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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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문인, 철학박사

이제 독자 여러분은 기독교의 교리를 어떻게 느끼고 계십니까? 쉽거나 어렵거나 굳이 둘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원저자는 쉽다는 쪽을 택하겠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얻는 일이 되게 어렵다면 세상의 무지한 사람들이나 가난한 사람 중에는 천국에 들어갈 자가 거의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빈부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릇된 자아를 버리고 돌아선다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잘 압니다. 어쩌면 유식하고 가진 자들이 세상 것을 더 버리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요. 기독교의 방식을 두고 어려우면서도 쉽다고 한 말은 그래서입니다. 문제는 자연적 자아의 전부를 그리스도께 바칠 수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게으름을 피우다가 아예 일을 못하거나 망치는 경우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전쟁터에 나간 병사가 미적거리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으며 삶과 죽음을 동시에 실현할 수 없다는 원리입니다.


이는 결코 이상주의에 불과한 말씀이 아닙니다. 진리를 두고 일종의 절충안을 따르기는 더 어렵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부패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 작은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데 목적을 둡니다. 고로 예수님은 우리의 선물이십니다. 나 자신도 주님의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오직 그 일을 위하여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문하신 “하늘에 계신 너희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48)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위기 11:45, 베드로전서 1:16)라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원저자는 위의 분부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온전하도록 돕고 싶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성화를 지향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만 마지막에는 영화롭게 변화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월이 흘러가도 신앙이 자라지 않는 자를 보고 질책하시는 장면을 떠올리십시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요한계시록 3:15)라고 질책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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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락산 일대에서 만난 풍경화

 

이거야말로 뒷걸음질 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는 경고입니다. 나태는 비겁함의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를 통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태복음 25:26)라고 꾸짖은 대목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누가복음 6:46)라는 추궁에 이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라고 하시면서 내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사무엘상 15:22)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원저자는 호감을 주는 사람과 새 사람 중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초장에 다소 자극적인 문구가 있었습니다. “경솔한 말의 대가는 목숨”이라는 전시 포스터였습니다. 곧이어 “경솔한 삶의 대가는 말”이라는 대꾸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태복음 7:16)라는 구절을 두고 일의 과정을 무시한 채 결과만을 판단하라고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물론 저자가 의도한 바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기독교의 일탈로 인해 진리 자체가 위협받는 현상을 우려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구원이 없는 종교 형태에 선하다는 식의 해설을 덧붙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는 신앙 양심상의 문제 제기입니다. 다소 긴 예화를 들었으나 결론은 자명합니다. 호감을 주면서 새사람이 되는 것이 최선입니다. 실제 마음으로 믿어 구원에 이른 신앙인이라면 거듭났을 터이고, 그러한 회심자라면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호감을 드릴 수 있습니다. 속 좁고 신경질적인 습관 또한 아직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한 결과라는 진단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연약한 인간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돌아서지 않는 한 그는 아직 참된 그리스도인에 미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76호)에는 ‘기독교를 위한 변증 - 창조주의 사역을 논증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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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기독교를 위한 변증 ‘구원의 실체를 명문화함’ (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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