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 전문 필진인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이 조선왕실의 장태 문화를 상징하는 태실(胎室)에 대해 매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지난주까지 태실의 역사와 조성 과정, 특징 등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번 연재부터는 각각의 태실을 하나씩 상세히 다룰 예정으로, 첫 출발은 왕의 태실이다. 현재까지 위치가 확인된 왕의 태실은 총 24기다. 다만 원위치에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태실은 일부에 불과하다. 현재 남아 있는 왕의 태실이 들려주는 역사적 맥락과 시대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말>
■ 현재 위치가 확인된 왕의 태실 총 24기… 대부분 원형 상실
현재 전국적으로 남아 있는 태실 중 왕의 태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러한 왕의 태실도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면서 대부분 원형이 훼손되었고, 그 위치를 알 수 있는 것도 추존왕을 포함하여 현재 위치가 확인된 왕의 태실은 총 24기다. 연산군과 인조, 효종, 철종, 고종 등의 태실은 남아 있지 않다.
성주 세조대왕 태실. 다른 왕의 태실과 달리 가봉태실비만 세운 모습이다.
그나마 위치가 확인된 24기조차도 일제강점기 당시 토지가 민간에 팔려 태실이 있어야 할 자리에 민묘가 들어서거나 개발로 인해 파괴되는 등 원형을 상실했다. 그중 원위치에 석물이 온전히 남아 있는 왕의 태실은 ▶성주 세조대왕 태실 ▶영천 인종대왕 태실 ▶서산 명종대왕 태실 ▶충주 경종대왕 태실 ▶보은 순조대왕 태실 등 단 5기에 불과하다. (※ 지난번 연재에서 온전히 남은 가봉태실을 4기로 표기했으나, 성주 세조대왕 태실 역시 원위치에 당시 세운 가봉태실비가 온전히 남아 있어 5기로 수정했음을 밝힌다.)
어느 한 태실을 단독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왕의 태실 전체를 묶어 신청하는 것은 충분히 논의되고 있는 사안이기에, 다른 태실들에 비해 왕의 태실은 보존과 복원이 필요하다. 실제로 예천군에서는 문종대왕 태실과 사도세자(경모궁) 태실을 성공적으로 복원한 전례가 있는데, 이는 향후 다른 왕의 태실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 왕조의 첫 가봉태실, 금산 태조대왕 태실
이러한 왕의 태실을 조명하는 데 있어 첫 출발점은 충청남도 금산군에 위치한 태조대왕의 태실이다. 태조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혼란기에 두각을 드러냈으며, 조선이 창건되기 전인 고려 시절에 출생했기 때문에 그의 태는 함경남도 영흥부 용연(龍淵)에 묻었다. 이는 당시 태조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동북면 지역에 해당했기 때문으로, 이후 조선이 건국되면서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고자 길지(吉地)를 찾아 태실을 옮겨 가봉(加封)하였다. 이러한 태실 이전과 가봉의 방식은 태조의 아들인 정종과 태종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의 어진
태조의 태실지로 낙점하는 과정은 『태조실록』에 잘 묘사되어 있는데, 1393년(태조 2) 1월 2일에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권중화(權仲和)가 돌아와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에서 길지(吉地)를 찾았다며 상언한 뒤 산수형세도(山水形勢圖)를 바쳤다. 이후 1월 7일에 태조의 태실을 진동현(珍同縣)에 안치하고, 그 현(縣)을 승격시켜 진주(珍州)로 삼았다. 이후 태종 때 진산군(珍山郡)이 되었다.
금산 태조대왕 태실의 전경. 석물은 온전히 남아 있지만 원래의 위치에 복원된 것은 아니다.
장태석물. 1689년(숙종 15)에 가운데 개첨석과 중대석을 제외하면 전면적인 개수가 이루어졌다.
중앙태석. 개첨석의 경우 초기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대왕의 태실은 최초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산 4번지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서삼릉으로 태실이 이봉되는 과정에서 훼손된 채 방치되었다. 이후 태실지에는 민묘가 들어섰고, 남아 있던 석물을 수습하여 인근(마전리 산1-132지)으로 옮겨 복원한 것이 태조 태실의 현재 모습이다. 또한 태조의 태실은 조성 당시의 모습이 아닌, 여러 차례 개보수를 거친 형태다. 『태봉등록』에 따르면 1689년(숙종 15)에 돌난간과 주석, 죽석, 비석 등의 대대적인 개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가봉태실비. 전면에 ‘태조대왕태실(太祖大王胎室)’, 후면에 ‘강희이십팔년삼월이십구일중건(康熙二十八年三月二十九日重建)’이 새겨져 있다.
귀대석(귀롱대석). 1689년 당시의 개수에서도 재활용이 되었던 석물이다.
낙서된 상석. 한동안 방치되었던 태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개수 내역을 살펴보면 개첨석과 중대석, 귀대석 등은 재활용하고, 파손이 심했던 난간 주석 8개와 죽석 8개, 모퉁이 벽돌 8개를 교체하였다. 태실가봉비 역시 이때 중건되었는데, 가봉비의 후면에 새겨진 ‘강희이십팔년삼월이십구일중건(康熙二十八年三月二十九日重建)’을 통해 『태봉등록』의 기록과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개수가 끝난 뒤 기존 석물은 태실 뒤에 묻었으며, 옛 비석은 태실의 오른쪽 5보 거리에 묻은 것으로 확인되어 추후 태실지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확인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서삼릉으로 이봉된 태조의 태실. 전면에 ‘태조고황제태실(太祖高皇帝胎室)’이 새겨져 있다.
현재 태조의 태실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향후 원위치에 태실을 복원하게 될 경우 보물로의 승격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따라서 태실지에 대한 토지 매입과 함께 복원, 발굴 조사를 통한 추가 석물의 확인과 관련 연구를 통해 태조 태실의 근원적인 가치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편 서삼릉으로 옮겨진 태조의 태실은 왕의 태실을 묻은 오석비군의 가장 상단에 있으며, 전면에 ‘태조고황제태실(太祖高皇帝胎室)’, 후면에 ‘□□□년오월 자전북금산군추부면이봉’이 새겨져 있다. 후면의 경우 해방 이후 인위적으로 훼손된 부분이 있는데, ‘소화오(昭和五)’다. 소화는 쇼와 천황의 연호로, 소화 5년은 1930년에 해당한다. 당시 출장복명서 기록인 『태봉』에 따르면 태조의 태실은 1930년 4월 15일에 서삼릉으로 이봉되었다.
이처럼 왕의 태실은 단순한 역사적 유적이 아니라, 왕조의 정통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태조의 태실은 조선 건국의 의미를 담고 있는 장소이자, 최초의 가봉 태실이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비록 현재는 석물만 온전히 남아 있는 사실상 반쪽 복원인 상태지만, 향후 원위치로의 이전과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그 본래의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학술적 접근이 필요하다.
※ 참고자료
국립문화재연구소, 『태봉등록』, 2019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태조실록』, 이재호(역), 1972
김희태, 『조선왕실의 태실』, 2021, 휴앤스토리
김희태, 『경기도의 태실』, 2021, 경기문화재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