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조하식 수필가.jpg
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Ph.D.

해마다 김장철이면 특별히 밀려드는 생각이 있다. 다름 아닌 배추의 짧은 일생에 관한 얘깃거리다. 올해도 어김없이 아내와 함께 김장재료를 보러 가게에 들렀다가 때마침 괜찮은 물건이 보여 조금은 이른 시기에 일괄 구입에 나섰다. 주섬주섬 고른 재료만 해도 배추 다섯 망(총 15포기), 통무 다섯 묶음, 쪽파, 양파, 갓, 마늘, 생강, 새우젓, 멸치액젓 등을 사는 일은 도왔으나, 배달된 물건들과 다 담근 김치통을 나르는 일 외에는 별로 거들 일이 없었다. 옆에서 가끔 흘끔거리며 살펴본 바로는 이른바 채수를 만드는 과정부터가 수월치 않았다. 그나마 돋보인 건 모은 양념을 섞는 과정에 무채의 양을 대폭 줄이고 무를 갈아 쓴 슬기였다. 다만 거실과 발코니에 한판 벌여놓은 걸 앉아서 지켜보는 마음이 그리 편할 리 없었다는 것. 일정 부분이라도 돕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건 그래서다. 그런데도 한사코 자신이 홀로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니 말릴 방법 역시 여의치 않았거니와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될 일에 나섰다가 본의와는 달리 걸리적거릴 수 있겠다고 여겨 못 이기는 척 슬그머니 김장 대열에서 빠지고 말았다.


어쨌거나 본시 내가 붙인 이 글의 제목은 ‘일곱 번의 죽음’이었다. 짐작한 대로 통배추가 맛있는 김치가 되기까지 무려 일곱 단계를 거친다는 공정을 두고 이르는 말인데, 그것도 농부가 씨앗을 심어 김을 매고 양분을 공급한 다음 하늘의 섭리에 힘입어 다 자랄 때를 기준으로 따져본 전제에서다. 그도 그럴 것이 억센 손길에 의해 땅에서 뽑힐 때 한 번 죽고, 서슬 퍼런 칼날이 허연 배를 가를 때 두 번 죽고, 수줍은 속살을 천일염 소금으로 절일 때 세 번 죽고, 매운 고추와 짜디짠 젓갈로 버무릴 때 네 번 죽고, 흠뻑 신맛을 내느라 발효를 기다리며 다섯 번 죽고, 독에서 꺼내 도마에 놓고 토막을 칠 때 여섯 번 죽고, 이윽고 입속에서 잘리고 씹히면서 일곱 번 죽는 일생인 참이다. 뒤돌아보아도 어느 거 하나 거저 이루어지는 과정은 없다. 각 단계마다 정성 어린 손길이 아니고서는 끼니에 없어서는 안 될 메뉴요 밑반찬이 될 리 없다. 흥미로운 지점은 밑반찬이란 용어가 1960년대 이후부터 문헌상에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구태여 김치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겠으나 발효식품의 역사는 면면히 이어진 셈이다.

 

세상사는 이야기.JPG

▲ 이충동에서 산책하다 만난 채소밭

 

그러고 보니 포기김치 매니아이던 나는 어림잡아 십수 년간을 매일같이 김치볶음밥으로 점심 도시락을 싸갔다(야간자율학습 당번일 때는 두 개씩).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아내가 싸준 사랑으로 꼬박 정년을 채운 뚝심이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매년 삼십 포기를 웃돌게 담그던 김장이었건만 요 몇 년 사이 내 입맛에 이변이 생겨 벌써 이태째 반절로 줄이는 일이 일어났다. 그만큼 아내의 입술이 터지지 않아도 된다는 면에서는 일견 바람직한 현상이기는 해도 분명히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 터임에는 틀림이 없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중에서 김치를 사서 먹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갸우뚱하는 눈초리를 은연중 드러내 보이곤 했는데, 어느덧 나이가 법적 노인의 반열에 들면서 눈에 띄게 근육이 줄더니 일주일에 한 번가량 찾던 육류를 이제는 두세 번 먹게 되어 흐르는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새삼스레 실감이 난다. 여담이로되 여고에 재직할 때 제자들은 내가 던진 아재 개그에 사춘기 웃음보를 터트렸는데, 대학으로 향하는 발길을 멈추는 즉시 동시에 포기김치도 덩달아 포기해야 한다는 농담이었다.


어느 누군들 단 한 번 사는 생애에 일곱 번의 죽음을 불사한 적이 있는가? 아니 단 한 번만이라도 남을 위해 희생이나 헌신까지는 아니라도 양보나 손해를 감수한 일이 있었는지 캐묻고 싶다. 모르긴 해도 연약한 육신과 영악한 정신을 가진 인간은 통 큰 이해는커녕 작은 배려조차 인색한 게 엄연한 현실이 아니던가? 가늘게나마 고운 마음이라도 먹어보았는지 조심스럽게 진단하는 참이다. 돌이켜보니 나는 소작농의 아들이었다. 이를테면 미련할 만큼 땅만 파고 살았던 빈농에서 자라났다. 다행히 나어린 나의 주위에 갑질하는 마름은 없었으나 수시로 노동 현장에 나가서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고달픈 기억이 남아있다. 남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러한 고역을 치렀기에 겨우내 허기를 때웠고, 들기름을 부어 보글보글 김치찌개를 끓이기만 해도 마치 돼지고기로 배를 두둑이 채운 포만감을 추억할 수 있으리라. 배추들은 오늘 참을성 없는 우리를 보고 무어라 말할까? “그것이 저의 길이라면 기꺼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죽고 또 죽겠습니다.”라고 되뇔지도 모른다. 삭혀서 없어질망정 썩지는 말아야지 하면서 말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707호)에는 ‘공원은 도시의 품격’이 이어집니다. 


태그

전체댓글 0

  • 36855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세상사는 이야기] 배추를 위한 송가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