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은 자신의 잘못과 상관없이 당하는 고통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쉘러는 고통을 희생의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는 모든 고통을 가리켜 전체를 위한 부분의 희생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이는 생태계가 유기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보면 적절한 지적입니다. 전체의 압력에 대해 무력한 개체가 느끼는 고상한 고통이 있는가 하면, 강력한 전체에 의해 생기는 평범한 고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쉘러의 고통관은 다분히 숙명론적입니다. 도덕적 질서를 유지하는 윤리이론은 인간관계의 핵심적 위치를 점유하니 말입니다. 제아무리 유용한 이론적 근거라 하더라도 실천을 담보하지 않는다면 지적 유희에 불과하니까요. 인간의 윤리적 행위에 대해 철학적으로 성찰하는 것을 메타윤리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여기서는 윤리적 당위성, 자유의지와 책무성, 가치나 상대주의 문제 등을 다룹니다. 윤리를 고통의 경험에서 설명하고 정립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정당할뿐더러 윤리이론의 실천적 목적을 달성하는 일에도 도움을 줄 것입니다.
선악의 문제는 윤리적 당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에 따른 전제와 설명을 요구합니다. 하나는 고통을 광의적으로 이해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모든 악이 윤리적 문제가 되는 건 아니라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에 따라 악과 고통을 형이상학적으로 취급하는 관점에서는 고통을 윤리와 연결하지 못하는 맹점이 발생합니다.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의 고통관과 맥을 같이합니다. 남에게 고통을 가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전인격체로서의 가치를 상실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는 ‘최소 고통론’에 동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체계에서는 롤즈가 제시한 차등의 원칙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 필요한 일은 자범죄에는 그에 상응한 벌이 따른다는 원칙입니다. 사후에라도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계율이 유용한 건 그래서입니다. 문제는 갖가지 범죄를 추상같이 다스린다고 해서 악의 뿌리가 쉽사리 뽑히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 나무 데크와 철제 창틀의 조화미
그러한 측면에서 독일 대학의 입시에 등장한 다음과 같은 논제는 한국 사회에 묵직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만일 사람이 고통을 당할 가능성이 없다면 인간관계는 어떻게 되겠는가?”아마도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중요한 지점은 나의 편익을 위해서 남에게 해악을 끼치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주어진 자유에는 무한책임이 따르고 지구촌의 생태계를 보존하는 데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체계적 교육이 절실합니다. 일반적으로 비인격적인 세력들이 가져다줄 수 있는 고통은 인격체들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니까요. 역사를 살펴보아도 독재자에 의해 저질러지는 구조악들이 사회를 파괴하는 사례들은 많았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은 통제받지 않으면 일탈을 일삼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선출된 권력이라고 할지라도 법치에 의한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상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은 늘 점진적 개혁보다는 급진적 혁명을 꿈꾸기 마련입니다.
고통으로 인해 생기는 부정적인 인식은 사유의 차원에 머물러 있을 뿐 사물에 대한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정반대로 쾌락은 왜 이다지 좋은가에 대한 질문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고통을 벗어나려는 인간의 몸부림은 본능에 가까운 일일 뿐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극단적 자살입니다. 물론 여기서 생존본능이야말로 극심한 고통보다 더 기본적인 욕망이라고 변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미래를 향한 소망마저 사라진다면 그 이상 삶의 의미는 지속하기 어려운 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살을 두고 이른바 문화창조를 운운하는 처사는 일부 호사가들이 떠벌리는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적 가치를 도입하면 생명은 개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신의 선물입니다. 진통제를 이용해 고통의 정도를 누그러뜨리거나 극단적 시도를 영적으로 방지하는 역할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자살을 미화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죽음으로써 문제가 해결된다면 세상의 모든 상담은 종국엔 자살을 권유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육신의 죽음을 맞은 뒤에는 예외 없이 심판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43호)에는 ‘고통받는 인간의 한계 - 고통의 과녁을 향한 화살’이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