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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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Ph.D.

멀리 능선 없는 돌산이 보였다. 그보다 적확하게는 희뿌연 석산이란 표현이 더 어울린다. 도로를 낸 경사면마다 나뒹구는 잔돌을 막는 그물망들을 쳐놓은 건 그래서다. 차창을 보니 햇빛을 반쯤 가린 새털구름이 흐린 하늘에 가득하다. 그때 공원처럼 조성한 묘지들이 마파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풍경 사진을 핸드폰에 담아내는 나로서는 쓸만한 장면을 놓치기 일쑤. 일순간을 포착하는 작가적 육감에는 한참이나 뒤떨어지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고유한 재능은 타고난다는 가설을 뒤집을 근거는 미약하다. 반면에 천재는 단 1%의 영감을 부여받았을 뿐이라는 일설에도 설득력은 있다. 다만 99%의 노력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1% 요소가 필수적이라는 논리를 제압해야 한다. 그나저나 박대장이 이곳을 가리켜 유럽분쟁의 요약판이라더니 파괴된 가옥들을 방치해 둔 게 눈에 띄게 늘어났다. 손바닥 만한 밭뙈기 농사로 겨우 연명하던 생계조차 가물가물한 판에 불현듯 이웃사촌의 살상을 자행한 건 광기로밖에 더는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뭇 생명의 본질마저 왜곡해버린 종교적 현상들은 인간계를 지탱하는 필요악일까, 일소할 죄악일까?


처음 맞은 출입국심사 절차.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 인구: 350만가량, 면적: 한국의 절반)의 국경검문소는 낯설었다. 하지만 곧바로 찾은 ‘야곱성당’ 만큼 개신교도들에게 낯익은 예배당도 드물 것이다. 우선 야외에 가지런히 배열한 의자의 모양새나 성당 안의 장식물이 단출했거니와 비록 사람이 만든 형상에 손이라도 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기복신앙의 행위는 그대로일지언정 성모로 추앙을 받는 마리아보다 십자가에 매달린 성자 예수를 부각한다는 인상을 풍겼기 때문이다. 잠깐, 그렇다고 지레짐작은 마시라. 필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논제로 학위를 마친 조직신학도로서 영혼구원의 실체적 진실을 잠시 되짚었을 따름이니까. 여하튼 우리 부부는 부활의 흔적을 찾아오는 이들을 뒤로한 채 반경을 좁혀 그 일대를 돌아보기로 했다. 길 건너 성물 거리에서 동네 뒷길로 접어드니 흙먼지가 풀풀 날리기는 했으나 호기심이 충만한 나로서는 궁금한 곳은 대충이라도 둘러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성당에 딸린 정갈한 숙소를 거쳐 소박하게 꾸민 꽃길을 여유롭게 살펴본 뒤에도 가시면류관을 가린 예수상을 맴도는 이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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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 다리 앞

 

‘모스타르’는 매우 충격적인 재앙의 현장인 동시에 매력적인 관광 포인트. 벽에 총탄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을 만큼 내전 당시의 참화는 치유되지 않은 채였다. 특이사항은 동네 게시판에 실시간 부고장이 나붙는 풍속화. 그가 어떤 종교를 가졌든 결혼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당당히 유지하고 있단다. 곳곳에 우뚝 솟은 모스크 사이에 유대교 회당이 눈에 띄었다. 외곽 거리는 비교적 한산한 편. 테파시장으로 접어들자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면모가 드러난다. 다들 추억을 남기기에 바쁜 다리. 기실 포토존은 스타리 모스트 건너편이다. 즐비한 기념품 상점과 맞닿은 액세서리 가게들을 지나며 나는 다소 피곤해 뵈는 아내를 달래 구석구석을 누볐다. 알려진 곳일수록 고즈넉한 풍광은 따로 있는 법. 복잡한 소로를 뚫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기분은 그만큼 상큼하다. 하필이면 코앞에 있는 번지점프대가 때마침 개점휴업 중이어서 볼거리를 놓치고 말았다. 이역만리까지 날아와서 생소한 땅을 밟아보는 촉감이야말로 몸소 발품을 팔아야 체득할 수 있는 즐거움의 한 축이 아니랴.


기존 유럽문화와는 상이한 측면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지점. 그만큼 이슬람이 끼친 영향은 컸다. 중후한 비숍 교구청 건물을 바라보며 무심한 시계탑을 지나치니 가히 종교의 백화점이라 해도 과하지 않을 만치 정교회, 가톨릭 성당,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늘어서 있거늘 어찌 그런 끔찍한 전쟁을 벌여야 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굳이 비좁은 틈새를 비집고 종탑에 오르지 않는 이유였다. 비록 고색창연하지는 않더라도 흙빛 담벼락에 눈길이 멎는 건 필자만의 취향. 평소 어설픈 인공미를 극도로 꺼릴뿐더러 수수한 자연미를 선호하는 본새도 나만의 익숙함이 만들어낸 습관인 듯하다. 무게가 실린 발바닥을 거푸 자극할 만치 울퉁불퉁한 돌길인데도 표정들은 한결같이 밝다. 서둘러 빠져나온 구역은 저렇게 늘 붐빈다더니 과연 눈요깃거리가 많았다. 고정된 시공에서 정해진 조건을 최대치로 활용할 줄 아는 건 상식이요 지혜로되 과거사로 굳어진 유고연방의 수도인 사라예보는 개인적으로 해결할 미완의 과제로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80호)에는 ‘발칸반도 주마간산기 -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는 녹화 중’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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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발칸반도 주마간산기 ‘보스니아: 야곱성당을 거쳐 모스타르’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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