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치 넘치는 아르노 강변을 따라 로마로 향하는 길. 나머지 사흘을 한 숙소에 머물기만 해도 일단 피로감은 반감된다. 내일 아침 일찍 서둘러 폼페이를 간다고 해도 감수할 만하니까. 필자의 경우는 온종일은 아니더라도 이동 거리가 좀 섞여 있는 걸 선호한다. 그래서 눈동자를 밖으로 돌리니 워낙에 비옥한 토양이어선지 비닐하우스 농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차창에 비친 산야만 해도 특이하리만치 선명히 구분된 모양새. 마냥 산자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야산들이 버티고 앉아있는 풍광도 이채롭다. 산은 산들끼리 모여 산맥을 형성하고, 들과 들은 서로를 맞대고 사이좋은 이웃처럼 논밭을 이루고 있다. 유독 눈자위에 박히는 장면들은 남한의 세 곱이나 되는 대자연을 품은 이탈리아인들의 생태계. 무엇보다 곳곳에 물이 풍부하고 오염원이 없어 보여 부럽다. 자연스레 모래톱을 만들어가는 하천을 보자니 물가는 물론 섬처럼 뵈는 중간지대에 수풀이 무성하다. 우리네 농촌과 비슷한 풍경이라면 나란히 늘어선 미루나무 행렬이나 줄지어 박혀 있는 양배추 포기들. 한국은 이제 백두대간이라도 반드시 지켜내야 할 텐데!
그간 말로만 듣던 폼페이의 잔해를 마주한 느낌이야말로 만감이 교차하더라는 표현이 어울릴 법하다. 상상을 가미한 영화처럼 잘 나가던 인간들이 맞이한 최후의 날을 체감하진 못할지라도 참혹한 과거사를 돌이켜본 것만으로도 재앙은 늘 미래형이다. 설마설마하던 일이 벌어진 화산 폭발 현장에서 화려한 도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극치를 치닫던 애정행각은 설화가 되어버렸다. 말초적 감도를 높이려는 영상물이야 애써 부모의 복수와 자신의 연인을 지켜내기 위해 생목숨을 건다지만 결투 중 도주할 틈새도 없이 쏟아지는 용암과 화산재에 나름 힘깨나 쓴다는 군상마저 속수무책일 수밖에는 별도리가 있었으랴. AD 79년 로마의 도시를 자처하던 식민지는 그렇게 속절없이 잔혹사에 묻히고 말았으니, 잘 닦은 도로를 따라 도시계획에 의한 상하수도시설까지 갖추고도 온갖 죄악상의 제물로써 오늘날 길손들 앞에 그 일부를 드러낸 참이다. 가장 놀라운 실물은 수세식 화장실. 현재 공개된 실상만 갖고도 방탕한 생활상을 속속들이 짐작할 수 있거늘 계속 발굴 중이라니 범죄사의 종착역은 어딜지 솔직히 두렵기까지 하다.
▲ 화산재에 파묻혀 있던 폼페이의 잔해
간이역에서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의 남부지방을 구경하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급격히 떨어진 북부와의 수준차. 외진 곳에 위치한 공동주택에는 허름한 옷가지들이 내걸렸고, 허술한 역사에는 잡초들로 빽빽한 데다가 미처 손을 쓰지 못한 듯 길모퉁이에는 비닐로 덮은 흙더미들이 수북했다. 간간이 움푹 파인 노면까지 눈에 띈다 했더니 어느새 해안선을 끼고 발달한 소렌토 진입. 채 2만이 안 되는 곳치고는 멀끔하다. 얼룩진 깃발이 펄럭이는 로터리를 뒤로하고 고샅길을 걸으며 길가 상점에 진열된 일상용품에 눈길을 주었으나 마지못해 지갑을 열 수는 없었는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란 게 거기서 거기여서 슬그머니 열린 쪽문 곁에 놓인 상자는 무얼까 기웃거린 일 외에는 딱히 기록장에 남길 일조차 마뜩잖다. 곧장 가파른 계단을 내디디며 내려다본 장면은 카프리로 건너가는 부둣가. 아말피 항을 떠나며 절벽강산을 바라보니 소득 격차로 인한 지역감정이란 게 여기서는 아예 나라를 나누자는 목소리로 들릴 수는 있겠지만, 우리네처럼 정치권에서 진영논리에 따라 조장한 측면은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풍랑이 제법 일렁이는 듯 선창에 물기가 잔뜩 서린 가운데 당도한 카프리는 예로부터 유럽 귀족들의 휴양지로 알려진 작은 섬. 이곳 특유의 풍경과 낭만적인 분위기로 이름이 났다는데 섬 전체가 대자연 보호구역이어서 그 자체가 네이플스만의 작은 보석으로 여겨진단다. 셔틀버스에 오르면 비좁은 비탈길에서 차체를 스치듯 아슬아슬한 운전기술을 맛볼 수 있다. 곧바로 가이드를 따라나선 골목길 산책. 조용히 사는 주택가라서 어찌 명품점이 없을쏘냐. 장사꾼이 진을 치건 말건 섬에서 가장 뛰어난 아나카프리 전망대에서 인증샷을 남기자니 저 너머 유명인사들의 별장보다는 차라리 벤치가 있는 바로 옆 소정원이 훨씬 정겹게 느껴진다. 어느 섬인들 이만치 아침저녁 노을이며 해돋이나 해맞이를 실컷 감상할 수 없을까마는, 여기까지 온 김에 가게 앞에 선보인 향수를 맡아본 뒤 반경을 좁혀 자유시간에 돌아본 윗동네에는 가정집 회당이 있었고, 축구의 나라답게 국제규모의 경기장도 숨어있었다. 사람에 따라 취향은 다를지언정 여생을 마칠 만큼은 아니었기에, 역설적으로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노래가 나온 걸까?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37호)에는 ‘이태리: 걸어서 둘러본 로마’가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