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견고한 장벽을 두고 스스로 인내심을 시험해보는 것도 이번이 두 번째. 추상같이 캐묻건대, “누가 감히 한 인간에게 ‘교회의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했는가?” 길게 늘어선 구경꾼에 섞여 새삼 필자가 떠올려본 의문문이다. 꼬박 두 시간을 기다려 들어간 로마교황청(The Holy See)은 바티칸시국(State of the Vatican City)이라고 부르는 엄연한 국가로써, 불과 0.44㎢의 면적에 800명 내외(추정치)가 상주하며 공식적으로 4개어(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를 사용하고 있거니와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유일한 대변자로서, 그 중심에 교황(현재 266대 프란치스코)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성육신하신 예수그리스도의 강림사건 이후 십자가상의 대속하심을 부활로 입증하시며 오순절을 기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한 결과는 교회공동체의 태동이었다. 성경의 계시는 게바라 하는 베드로를 가리켜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라고 명하셨지(마태복음 16:18), 천국 열쇠의 주인이 바로 너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마태복음 16:19)는 사실을 부디 상기하기 바란다. 그날따라 몸수색은 지루했고 소지품 검색은 지체됐다.
들어가자마자 내가 다시 걸어 보기를 원한 곳은 실은 원형 계단이었다. 그런데 동선 자체를 바꿔버렸다고 인지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단한 백향목을 가공해 만든 목제 통로에 대한 환상이 산통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 기대감이 송두리째 깨졌다기보다는 여태껏 뫼비우스 띠를 닮은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려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은근히 거들먹거리는 용병들의 몰골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고압적인 검색원의 표정까지 감수하려면 자유의지가 중요하다. 이와 같은 정서를 전연 감지하지 못했다면 그건 개인차일 수 있다. 지나치게 예리하거나 민감한 감각이 오감에 들지는 않으니까. 여하튼 뻘쭘한 석고상이나 보자고 내공을 쌓아 여길 입성한 건 아닌데 구경거리가 영 시원찮다. 일부 드물게 만나는 지역지도에 딸린 그림이야 눈에 익은 천장화처럼 진부할 테니 희귀한 보석은 몰라도 진귀한 골동품마저 죄다 골방으로 이동시킨 게 명확하다면 여봐란듯이 대체물품으로 채워놓아야 하지 않느냐는 성토. 다만 바닥을 장식한 대리석의 문양만은 밀라노에서 봤던 그걸 수렴하는 작품인 거 같다.
▲ 바티칸 회랑 창가에서 쳐다본 바깥 뜰
게다가 시스티나 대성당이 아니고 소성당으로 가라는 연유는 또 뭔지 따지고 싶다. 높고 낮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무려 56개의 관문을 통과하기까지 갖은 고초를 감내하라며 한껏 생색을 내더니만 이젠 그마저 귀찮아졌는지 그냥 선선히 풀어주는 느낌이어서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탁한 공기를 피해 냉큼 바깥으로 나온 건 그래서다. 커다란 십자가 형상을 기반으로 조성한 구도를 현 위치에 대입한다면 이해가 훨씬 빠를 터. 솔방울 상징물을 쳐다보며 종신직 교황의 선출을 알아내느냐는 부수적이다. 김대건 신부를 찾아뵙거나 피에타 앞에 가서 피눈물을 봤다고 우기는 게 신앙과 무슨 상관인지. 다행히 전에는 차단되었던 베드로 대성당의 위용을 감상하려고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니 천사들이 거드는 세면대를 지나쳐 고해성사를 받겠다고 차린 상자를 보는 순간 본질하고는 더 거리가 멀어진다. 우리 부부는 잠시 미사를 드리는 좌석에 앉았다. 아직 깨닫지 못한 영혼들을 놓고 드리는 간절한 기도. 내 가정의 영적 평화와 나아가 나라와 겨레의 안위를 위해 고개를 숙이고 나니 무거운 짐이 한결 가벼워졌다.
테베르 강변에서 똬리를 튼 바티칸의 내부를 대충이나마 돌아보니 지나간 날들이 주마등처럼 우뇌를 스친다.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칙령 이후 기독교는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장하다가 십자군전쟁이란 명분으로 8차에 걸쳐 전무후무한 살인극을 벌였다. 한국과의 접촉양상도 16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 교회와 교황청이 정식관계를 맺은 때는 1831년이로되, 당시 문헌을 보면 교황 알렉산더 7세는 중국 교회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 그해 남경대목구를 설정하면서 1702년 들어 조선이 북경 주교의 관하에 들어간 터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를 시작으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가? 1054년 동서교회 분열을 필두로 끊임없는 배교사와는 별도로 제사를 거부한다며 2만 명에 가까운 순교자를 양산했거늘, 어찌 오늘날 다원주의를 표방할 수 있는지 뼈아플 따름이다. 기독교에 복음이 빠지면 존재 이유는 사라진다. 끝으로 아내의 경우 여간해서는 세계여행에 대한 찬사에 인색한데, 주다영 인솔자의 세심한 배려와 현지 해설자들의 전문성 덕분에 최고의 여정이었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39호)에는 ‘고통받는 인간의 한계 - 고통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