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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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그러나 쌓인 책의 무게로 인생의 부채가 탕감되는 건 아니었다. 연달아 실패한 대학입시를 지레 포기할 수도 없었다. 가정 형편상 학원에 등록하지 못하고 책상 앞에 앉았으나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운 시간은 흘러가는데 막상 만회하라는 공부는 등한히 한 채 목표로 잡은 건 교과서가 아니었다. 장르별 문학 서적을 위시해 사회를 심층 분석한 시론(時論)에다 동서양의 철학서까지 알량한 독서목록에 등재해 놓았다. 무슨 대단한 독파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간 지병처럼 앓던 내용 공포증을 얼마큼 떨쳐낸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그중에 이해가 쉽잖은 사상서를 통해 사고의 깊이를 더했다. 그해 일기를 자주 챙겼던 덕분에 공영방송에 보낸 독후감이 채택되어 인기작가였던 최인호로부터 저자 서명이 담긴 두 권의 책을 받아들고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입시정보를 캔답시고 <진학>이라는 월간지에 나온 대학들의 면면을 훑어보느라 정작 본고사는커녕 예비고사 대비도 게을리했으니 여전히 나의 장래는 안갯속이었다. 대학의 관문 통과에 매진할 시간에 그토록 한눈을 팔다니, 돌이켜보면 창조주를 잊고 나댔던 나의 과거 행적은 한심한 투기적 노름이나 다름없었다.


가까스로 지방의 한 유서 깊은 대학에 들어서자마자 영장이 날아들었다. 오백 여권의 책을 뒤로하고 입산한 병영의 시계는 실로 끔찍한 체험의 연속극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혀 한 치 앞을 분간하기조차 힘겨웠던 지난날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멘탈(mental)에 붕괴가 올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길바닥이나 도랑에서 주운 흙 묻은 신문지[舊聞]를 몰래 주머니에 구겨 넣어 재래식 화장실에서 쭈그린 채 읽기를 시도할 만치 엄혹했다. 부당한 구타와 대접 등 말하지 못할 우여곡절은 겪었지만 동해안 경비를 맡은 말단 소대(소초)에서 최고 사령부의 본부대까지 치고 올라가며 복무하는 동안 작전참모부에 차려진 군사도서관을 떠맡았으나 그렇다고 차분히 앉아 독서에 임하는 일은 감히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다. 하루하루 생존하기에 급급한 인간 군상의 이기심들로 인해 허덕이듯 절망하며 바싹 움츠러들었던 시기였다. 그렇게 제대 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한 병사의 소망은 주님의 은혜로 무사히 이뤄지고, 차가운 겨울을 집에서 따뜻하게 보낸 복학생은 베드로 광장이 정갈한 독일식 기독교대학 캠퍼스로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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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이는 대학 강의를 섭렵하는 데는 전연 무리가 없었다. 첫 학기 성적이 좋아 중앙도서관의 지정석까지 얻어 장학금을 타내던 참에 여기저기 낙후된 공공도서관 시설에 눈길이 갔다. 주로 대도시에 산재한 대학도서관을 제외하고는 후진국형 열람실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서관학(요즘은 문헌정보학으로 개칭)이라는 전공을 택할 때만 해도 남달리 학구열이 불타올랐는데 지금 와서 반추해보니 교정 안에서의 책 모으기는 생각만큼 진척이 없었다. 그래도 만만찮은 생활비를 쥐어짠 끝에 150권짜리 문고본을 장만했고, 몇 개 시리즈물과 전공 서적 수십 권 정도만 서가에 꽂을 수 있었다. 역시나 문제는 취업난이었다. 전두환이 발호하던 1980년대 전후 유가 폭등으로 몸살을 앓던 경제가 해마다 곤두박질을 쳤기에 쉬이 따놓은 줄 알았던 남자 사서직마저 기약이 요원했다. 게다가 학점은 좋으나 평소 관계 형성에 소홀한 이력에 점수를 깎아 먹는 바람에 빈자리는 어느새 예뻐 보인 자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서울의 미션스쿨에 자리가 났다는 통보를 받은 건 춘삼월 막바지였다. 하지만 지역사회의 지식안내자를 자임하려던 나의 포부가 무모했다는 걸 깨닫는 데는 불과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직 운영 전반의 체계화를 이루지 못한 곳에서 내가 할 수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일단은 따분한 일상을 타파하기로 계획했다. 서둘러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아 길러도 한편으론 아직 봇짐을 정리하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 그대로였다. 일간신문을 펼치니 한 대학도서관의 사서직 공채 시험 공고가 눈에 띄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 통지를 받은 뒤 연봉 협상에 미심쩍은 데가 있어 허락을 받고 하루 출근해보니 내가 반평생을 걸만한 곳은 아니었다. 타개책은 공부를 계속하는 길이었다. 졸업 후 학교도서관에 심기로 약속한 이름 없는 사서 선생의 소명감은 훨씬 열악한 악조건들 앞에서 송두리째 무너져버렸다. 깊은 고민 없이 거꾸로 주독야경의 터널을 빠져나오기로 결심했다. 나는 애당초 구상했던 국어교사의 길을 향해 늦깎이 편입을 결행했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20호)에는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 영적 감지기를 맞아’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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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죽향재(竹向在)’의 주인의식 ‘지적 탐색기에 들어’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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