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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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문인, 철학박사

자신의 인격을 넘어서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첫걸음은 만드는 것과 낳는 것을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여기서 다룰 내용은 다소 신학적일지라도 양해하시고 끝까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돌이켜보니 영국 공군부대에서 강연했을 때 노 장교로부터 항의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요지는 자신이 사막에서 실제 체험한 신비감을 제아무리 화려한 말로 설명한다 해도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투의 잘난 척이었습니다. 필자가 보기에도 원저자가 전하는 하나님에 관한 설명은 결단코 시시하거나 사소하지 않을뿐더러 더구나 현학적인 태도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 장교의 무례한 항변을 듣노라면 부분적으로 이해는 하겠으나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설사 그의 생각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자기 하나로 족할 일입니다. 많은 이들에게는 현장에서 펼쳐볼 지도가 필요했을 테니까요. 바로 신학적 논리란 유용한 지도와 같은 것입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일도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누구나 글을 읽고 토론에 임하는 시대입니다. 예수를 단지 도덕적인 스승으로 묶어둘 수만은 없는 이유입니다. 


만약 기독교가 윤리적인 측면에서만 필요하다면 플라톤이나 공자의 사상과 다를 게 없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연유에 관해 설명하려는 참입니다. 기독교 신조를 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나셨다”라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동정녀 마리아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으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낳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동물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보다 더 위에 존재하는 생명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안에 있는 영적인 생명은 자연 전체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조에(Zoe)라는 생명입니다. 삼위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낳으셨고 사람은 만드셨습니다. 기독교인들 주위에서 흔히들 인격적으로 만난 하나님을 간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하늘나라에 계신 신비스러운 존재는 인격 이상의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 초인격적인 존재의 실체를 알려줄 책임은 거듭난 신앙을 소유한 자들의 몫입니다. 기독교 말고는 그와 같은 교리를 가진 종교는 세상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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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락산 일대에서 만난 풍경화

 

이처럼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생명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사람이 이생을 거친 뒤에는 하나님께 흡수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 생명에 관해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다면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올바를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리고자 합니다. 한 공간 안에서 하나의 물체는 전후, 좌우, 상하의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한 단계 위를 보자면 정육면체는 여섯 개의 정사각형인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납득할 수 없는 지점이 생깁니다. 하나님 차원에서 세 인격인 동시에 하나인 존재를 인정하라는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로 오셨다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뒤 성령을 보내신 사건을 이해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이 대목이야말로 신비한 영적 경험 과학의 영역이라는 말로써 갈음하고자 합니다.


시간과 시간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분별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자신에게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을 얼른 건너뛰어 버립니다. 사실 저자가 소개하는 장황한 설명은 저로서도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믿겠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동시에 수백만 명의 기도를 동시에 들으실 수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는 대목을 두고 이르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인 전지전능하심조차 못 믿겠다는 얘기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사람보다 조금 나은 존재로 여긴다는 발상이니까요. 좀 심하게 표현하면 자기가 만든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삼위의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감히 짐작조차 불가능한 차원에 존재하시기에 상상을 초월하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무한하신 능력으로 시공을 넘나드는 분께서 수십억 명이 생각하고 말하는 일상이 무슨 대수란 말입니까?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곧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퇴임 후 기고활동을 이어가면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을 운영합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4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74호)에는 ‘기독교를 위한 변증 - 하늘나라의 뜻을 이해함’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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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기독교를 위한 변증 ‘삼위의 하나님을 신뢰함’ (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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