입니다. 고통은 특이하게도 지향적이기도, 지향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논리입니다. 전자의 경우 물리적인 현상이므로 고통을 유발하는 계기나 상황이 곧 고통 그 자체일 수는 없으며, 후자는 그저 지향을 지향하려는 심리현상에 불과하다는 부연입니다. 그렇다면 후설의 지향적 의식은 주체의 능동적인 행위의 결과라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다만 레비나스는 고통도 의식 속에 주어진 것이므로 어떤 심리적인 내용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를 의식하게 하는 고통은 다른 것은 인식하게 하는 데 중요하게 기능합니다. 미드는 나를 가능하게 하는 타인의 역할을 비교적 긍정하는 데 비해, 사르트르는 다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곤 합니다. 상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심판함으로써 자신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진단입니다. 고통은 하나님 앞에 선 아담과 하와처럼 불행히도 애써 부인하고 그것을 느끼지 않으려 몸부림칠수록 피할 수 없는 특징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헤겔은 사람은 아픔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즉 공개적이 되려는 사적인 고통은 지극히 주관적이므로 더 공개적이 되려는 충동을 가진다는 설명입니다. 가장 내면적인 것일수록 가장 외면적이 되려는 욕구를 분출할 수 있다는 의견입니다. 그것에 가장 효과적이고 유용한 수단이 언어입니다. 언어를 전제하지 않는 의식은 불가능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고통과 언어는 긴밀한 내면적 관계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41호)에는 ‘고통받는 인간의 한계 - 고통의 역사가 주는 함의’가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