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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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Ph.D.

실로 삼 년여 만의 해외 나들이. 아닌 게 아니라 우리 부부의 발칸반도 여행은 무려 일곱 번째 신청 끝에 성사됐으니 기분은 남다를 수밖에. 눈꺼풀이 무거운 꼭두새벽을 깨우기보다는 훨씬 낫겠다는 판단에 느긋이 인천공항으로 향한 출발 하루 전 저녁나절, 차창 밖 풍경은 늘 그랬듯이 유별나게 시신경을 자극하지는 않았다. 무덤덤한 정물화 그 이상을 주위로부터 느낄 수 없다는 건 심심한 일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아파트단지의 행렬이나 빈터마다 들어선 중구난방의 건조물들로 인해 이미 그림 같은 장면은 사라진 지 오래다. 왜 우리는 유럽의 마을처럼 벽에 밝은색을 입히고 원색의 지붕을 얹지 못할까? 극심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과정에서 일사불란하게 초가지붕을 벗겨내고 죄다 기와집으로 바꿀 수는 없었겠으나 바람직한 통제가 가능했던 시절에 최소한의 관련 규정을 둔 채 새마을운동을 슬기롭게 진척하기는 어려웠는지 못내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공항청사에서의 하룻밤은 몹시 불편했지만 편안한 맘으로 맞은 이른 아침, 인솔자의 간결한 안내는 동심처럼 설렌 여행자를 안심시켰다. 게다가 비좁은 좌석의 고정된 자세마저 별반 힘들지 않게 느낄 만큼 터키항공의 첫 기내식(말린 대구 요리, 오이 향이 나는 샐러드, 고추장, 참기름 등 제공)은 맛있었고, 상공에서 바라본 이스탄불의 노을은 아름다웠다. 흡사 성화탑을 꼭 빼닮은 관제탑. 양떼구름을 헤치고 사뿐히 내려앉았다가 잠시 후 떠오른 기체는 어느새 크로아티아(Republic of Croatia)의 영토(인구: 약 390만, 면적: 한국의 56%가량)와 살가운 접점을 이뤘다. 숙소에 봇짐을 풀면서 바라본 수도 자그레브의 첫인상은 수더분했다. 여기는 내일 슬로베니아(Republic of Slovenia, 인구: 200만 남짓, 면적: 한국의 1/5가량)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한 중간 기착지였지만 식사 메뉴는 훌륭했으며 잠자리 역시 그만하면 합격점. 일찌감치 지저귀는 새소리에 일어나 맑은 대기를 마시며 아내와 함께한 식전 산책길은 촬영 직전의 영화세트장을 남몰래 거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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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호수와 성

 

셍겐조약 덕분에 수월하게 당도한 ‘블레드 호수’. 역시나 그동안 동영상을 통해 알려진 풍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 부부는 사전에 약정한 대로 배를 타지 않고 주변을 두루 걷기로 했다. 몸이 감지한 실외 온도는 우리나라 늦봄에 해당하는 제법 더운 기류. 날씨만 선선했다면 아마 내 성미에 저만치 산꼭대기를 차지한 블레드 성까지 냉큼 등반을 감행했을지도 모른다. 눈썰미를 동원해 잔잔한 수면을 굽어보니 호수 둘레를 돌아오는 수변길도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또한 주어진 시간을 감안한다면 무리한 시도일 터. 그렇다면 자유의 시공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건 동네 한 바퀴를 바지런히 도는 것이리라. 바로 옆 공원에는 노란 난초꽃이 한창이다. 골목에 핀 개나리며 담벼락을 타고 올라간 담쟁이덩굴도 퍽 싱그럽다. 국제적으로 이름난 유원지치고는 호텔이나 요식업소가 난립한 편은 아니다. 언덕배기에 올라 유심히 살펴본 정교회. 내부가 그리 요란하지 않은데도 노파심인지 새삼 걱정이 앞선다. 다행히 방문객들을 제지하지는 않았고 여기저기 주택가의 화단을 구경할 만큼 분위기는 차분했다. 잔물결에 비친 산자락. 티토가 별장을 지어 힐링할 정도로 줄리앙 알프스의 보석인지는 잘 모르겠다.


엷은 갈색 톤의 낙엽송이 널리 퍼져 있는 야산과 들판. 간간이 조성한 초지 너머에 눈 쌓인 산정이 보였다. ‘포스토이나 동굴’ 안은 웅장하지 않은 산세와는 달리 콘서트가 가능할 만치 대단한 규모(총 길이 20km, 폭 3.2km). 인솔자가 유럽 최대의 석회동굴을 보게 되면 현지어처럼 아마 야마(JAMA)가 돌(?) 거라고 농을 쳐댔다. 적어도 크기에 관해서는 들어맞는 말. 하지만 천연기념물의 가치는 단지 덩치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필자의 눈에는 갖가지 종유석은 물론 석순이나 석주 가운데 성한 게 없을 지경이다. 스며든 빗물이 실시간 떨어지는 천정마저 새까맣게 변색이 되지 않았는가? 아니 어떻게 세계 제2의 자연동굴에 이따위 몹쓸 짓을 저질렀는지 캐묻고 싶다. 나무 깔판조차 조심스레 설치해야 마땅하거늘 독한 시멘트를 들이부어 관람로를 만들고, 목돈에 눈이 멀어 진동이 극심한 철로를 깔아 차량까지 운행하다니, 이토록 연일 내상을 쌓다가는 조만간 위험천만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경계주의보를 내리고자 한다. 어쨌든 일단 궁금증은 풀린 셈이다. 이 동굴에 희귀한 인면어(human fish)가 살고 있음에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은 까닭이렷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78호)에는 ‘발칸반도 주마간산기 - 크로아티아: 자다르 크르카 스플리트’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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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발칸반도 주마간산기 ‘슬로베니아: 블레드 성과 포스토이나’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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