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다른 어떤 느낌이나 경험보다 그것이 지닌 의미에 대하여 관심을 갖도록 유도합니다, 일단 누구에게나 고통이 다가오면 무시하거나 지나칠 수는 없으니까요. 고통이 주는 부산물은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경우가 더 절실할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고통의 의미가 아무에게나 죄다 명쾌하지는 않다는 데 있습니다. 니체가 일갈한 만약 고통의 목적이 분명히 드러난다면 나는 고통을 바랄뿐더러 심지어는 추구할 것이라는 독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은 신이 인류를 향해 던진 저주일까요? 이에 관한 해답은 고통의 의미와 역사의 합리성에서 찾아야 합니다. 고통의 의미는 필연적으로 역사의 합리성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반성적 역사의 물음에 대해서는 특별히 고통의 경험이 작용하기도 합니다. 곧 고통이 역사의 해석을 요구하는 것은 현재 당하는 고통이 미래에 대한 목적이 될 수 있으며, 과거사에서 어떤 인과관계를 갖는가에 대한 성찰이기도 합니다. 도덕적 공정은 보응과 보상으로 이어지는 교두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통에 대한 역사철학적 이해는 허무주의와 비극의 주인공들의 몫입니다. 고통은 우연적이며 이유도 목적도 없다는 주장은 극단적입니다. 고대 그리스 비극들이 그런 노래에 속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슬픈 이야기들이 악의를 가진 비인격적인 운명의 장난에 당하기만 하는 고통일까요? 니체의 초인마저도 비극의 영웅처럼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였다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일종의 운명을 향한 사랑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말입니다. 그저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 중에서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기제일 뿐입니다. 이에 대한 견해는 라이프니츠의 변신론(theodicy)이나 로크의 이신론(deism)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피조물의 불완전성이란 고통의 불가피한 원인과 관계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어떤 이는 가히 숙명적이라고 대변하는 중입니다. 전자는 전능한 신이 더 큰 선을 위하여 악을 허락했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방법으로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지나치게 이론적이어서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의인인 욥이 세 친구에게서 당한 위로 따위가 그것입니다. 고통이란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고통스러운 비밀일뿐더러 한없이 깊은 시름을 견디고 있을 따름입니다.
▲ 온실에서 자라는 열대과수 모습
고통의 합리성이 역사철학적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고통을 극복함으로써 획득한 긍정적 결과가 헤겔이 찾은 시간계 안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그는 역사의 발전이 이루어지려면 통시적으로 정신의 개념과 일치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이른바 변증법적 역사철학입니다. 곧바로 고통의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을 전제하기도 전에 어떻게 그것을 부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느냐는 문제 제기입니다. 이를테면 정반합의 원리를 주장하는 변증법은 부정을 이유 있는 부정으로 만들자는 논리를 갖춘 셈입니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는 절대정신 또는 이성의 자기완성 과정이자 발전의 수단에 해당합니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사상도 비슷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견해입니다. 그가 세계사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제물로 바쳐진다는 말을 남긴 건 그래서입니다. 마르크스가 동조한 대로 개개인이 당하는 고통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인과응보의 법칙이 작동한다고 믿을 수 있는 건 다행입니다.
고통의 문제는 도덕적 차원이 아닌 삶 전체와 연계하여 그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은 구체적이고 비정상적인 상황을 인식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사람이 어떤 부위에 통증을 느낀다는 것은 재빨리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하라는 신호일 테니까요. 이는 육체적인 병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병이나 사회적인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에 흄은 쾌락과 함께 고통이 따라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그의 입장에 반대한 이는 힉이었습니다. 고통과 쾌락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고통이 없는 쾌락은 있을 수 없다는 반론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통은 변증법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학자 르리쉬의 말처럼 세상에 호의적인 고통이 없다는 점은 명백합니다.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사회성을 지녔다는 점입니다. 공동체 생활에는 필연적으로 생물학적인 본능을 초월하는 의식과 자유의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42호)에는 ‘고통받는 인간의 한계 - 고통과 죽음에 깃든 함수’가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