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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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수필가·시조시인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 모자 아래 두른 손수건이 금세 짠물로 흥건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랜 가뭄으로 인해 흙먼지마저 풀풀 날린다. 가쁜 숨은 턱밑까지 차올라 몇 마디 건네는 입말조차 애를 먹을 정도. 솔직히 이쯤 해서 그만 내려가 버릴까 망설여도 보았다. 그러나 이 난국을 참고 묵묵히 오르는 두 아이를 보는 순간 게으른 잡념이 이내 사라졌다. 위를 쳐다보니 반갑게도 중턱이로되 산꼭대기가 코앞이었다. 비록 정상은 아닐지언정 봉우리 가운데 어느 하나만이라도 정복하려던 참이었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딸아이를 데리고 뒤따라오던 아내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빨리 비켜, 은빛 빨리!” 바위벽 사이에서 제법 큰 암석 덩어리 한 개가 뚝 떨어져 아이 쪽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모든 사고가 그렇듯이 벌어진 일은 일순간. 눈앞이 아득하고 정신은 아찔했다. 주위에 온통 암흑이 좍 깔린 것 같았다. 다행히도 아이는 굴러오는 돌을 침착하게 피했고 별반 놀란 눈치도 아니었다. 실로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큰일을 당할 뻔한 위기였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일이 있고 난 직후 겨우 한숨 돌리나 싶을 적에 이번엔 아들녀석이 높다란 바위벽을 붙잡고 자신만만하게 기어오르다가 반길 밑으로 맥없이 떨어져 버렸다. 평소에 유독 산을 곧잘 타서 그때마다 칭찬을 푸지게 들은 아이였기에 더 놀랄 수밖에. 빼빼 마른 체구에 가벼운 몸놀림으로 딴은 제 진가를 나타내려는 소영웅심이 발동한 참에 무리하게 올라붙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버린 터였다. 다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건 당연지사. 나는 얼떨결에 일어난 아이를 엉겁결에 끌어안았다. “아빠, 저 안 아파요!” 아이가 황급히 내뱉는 첫마디였다. “정말이야? 정말 괜찮은 거야?” “네, 그렇다니까요?” 하지만 난생처음 당하는 사고에 놀란 기색이 뚜렷했다. 다행히도 아이는 가방을 메고 있었다. 엄마가 본능적으로 품에 아이를 끌어안고 다독거리며 진정시켰다. 정신을 가다듬고 온몸을 훑어보니 신기하게도 긁힌 자국 한 군데 없었다. 나는 등판이며 팔다리를 번갈아 주무르며 일어났다 앉아보라고 두어 차례 주문하면서 목을 만져보고 좌우로 움직여보라는 말에도 아이는 충실히 움직였다. 일단 별 이상은 없는 듯 보였다. 그런데 그 점이 도리어 불안한 지점. 혹여라도 속에서 골병이 든 건 아닐까 하는 방정맞은 의구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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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왕산의 가을 <제공 = 주왕산 국립공원>

 

그렇다면 불과 얼마 남지 않은 산정까지 올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부간에 얼른 결정을 내려야 했다. 진퇴유곡에 아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의외라 싶게 이왕지사 끝까지 올라가자는 제안이었다. 예상치 못한 진행에 아이들도 적잖이 놀란 눈치. 나는 대뜸 대대적인 환영성명(?)을 발표했다. 그야말로 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선언이라고! 물론 나의 고마운 속내였을 뿐이다. 문제는 아이들의 심리상태. 굳이 무리하면서까지 기어코 산꼭대기에 세워야 한다는 판단은 어쩌면 어른의 옹고집일 수 있고 섣부른 독단이 될지도 모르겠기에 잠시 망설여야 했다. 아이들에게 의사를 물으니 흔쾌히 동의에 제청. 그렇게 우리 넷은 어렵사리 목표한 정상을 밟고야 말았다. 그야말로 천하를 몽땅 껴안은 기분. 저 아래 뵈는 주왕산의 바윗돌이 방금 전 그 모습 같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맘껏 칭찬해주며 “드디어 해냈다”라고 미소짓는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지금도 그 대견한 장면의 사진을 꺼내 보노라면 흐뭇한 웃음과 함께 그 시공에 감돌던 비장한 기운을 새삼 소환하곤 한다. 


이제 흔쾌히 내려가야 할 시점. 역시나 하산길의 복병 또한 언제 떨어져 구를지 모를 돌들이었다. 입에서는 연신 조심 또 조심을 부르댔다. 나는 극도로 긴장한 데다 산에서 나는 세미한 소리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숨을 죽였다. 모두 잘 따라준 덕분에 생각보다 훨씬 빨리 산밑에 닿을 수 있었다. 아이 둘이서 거의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아무 일 없이 무탈하게 내려온 성취감이 우리 식구를 한껏 고무시킨 현장. 선명한 주왕굴 표지가 눈에 띈 것은 그 뒤였다. 하지만 이미 여름 해가 서산에 걸렸을뿐더러 이만큼으로도 족하고 남을 하루가 아닌가. 역경을 딛고 올라선 아이들의 기개가 자못 자랑스러웠다. 그래 오늘 체험을 인생의 소중한 계기로 삼아 앞으로 닥쳐올 온갖 시련을 당차게 헤쳐나가렴. 끝으로 남은 행사는 시냇물에 발 씻기. 매끈한 바윗돌을 깔고 앉아 맑은 물을 한 움큼 꼭 쥐어 메마른 목청을 축였다. 아, 이 달콤한 맛이야말로 여행 중 산행의 산뜻한 뒤끝이 아니런가!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55호)에는 ‘가볍지 않은 생각 모음 - 교과서 너머를 살피니’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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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주왕산 바윗돌 ‘고초를 겪고 오른 지점’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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