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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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욥기, 전도서를 통한 지향점은 인간의 영적 지혜에 있다. 세 권의 책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쓰였다는 것은 자명하다. 인생을 어떻게 잘 경영할 수 있는가? 인생에서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갑자기 닥치는 재난은 어찌 대처할 참인가? 그 상호작용의 관계를 힘써 정리하고자 한다. 지혜문학에서 다룬 주제는 모든 인간에게 절실한 자양분이다. 응당 솔로몬(아굴과 르무엘 포함)과 욥에게 영감을 주신 주관자는 성령님이시다. 그 말씀에서 위로와 평강을 얻지 못한 이는 없다고 본다.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인간은 언제나 삶의 등불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전도서에서 추구하는 바를 일견 비관주의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필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욥기에서 읽히는 축복을 극구 설명해보라고 요청한다. 더구나 잠언 기자가 기술한 악의 창궐을 저주의 길로만 해석하는 관점에도 반대한다. 의로운 길에 영생이 있다고 믿는 것이 핵심이다. 어떤 경우든지 사후보장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 막장이다.


잠언과 전도서의 관계를 두고 창조적 긴장이라고 주석을 다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참다운 지혜는 창조주의 은혜를 깨닫는 데 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것이 최상의 지혜다. 현재의 고통에 어떤 반박을 가하든지 성도의 태도는 결연해야 한다. 외식을 유난히 싫어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행위 이전의 동기를 중시하시기 때문이다. 전도서의 문체는 언뜻 잠언서에 나오는 격언체의 그것과 구별이 안 가는 이유다. 무상감을 극복하는 길이 이생에 있지 않고 내생에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고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일부 현상에 대해 회의하는 사색까지 색안경으로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 인생의 어두운 면은 보상적인 지혜와 결코 상극에 있지 않다. 이 또한 전도자의 눈높이와 불일치하는 측면이기는 하되 인간사를 관조하는 면에서는 참고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관심사는 늘 우주적 질서가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었고,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의 과학마저 하나님의 뜻에 종속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현인일수록 자신들이 추구하는 실존적 안정에 대한 신의 최종적 거부권을 존중했다.

 

삶의 현안에 대한 주요 수단으로써 기능한 것이 이른바 유비(analogy)였다. 유비(類比)는 유비추리의 준말로써 서로 다른 사물 간에 대응적으로 존재하는 유사성 내지는 공동성을 뜻한다. 그들은 적절한 유사를 대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고 보았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것이 목표를 이루는 하나의 방법일지언정 목표 자체는 아니라는 맥락에서 잠언을 검토해야 한다. 그 주제 분석을 통한 필자의 의사는 간단명료하다. 창조주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한 분이시라는 대전제다. 명제는 역사적으로 인간에게 있었다. 따라서 고난사는 어제와 오늘만의 일이 아니라 내일도 계속될 일들이다. 다름 아닌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에서 연유한 의심과 욕심에 기인한다. 바로 이 양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누릴 복락을 차버리고 살아간다. 하나님께서는 필요불가결한 것을 주시기도 하시고 거둬가시기도 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서 의심 없이 욕심을 버리고 감사로 받아쓰면 족하다. 누리면 고마운 이치를 끊임없이 싸우고 다툼으로써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영육 간의 빈곤을 자초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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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자유의지로 기획하는 진보와 퇴행마저 여호와의 최종적인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 거기에 우리가 절대자를 시험할 권리는 전연 없다. 우리의 한계는 늘 하나님께 두는 소망이어야 한다. 그분은 끝까지 우리가 가지는 일편단심을 보신다.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전개 방식이다. 토기장이를 향하여 나의 존재를 따지는 어리석음을 당장 집어치워야 한다. 그러한 결단과 현명함을 그분께서는 언제나 기뻐하신다. 신앙이란 차갑든지 뜨겁든지 둘 중의 하나일 뿐이지 그 완충지대는 없다. 그 사잇길에는 건널 수 없는 구렁이 있을 따름이다. 이는 비단 잠언, 욥기, 전도서뿐만이 아니라 모든 말씀에서 일관성 있게 제시하시는 길이다. 불협화음의 원인은 늘 인간에게 있었다. 정답은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어려울 때일수록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예고편이자 경고등이다. 우리의 처지를 아시는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기에 그렇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자를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자녀의 복된 위상을 누리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매번 언급하듯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 가장 시급한 현안이다. 이 창조 신앙이 흐려질 때 신을 향한 경외심이 풀어진 모양새로 나타난다. 차마 불경스럽게도 여호와의 주권이 낡았다는 식의 위험천만한 발상이 불거지는 참이다. 지혜는 창조주만이 드러낼 수 있는 영역의 깊이를 가졌는데 말이다. 생명을 부여하는 자에 대한 찬양은 세세토록 있어야 하고, 생명의 선물로서 영생을 받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세세토록 감격해야 한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욥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답변은 축복을 배나 더한 완전한 회복이었다. 통상적으로 평온한 국면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경향이 짙다. 이때 주의할 점은 욥이 당한 고통은 누구라도 당하면 주신만큼 이겨낼 수 있는 증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를 마치 자신의 시험처럼 생각한다면 분명 교만이다. 복권되기 전까지의 태도까지를 보신 하나님은 복의 복을 예비하셨다. 육적 소유를 갑절이나 더해 받은 것의 영적 의미는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신 하늘나라의 수단과 도구일 뿐이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3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7호)에는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 성경은 구원의 약속’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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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지혜문학과 떠난 자유여행 ‘은혜로 얻은 지향점’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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