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0-18(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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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Ph.D.

“물과 나무와 인간의 만남!” 이는 애당초 내세운 ‘물향기수목원’의 표제 겸 정체다. ‘물향기’에 담긴 뜻을 알아보니 지레짐작한 수향리(水鄕里)가 아닌 수청동(水淸洞)이란 지명에서 따온 명칭. 그럴 만한 것이 여기에는 예로부터 물가에 생겨난 마을이 있었고 늪과 못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지역이어서 굳이 ‘뭍’에 대한 기본의미를 보탤 필요를 느끼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스 철인 탈레스가 말한 대로 물을 만물의 근원으로 생각지는 않는다. 창조와 피조의 경계는 엄연히 구별된 세계이니까. 규모는 두어 시간 안에 쉬엄쉬엄 돌아보기 알맞은 100만 평(34㏊) 남짓. 직전에 들춰본 소개문을 잠시 빌리면 2000~2005년까지 조성했는데, 이듬해 개원한 뒤 모두 19개 주제원을 구성하면서 만경원을 필두로 물과 관련된 소주제를 염두에 둔 호습성식물원, 수생식물원, 습지생태원 외에 분재원, 무궁화원, 한국의소나무원, 단풍나무원, 중부지역자생원, 유실수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 주요 건물로는 산림전시관, 곤충생태원, 난대·양치식물원, 물방울온실 등이 있고, 보존식물은 가시연꽃, 미선나무 등 총 2천여 종에 이른단다.


물향기수목원이 내게 유별난 연유는 따로 있다. 고맙게도 필자를 시조시인으로 천료하도록 도운 곳이어서 그렇다. 곧 등단작 가운데 한 작품인즉, “앞장선 생태원 숲 오솔길을 벗어나 / 떠미는 오후에 밀려 아내와 맞은 초여름 / 물향기 감도는 그곳 / 풀내음 흩날리는 // 야산 아래 습지 돌아 그늘 쉼터 걸터앉아 / 단풍이 바위가 된 무지갯빛 설화를 / 올챙이 창포에 기대 / 빠끔빠끔 엿보는 // 새침한 자운영은 자주꽃잎 숨기고 / 후미진 도랑가서 잔웃음을 피우다 / 오뉴월 물로 향기로 / 오뉘처럼 만나서”. 옛시조에서 보이는 정형률을 현대 감각에 맞게 넘나들기는 했으나 애써 시상을 가다듬은 나로서는 그런대로 운율을 다스린 결과 무난히 심사를 통과한 게 아니었나 헤아려볼 뿐이다. 보시다시피 시조에 나타난 시심처럼 세 수로 이루어진 연시조에서 시인이 꾀한 바는 일상성의 회복이다. 자고이래 뭍에서 나는 향기는 기름진 흙에서 나오거니와 무릇 물에서 나는 향내는 물 자체가 맑을 때 오롯이 속마음으로 맡을 수 있는 법이어서다. 그렇다면 우리 부부는 비록 간헐적이나마 양자를 두루 즐기며 살아가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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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향기수목원에 조성한 대숲길

 

그렇다고 하여 위에 적은 제목처럼 물향기수목원의 사시사철을 죄다 섭렵해내지는 못한다. 그 터가 우리 집과는 꽤 떨어진 데다가 아내는 유난히 추위를 타는 체질일뿐더러 필자 역시 눈 덮인 경치를 그닥 좋아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이는 내 취향이 흰색 자체를 꺼리거나 멀리해서가 아니라 어느 나라 시가지이거나 독특한 산야의 빛깔이든지 똑같은 색으로 뒤덮이는 걸 여행의 본류라고 여기지 않아서다. 나의 경우 경관의 묘미를 다양한 색상의 조화로움에서 찾는 편이다. 이를테면 유럽처럼 엇비슷한 형태의 주황색 지붕 일색에 대부분인 미색 계통의 벽색마저 은은한 갈색 톤이나 옅고 짙푸른 수목의 싱그러움을 대변할 수야 없지 않냐는 되물음이랄까. 물론 각종 건조물의 시대별 양식이며 그때마다 격식을 갖춘 장식물을 도외시하려는 의도는 아예 없다. 다만 짧은 해명을 곁들이자면 인공미가 개입된 조형물보다는 태초의 본성이 스며든 자연미를 전폭 신뢰하는 까닭에서다. 이걸 가리켜 특정 세계관에 녹아든 감상의 진폭이라고 재단한다면 흔쾌히 수용하련다. 내디딘 여정은 누구에게나 가볍지 않은 행보이므로.


이른 봄날 물향기수목원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조경수의 천태만상은 흥미롭게도 숨바꼭질에 서툰 미로원을 빠져나올 때까지 그림자의 뒤태를 간지럽힌다. 다소 까칠한 메타세쿼이아 길을 걸어 미끈한 정원수 앞에서 추억을 남기고 듬직한 산림전시관을 둘러보는 기분은 색다르다. 탁 트인 난간에서 살펴본 둠벙에는 펑퍼짐한 연꽃잎이 한창이다. 어느 늦여름 아내나 나나 수생식물 군락지에 반색하는 건 일맥상통. 그 건너편에 우거진 대숲이랑 어우러진 솔잎들을 꿋꿋한 무궁화동산이 떠받쳐주기에. 위쪽 수더분한 흙길을 지나 하늘거리는 갈대숲과 헤어지려면 발치에 살짝 귀띔해줄 일이요, 행여 정자에 오르기 귀찮거들랑 잔디마당 의자에 걸터앉아 탁한 물속을 정화하기 바쁜 수생식물을 떠올리시라. 바지런히 물갈퀴를 놀리는 오리 떼와 눈인사라도 나누셨거든 야생화 단지에서 가쁜 숨결을 가다듬을 것. 그러나 깊게 물든 오색단풍에 취해 탐스러운 수국원 옆 기능성식물원마저 잊은 채 물방울 맺힌 온실을 어찌 지나칠 수 있으랴. 어차피 향긋한 쉼터는 그윽한 호수를 닮은 연못가에서 정겹게 주고받는 담소이거늘!


■ 프로필


- 기고활동을 이어가며 산문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교직 퇴임 후 기독교철학 분야와 문화교양학을 공부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s://blog.naver.com/johash

- 본지에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를 16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 다음호(787호)에는 ‘국내 걷기 - 오산천변 둘레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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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국내 걷기 ‘물향기수목원의 동선’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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