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0-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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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Ph.D.

오랜만에 다시 찾은 런던(필자는 2005년 여름방학에 학생들과 함께 배낭을 메고 옥스퍼드를 거쳐 스코틀랜드까지 훑어보았음)의 날씨는 의외라 싶게 청량했다. 그 덕분에 내내 특유의 대기질을 연상했던 우리 부부에게 이보다 더한 희소식은 없을 터여서 혼인 41년째를 여는 여정을 상큼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다소 서늘한 기후를 반색하는 가운데 나의 눈길이 머문 곳은 런던탑(Tower of London, 일명 런던성). 차분한 목소리로 풀어놓는 현지 가이드의 자세한 설명을 죄다 섭렵할 수는 없었으나 나름대로 정리한 지점은 그 당시 화이트 타워(높이 28m)야말로 영국 전역을 지배하던 노르만 군사 건축의 본보기로써 1066년 정복왕 윌리엄이 런던을 방어하고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템스강 가까이 건설했다는 게 요지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1988년)하기에 손색이 없는 자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풍당당한 요새는 늘 강력한 왕권을 대변하는 상징물이었다. 런던을 방어하고 통제하던 경계용 표지였으되 인류 문화사적으로 보편타당한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유럽사를 통틀어 주요 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런던타워를 뒤로하고 따라나선 템스강변의 뱃길 투어. 타워 브리지를 배경으로 출발한 유람선이 누런 강물을 헤치며 물길을 가르는 동안 역사적 명소와 어우러진 현대적 건축물의 조화로움이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나가면서 자칫 기존의 인프라를 건드려 고풍스러운 옛 정취를 해치지는 않을까 저어되는 마음이 들었다. 어언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 탓인지는 몰라도 걸핏하면 지난 시절이 떠올라 만감이 교차하는 경우가 늘더라는 모종의 노파심이랄까. 첫 탐방 때는 언뜻 이곳에서 옥스브리지의 조정경기가 열린다는 토막소식을 접했는데 아담한 뱃전에 비친 풍광 중 으뜸은 런던아이. 아무래도 자유여행 중에나 느긋이 기다렸다가 서서히 상공에 떠오를 기회가 있겠으나 배 안에서 올려다보는 눈요기만으로도 그 기분을 얼마큼은 가늠할 수 있을 성싶다. 조석간만의 차로 회생한 듯 축대에 끼어든 이끼류를 보면 대자연의 복원력은 놀랍다. 바로 옆 철제 다리는 실은 석제로 이루어진 정교한 조합 그 자체. 필자의 눈에 들어온 영국의 건축술은 높이보다는 초석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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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템스강 선착장에서 보이는 런던아이

 

유럽에서 유일하게 상주인구 천만을 헤아리는 런던 시내에서 해설자가 이끄는 동선은 퍽 경제적이다. 빅벤을 품은 국회의사당을 마주한 채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변함없이 똬리를 틀고 있건만, 유난히 동상을 좋아하는 민족성인 듯 서 있는 위인 중 처칠, 간디, 호치민 등이 아닌 만델라가 가장 돋보인 건 왜일까? 극심한 흑백 갈등의 와중에서도 진실과 화해를 위한 대장정에 반대하는 아내와의 이별마저 불사했던 그의 거대한 행보를 새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는 없다. 거기서 버킹검궁전으로 향하는 길에 만나는 시민공원은 평소 산책을 즐기는 내게는 최적의 공간. 걷기 편한 흙길에 정갈한 초목들이 한껏 어우러진 풍치가 실시간 눈자위를 어루만졌을뿐더러 맘껏 자란 능수버들의 하늘거리는 실가지들이 척박한 유년 시절의 동심을 불러오기에 충분했으니까. 막상 차가운 인상의 근위병이 지키는 궁궐 모양새는 실제 화면임에도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 행여 그 옛날 불편한 마차길을 넓힌다는 명분을 빌미로 섣불리 대영제국 건축의 완숙미가 일부라도 흐트러진다면 안 되겠다는 조바심이 필자의 소박한 바람이다.


여기서는 세 가지가 빨갛다는 대목 또한 흥미롭다. 이따금 만나는 전화부스, 우체통, 이층버스가 그것인데 하나같이 우리나라에서는 찾기 쉽지 않거나 어려워지는 물건들. 그나저나 북적대는 영국박물관의 축소 지향적 운영은 실로 유감이다. 이전 중앙 홀에서 눈여겨봤던 원형 서가에 꽂힌 고서적과는 끝내 재회할 수 없었다. 그 나머지야 대동소이하다지만 관람 시간을 턱없이 줄여 서두르는 바람에 로제타석을 비롯한 희귀 미라 등 다수의 전시물이 제국시대가 낳은 장물인지라 더는 감흥이 없었다. 넬슨 제독이 버티고 있는 트라팔가 광장을 지나 유로스타에 탑승할 시각. 차창 밖을 응시하는 내내 봄빛이 완연한 들판을 딛고 초원을 누비는 소 떼며 하늘을 나는 새들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쏠쏠했다. 단 하룻밤 일정을 되새겨보니 고무적인 건 관광용 투어버스에 아직도 한국어 안내방송은 없을지언정 콧대 높은 섬나라에 불어닥친 한류 열풍이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 단지 전현직 모자 국왕을 빼고는 전 국민이 손흥민의 발재간에 매료되어 대한민국 이미지 개선에 단단히 한 몫 거들고 있다는 게 일대 반전이자 방점이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정론지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5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32호)에는 ‘서유럽 견문기 - 프랑스: 익숙한 느낌의 파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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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서유럽 견문기 ‘영국: 런던의 청량한 하늘빛’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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