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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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진지한 강의 내용을 은근히 데우는 역할은 번득이는 토론자들의 몫이다. 그 가운데 한 향토사학자의 견해를 중심으로 유의미한 것들만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먼저 수도사의 창건 연대와 창건주에 대한 논의는 객관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 전해오는 대로 신라 후기 가지산파의 1대 조사 도의의 제자였고 2대 조사였던 염거화상이 창건했다면 이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고 본다. 또 수도사의 위치도 LNG기지 터에 있었다는 설이 있고, 18~19세기 괴태산 중턱에 존재했던 수도암이라는 설도 있는데 학술조사가 필요하다. 또한 원효가 견성오도한 장소까지 이르는 교통로를 체험관에 걸어 놨는데 과연 객관적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원효와 의상이 유학을 떠났던 시기가 661년이라고 판단하면 당시는 신라와 백제부흥운동 세력이 천안지역을 중심으로 대치하고 있었고, 영남대로도 조선시대와는 사뭇 달랐는데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조선시대 개념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다. 신라 때 육로교통로와 661년이라는 시대 상황을 고려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고승전을 비롯한 문헌에서 말하는 원효의 견성오도 설화에 대한 객관성을 좀 더 입증할 필요를 느낀다. 또 의상은 진골이고 원효는 6두품이므로 둘 사이의 신분적, 혈연적 관계는 전혀 없다고 본다.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 시기가 661년이라는 설이 정설처럼 전해지고 귀국한 것이 670년(문무왕 10)이라는 설도 정설처럼 전해진다. 그런데 2년만 머물렀다는 주장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의상이 중국에서 ‘화엄일승법계도’를 작성한 시기가 670년으로 밝혀져 670년 당나라의 침입을 신라에 알리려고 귀국했다는 주장은 타당한 것 같다. 아울러 의상이 깨달음을 얻은 곳이 고구려였다는 주장의 근거도 궁금하다. 종남산이 중국에 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의상이 귀국한 670년은 고구려가 멸망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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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목장 안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대부분 목자(牧子)로 일했다. 하지만 맡은 역이 힘들어 신량역천으로 생각했다. 조선 후기 목장 안에서도 감목관들이나 백성들의 주도로 간척이 이뤄지고 이것이 목장전으로 수용되었는데 갑오개혁 이후 목장이 폐지된 뒤에도 백성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궁내부 경리원에서 둔전으로 판단하고 수용하면서 분쟁이 발생한 사례는 매우 많다. 괴태곶 목장도 그와 같은 사례로 판단한다. 본인도 오류를 범했지만 평택지역에서는 포승읍 만호리의 ‘대진’을 삼국시대 이후 대중국 교통로 및 교역로로 비정하는데 객관적 사실인지 모르겠다. 근래 가장 중요한 근거자료로 제시하는 1872년 지방도 수원도호부의 대진(大津) 관련 내용도 충청도 면천군의 대진(한진) 관련 내용의 오기로 판단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삼국시대 대진의 역할, 심지어 의상이 평택항을 통해 중국에 갔다는 주장은 근거가 미약해진다.


한국에는 220개의 봉수대가 있다. 1880년대 초 한국에 온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서울 목멱산봉수대를 봉화들의 집결지로 언급하고 있다.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전갈들을 서울에 알리기 위해 약 15분 정도 타오르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목멱산봉수대는 전국 방방곡곡에 뻗쳐 있는 봉화들의 집결지로서 소위 횃불 전신술의 마지막 지점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 안의 봉수대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봉수대가 산봉우리에 있는데 비해 화성봉돈은 평지에 축조되어 있다. 이름도 봉수가 아닌 봉돈이다. 이는 유사시에 봉홧불만 피우는 게 아니라 돈대 기능도 겸했기 때문이다. 돈대란 성벽에 구멍을 내어 대포를 쏠 수 있는 구조물이다. 그렇다면 평택에는 유일하게 괴태곶 봉수대가 있다. 여기에서 일어난 역사적 주요사건 기록이나 괴태곶 봉수대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좀 더 상세히 살펴보면, 봉수대는 근대 이전 외적의 침입을 불과 연기로 알리던 통신수단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 목멱산 경봉수를 중심으로 전국에 5개의 봉수로가 있었다. 평택에는 전남 여수 돌산도의 방답진에서 한양 경봉수까지 연결된 제5 봉수로의 직봉이 지나갔다. 그밖에 평택시민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 시내 매봉산 봉화대의 존재를 알린 데 이어 오늘 미군부대 봉수대 견학 계획이 무산된 데 대하여 유감을 표명했고, 인근 지역 국회의원이 몸소 찾아와 문화재 찾기운동에 힘을 보태는 미담이 있었다. 그는 잔뜩 고무된 지역사회 인사들에게 실질적인 방안으로 범시민운동단체를 결성하라고 권면하면서 화기애애한 모임은 막을 내렸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3호)에는 ‘크리스천한테 건넨 소식 - 영혼 구원의 고백’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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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원효길과 괴태곶에 묻힌 기억들” 토론장을 달군 질문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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