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다라고비진, 조선 후기 진위현 → 서평택으로 건너는 중요한 나루

동청포, 고덕면 동청리와 청북면 토진리 톷나루를 연결하는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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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라고비진 포구마을 고덕면 궁1리(2007) 

 

◆ 진위천의 나루와 포구


1. 다라고비진(위치: 고덕면 궁1리)


고덕면 궁리 궁안교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 후기 진위현에서 서평택으로 건너가는 가장 중요한 나루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수원부 남쪽 67리에 있다’고 기록됐다. 


다라고비진은 장호천(진위천), 항곶천(황구지천), 토현천(오산천)이 합류해 흐르다가 안성천과 합류하는 지점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소청나루라고도 불렀으며, 현재의 위치는 궁안휴게소 아래 서정천과의 합류 지점이다. 


193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막사리 때 안성천을 거슬러 올라온 조기젓배들이 황구지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1930년 소청교(궁안교)가 놓이면서 큰 배들이 올라가지 못하게 되자 이곳에 배를 대었고 옹진군 덕적도에서 내려온 조개젓, 새우젓, 소라젓배들도 이곳에서 곡물과 물물교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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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청포가 있었던 고덕면 동청2리 원동천(2007)

 

2. 동청포(위치: 평택시 고덕면 동청2리)


고덕면 동청리와 청북면 토진리 톷나루를 연결했던 나루였다. 조선시대에는 양성현의 읍치 동항리에서 도일동과 고덕면 율포리를 거쳐 동청포를 건너 한산리와 옹포로 건너갔다. 일제강점 뒤에는 청북면 주민들이 서정리역에서 열차를 타거나 서정리장을 갈 때에도 이 나루를 이용했고, 반대로 고덕면이나 서탄면에서 청북으로 건널 때에도 이곳으로 건넜다. 


나루는 동청2리 뱃터였지만 일제강점 전후에 계루지들이 간척되면서 동연교 아래로 옮겨졌다. 한국전쟁 직후만 해도 나루터에는 배를 건너 주는 사공이 있었고 주민들은 뱃삯으로 일 년에 얼마씩의 쌀과 보리를 거둬 주었다. 

 

동청포 일대는 아산만의 바닷물이 진위천의 민물과 만나는 지점이어서 어패류가 풍부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우여·붕어·메기·뱀장어·바다새우·민물참게가 많이 잡혔다 하고 『수원부선세혁파성책』에 따르면 백화염 1항아리마다 1냥, 석화염 1항아리마다 1냥 5전을 1884년(고종 21)에 해방영에서 거둬갔고, 배 1척마다 2냥을 선세로 수북면의 서상돈이 거둬갔다고 기한다. <참고문헌: 평택시사(평택시사편찬위원회 펴냄)> 


※ 다음호(662호)에서는 ‘진위천의 나루와 포구 - 항곶포(진)’가 이어집니다.


김지영 기자 ptl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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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史로 보는 ‘평택지역의 나루·포구유적’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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