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소 칙칙한 동선을 벗어나니 예측을 한참 빗나간 구상화. 각설하고 밀라노 밤거리는 화려했다. 현란한 문양으로 채색한 대리석 보도 위를 살며시 밟고 눈부시게 치장한 두오모 청동 문전에 서니 고색창연하기 그지없다. 순간 호화롭다 못해 자못 휘황찬란하다는 수사를 떠올릴 만큼 황홀해도 되겠다는 착각이 들 지경. 자주 필자의 글월을 읽는 이라면 이건 과장을 넘어 호들갑이 지나치다고 한들 대꾸할 말이 궁해질 정도였으니, 그윽한 달빛 아래 곱고도 다채로워 심히 아리땁다는 표현밖에는 딱히 들이밀 언사마저 동난 상태랄까. 여태껏 유럽 전역을 쏘다니며 수십 군데 회당을 회람했건만 이만치 우아한 자태를 대하기는 처음이다. 그러니 해설자 입술에서 자그마치 2천여 개의 조각품에 수많은 첨탑과 기둥으로 이뤄진 바로크, 신고딕, 네오클래식 양식을 조합한 결정체라며 쉴 새 없이 늘어놓을 만하다. 늘어선 아케이드형 상가는 물론 스칼라 극장이나 지하철 역사도 문화재급을 뛰어넘는 건축미를 갖췄으니 예능감 넘치는 세공술을 가리켜 다각형 안에 담아낸 함의를 능가한다는 고평가를 얼마든지 내릴 법하다.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매긴 이탈리아에 대한 평점은 수정해야 마땅하리라. 기실 2005년 한여름에 다녀간 뒤로는 첫인상이 좋지 않아 별반 오고픈 생각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중 몇 가지만 나열해도 인종차별, 인프라 미비, 지저분한 거리, 가족 소매치기단 목격 등 그때 박힌 이미지로 인해 외화내빈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후기에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를테면 그러한 선입견에 일대 반전이 일어난 참인데, 바뀐 가이드 말마따나 아직은 반도의 북부권이어서 언뜻 부티가 날 수는 있겠으나 창밖에 비친 경치를 보노라면 영상으로 접하던 그림이나 진배없다. 기차가 힘차게 내달리는 아치형 다리를 보거나 오지마을에 지어놓은 농가를 봐도 단아한 멋이 있다. 그래서일까? 풀밭을 가로지르는 흙길마저 동심을 불러올 듯 정겹다. 워낙 바삐 살아온 탓에 아련한 향수에 젖을 틈이 없었는데, 이렇듯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잠자던 옛 추억을 더듬어갈 줄이야. 그나저나 줄줄이 이어지는 포도밭을 구경하자니 불현듯 소싯적 노동의 현장이 다가왔다. 다만 물찬 논배미나 가지런한 밭이랑도 심연의 그리움을 자극하긴 마찬가지다.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베네치아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는 초장부터 길손을 휘어잡았다. 여기 역시 재방문이어서 색다른 경관이야 기대할 게 없었으나 설명하는 본새가 하도 재밌어서 시종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게다가 얼굴이나 몸집은 영락없이 고 김정남이 환생한 듯한 모습. 때마침 삼일절이어서 느닷없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횟수만 해도 줄잡아 열 번은 채운 듯한데, 어쨌든 자신이 택한 일을 즐기는 거야 퍽 바람직한 데다가, 지도를 편 채 전체구도를 알려주는 성의 또한 그의 특장점이로되, 천연 해자처럼 바다 한가운데 피난지를 조성해 겨우 살아남았다는 얘기는 이만 생략해버려도, 듣던 대로 밀물 때면 상승하는 수면을 막아내느라 대비책을 세웠다는 대목에서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고 할밖에. 그 실체는 섬과 섬을 잇는 개폐식 인공제방. 애초에 말뚝을 박고 자갈로 갯벌을 메워 지금과 같은 부촌을 만들었다면 과연 리알토 다리를 놓아 산마르코 광장에 줄을 세우는 카페를 차릴 만하다. 관건은 늘 돈벌이. 대항해시대 처절한 생업의 현장에서 베니스의 샤일록이 셰익스피어의 눈에 뜨인 참이다.
▲ 베네치아 수상택시로 돌아본 섬마을
수상택시를 타고 본섬을 빠져나오는 길. 118개 섬을 424개 다리로 연결한 물길이 한눈에 들어올까마는 혹여 개꾼의 문답이라도 끼어들세라 연신 침이 마르도록 주워 삼키는 해설의 핵심은 물가를 차지한 가옥의 현시세요, 곤돌라 기사의 연봉. 하지만 필자의 눈에 비친 수십 억대 가구주의 삶이나 뱃삯으로 고액을 챙기는 대물림이나 부질없는 단막극에 불과하다. 그것이 틈나는 대로 창조세계를 주유할지언정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한시도 등한시하지 않는 까닭이렷다. 흐린 하늘이 누꿈한 사이 명품가방을 끼고 으스대며 운하를 누빈들 영적 공허감을 물질적으로 메울 수는 없으므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저마다 갖가지 형상을 빚어놓고 이른바 종교현상이 이토록 기승을 부리는 중이다. 요컨대 다양한 노선의 철로를 개설해 지역경제를 뒷받침한 당국의 정책이야말로 6천만에 이르는 주권자의 소득원에 다초점을 맞춘 최선책. 너울거리는 해초가 부둣가를 맑히는 것도 G7 국가다운 환경보존책이다. 지구촌 관광 대국의 현실감이 이러하거늘 우리 정부는 뭘 고심하며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직무를 수행하는지 캐묻고 싶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35호)에는 ‘서유럽 견문기 - 이태리: 피렌체 앞 토스카나’가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