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어머님이 소천하셨다. 89세를 일기로 새벽 3시경 요양병원에서 조용히 운명하셨다. 자식들 중 아무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어머님은 그렇게 우리 곁을 홀로 쓸쓸하게 떠나셨다. 혼자서 병상에서 맞이하는 최후의 심경이 어떠하셨을까?
어머님은 우리 형제를 낳아주신 분이 아니다. 필자의 아버님과 재혼하여 우리 어머님으로 사셨다. 4남 1녀 우리 형제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어머님은 50대 중반에 돌아가셨다. 그때 가족 맏이인 누님의 가정이 마산에서 진해로 이사 와서 아버님을 모셨다. 당시 아버님은 60세이셨다.
1년 후 다시 아버님은 누님 가족을 설득해 마산으로 돌려보내고 재혼하셨다. 새어머님은 자녀가 없이 10년가량을 혼자 사시다가 자녀를 여럿 두신 아버님의 구혼을 받고 결혼하셨다. 새어머님의 요구로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양가 직계 가족들이 모여 조촐하게 드렸고 신혼여행도 다녀오셨다. 우리 가족의 문화와 관행에 익숙해지시려고 많이 노력하셨다. 새어머님은 아버님과 43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시고 안식에 들어가셨다.
필자의 형제들은 이번 장례식을 통해 새어머님의 유지와 삶의 모본을 배웠다. 먼저 당신의 수한이 다해 가는 것을 아시고 친정이 불교 가문이지만 장례식은 기독교식으로 하라고 친정 쪽에 통보하셨다. 또 그동안 자녀들이 보내드린 생활비를 절약해 요양병원비를 지불한 나머지를 모아 장례비용으로 사용하라고 친정 조카에게 일임하셨다.
새어머님은 조용한 성품과 소녀 같은 감성을 가진 해맑은 분이셨다. 형제들을 대신해 필자가 항상 어머님의 요구나 필요를 채워드리는 대화의 창구 역할을 했다. 여러 차례 대수술 때에도 진해와 창원으로 내려가야 했다.
필자의 가문은 조부님이 일제강점기에 진주 삼일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부산고등법원의 판결로 3년의 옥고를 치르셨다. 조부님은 30대 초반에 진주 지식인과 학생, 농민과 노동자 대표들과 삼일만세운동을 모의하고 1919년 3월 18일 장날에 거사를 했다. 독립선언문을 경성에서 비밀리에 숨겨와 동지들과 함께 프린트하고, 태극기를 은밀하게 만들어 배포하면서 앞장서 시위하다 주동자로 체포되셨다. 조부님은 진주에서 알려진 대부호 집안으로 출옥 후 가산을 몰수당하고 멸문지화를 겪자 병고로 해방 전에 작고하셨다.
공직자인 형이 이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진주만세 사건 판결문을 기어코 찾아내었다. 그 외 자료 수집을 위해 필자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진주지방 독립운동사를 발견해 조부님의 존함을 찾아내었다. 그동안 가족들의 구전으로 전해져 온 독립운동 증빙자료를 찾아내어 너무 기뻐했었다.
판결문과 독립운동사 기록, 가족들과 여러 증인들의 증언을 정리해 보훈처에 공적서를 제출했다. 일 년 동안 심사를 거쳐 드디어 조부님은 늦게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 후 정부의 규정대로 장례비용 지원을 받아 진주 공동묘지에서 대전 현충원 국립묘지로 이장을 했다. 우리 형제들은 해마다 현충일 전후에 날을 잡아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을 찾아 추모예배를 지금까지 드리고 있다.
새어머님은 이런 집안의 내력을 자랑스러워하셨다. 아버님은 생전에 유공자 집안이란 사실을 긍지로 생각하셨다. 일제강점기에는 사상범의 자녀라는 딱지가 붙어 취업의 제약이 많아서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 공부를 계속했었다. 해방 후 일본의 생활을 접고 귀국해 극장 대형간판 그림을 전문으로 그리셨고 그 후에는 간판업을 하면서 우리 형제에게 고등교육을 받게 했다.
아버님은 그림을 계속 그리며 유공자 연금과 자녀들의 생활비 지원으로 평안하게 사셨다. 아버님이 소천하시자 어머님은 걱정하셨지만 우리 형제들은 아버님 소유의 주택을 드리고, 연금을 그대로 생활비로 보내드려 생활에 어려움이 없게 해드렸다. 이 일을 장례식장에 온 어머님의 친정 유가족들은 고마웠다고 감사 인사를 했다. 대수술 몇 차례와 요양병원에서 마지막 삶까지 섬겨준 일을 감사해 하셨다. 우린 당연한 도리를 한 것 뿐이었는데?.
새어머님은 당신의 소원대로 아버님과 생모님이 안장되어 계신 진해 공원묘역 납골당에 모셨다. 장례식 마지막 순서인 유골 봉안을 마친 후 우리는 아버님과 생모님 산소에 올라갔다. 우리 형제들은 묵념과 필자의 기도로 집안 대사 유종의 막을 내렸다. 역경의 세월을 살아온 선조들의 아름다운 유산을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