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1-2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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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맨 처음 풀이한 문장은 “북쪽으로 양성(陽城) 괴태길(槐台吉)에 응한다”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미처 몰랐던 괴태곶은 봉수대였다. 바닷가 마을 서쪽에 우뚝 솟은 괴태길산(槐台吉山)에 세워져 바다 쪽으로는 충청도 면천의 봉수대하고 가깝고, 동남쪽으로는 직산의 망해산(경양산) 봉수대와 연락이 닿았으며, 북쪽으로는 수원의 흥천산 봉수대에 호응하여 기능을 다했던 곳이거늘, 지금은 안타깝게도 주한미군 주둔부대에 갇혀 마음대로 마주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이후 16세기 들어 기강이 해이해지기는 했으나 아무튼 인근 주민으로 구성한 봉수군 50명이 10일마다 교대로 근무하거나 세분한 오거법(五炬法)을 통해 사방팔방으로 12시간 내에 서울의 남산(목멱산) 봉수대를 향해 위급한 상황을 알리던 시스템만은 대단한 응집력을 보일 만큼 괴태곶 봉수대는 충청도와 경기도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경국대전>에 적시한 규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무 일이 없으면 1거요, 적선이 바다에 나타나면 2거요, 점점 해안에 가까이 다가오면 3거요, 우리 병선과 접전을 벌이면 4거요, 적군이 우리 땅에 상륙하면 5거라는 대처법이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은 괴태곶이 고려 때는 국영목장이었단다. 목자(牧子) 4명이 한 조가 되어 암말 100필과 수말 15필을 길러 매년 망아지 85마리를 불려야 했다면 생산성 또한 괜찮은 편이렷다. 그토록 수원 홍원목장으로 암수 48마리와 사료용 풀을 6,000 묶음씩이나 꼬박꼬박 바쳤지만 자자손손 신량역천(身良役賤)의 굴레에 묶여 목마군(牧馬軍)의 신분을 대물림하면서 연례행사처럼 가렴주구(苛斂誅求)를 당했던 민초들의 일상사를 듣노라면 서글프기 짝이 없다. 출번(出番)과 퇴번(退番)의 편의를 고려해 인근 주민 가운데서 차출한 것까지야 십분 이해할 일이로되 사시사철 그 일에 매여 있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식솔의 생계를 위해 최소한의 먹을거리라도 제때 제공했느냐는 문제가 당연지사 현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에 작성한 목장통계표를 보고서도 선뜻 양성에서 유일한 목장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은 건 그래서다. 세월이 흐른 뒤 성종 때 괴태곶 목장은 소 101마리를 키우는 작은 목장이 된단다. 조선팔도의 분포도를 보니 유난히 해안과 도서지방을 중심으로 경기, 전라 남부, 경상 남부, 제주도에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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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태곶 목장 안에 군사방어시설물인 진보(鎭堡)를 둔 조치는 어찌 보면 그럴 법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자연스럽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군량미를 충당한다는 명목하에 차츰 둔전(屯田)으로 둔갑하면서 16세기 이후 목장은 이름만 남게 된다. 성종 때 4만여 필에 이르던 말은 중종 때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그마저 쓸만한 말들은 없었다니 을씨년스런 풍경화가 저절로 그려진다. 하지만 여태 민가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사료들을 샅샅이 찾아낸 다음 전문가의 철저한 검증을 거쳐 일대를 그 당시처럼 복원해낸다면 그야말로 대관령목장에 버금가는 장관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든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징세를 둘러싸고 조정과 갈등이 심했던 것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급기야 1900년 주민들의 집단 청원이 불거졌고, 이듬해 괴태곶 농민들과 봉세 관리 간에 충돌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무자비한 공권력 앞에 무력한 백성들의 삶이야 궁색한 입말을 보태 무엇하랴만, 다들 버겁고 궁핍했던 과거사를 소환하면 늘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릴 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주목한 건 ‘곶(串)’이라는 글자의 어원이다. 언제인가 거기서 파생한 ’고잔‘이란 낱말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잔은 바다 쪽으로 좁고 길게 돌출(사전적으로 ’곶‘이 ’곧‘에서 변화했다는 주장이 있음)한 육지의 끄트머리를 가리키는 ‘곶’의 ‘안’이라는 말(연음)로써 ‘평택섶길 중 소금뱃길’을 걸을 때 건너편에 보이는 땅이었다. 남양만과 아산만의 바닷물을 아울러 바라볼 수 있어 ‘광판대기’라고 부른다는 입말도 정겹거니와 인천과 안산의 ‘고잔동(古棧洞)’이라는 지명이 어쩌면 ‘옛날 마룻바닥’ 같은 모양새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다음 백과의 지식을 빌리자면, 유독 서해안에 ‘곶’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고 하여 비교적 사용빈도가 높은 곳을 보니 갈곶(갈고지), 돌곶(돌고지), 배곶(배고지) 등이 있는데, 갈곶 또는 갈고지(갈구지)라 불리던 마을은 갈곶이(葛串里), 갈곶리(乫串里), 갈화리(葛花里) 등의 이름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단다. 언뜻 뇌리를 스치는 곳만 해도 ‘몽금포타령’에 나오는 ‘장산곶’은 아예 다가갈 수조차 없으니 하릴없다고 치더라도, 달처럼 생겼다는 시흥의 ‘월곶동(月串洞)’이나 해돋이로 이름난 포항의 ‘호미곶’에는 조만간 애틋한 추억을 쌓으며 사는 아내와 함께 가보고 싶다.



■ 프로필


- 고교생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수필집·시조집·기행집 등을 펴냈습니다.

- 평택에서 기고 활동과 기독교 철학박사(Ph.D.) 과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블로그 “조하식의 즐거운 집” http://blog.naver.com/johash 꾸립니다.

- <평택자치신문>에 “세상사는 이야기”를 12년째 연재하는 중입니다.

 

※ 다음호(612호)에는 “원효길과 괴태곶에 묻힌 기억들 - 토론장을 달군 질문들”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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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원효길과 괴태곶에 묻힌 기억들” 괴태곶을 밝힌 봉수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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